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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67화 (67/250)

67화

그들 계획에 이도하가 없었던 건 확실했다. 다만 그게 그 사형수의 독단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도하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소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저였을까.

그렇지 않아도 소환이 어려운 인소더블을, 이리스티리움의 황제인 시오한의 계약자를. 그를 소환함으로써 시오한을 단숨에 끌어들이게 됐으니 이건 악수 정도가 아니라, 아주 판을 발로 걷어 차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시리스.”

잠깐 망설인 이도하가 물었다.

“무슨 일 하는지 물어봐도 돼요?”

“저쪽에서요?”

오즈에서는 그들의 세계를 ‘환계’, 더 습관적으로는 그냥 ‘저쪽’이라고 표현하고는 했다.

“네.”

계약자들은 마력으로도 어지간한 직장인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이니 계약자 자체가 직업인 이들이 많다. 물론 개 중에서도 따로 직업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리스가 씩 웃었다.

“뭐할 것 같아요?”

“경찰?”

“음, 비슷한 것?”

마피아니 세력이니 하는 것들에 익숙해 보이는 시리스를 보며 이도하는 오즈의 일을 저쪽까지 끌고 가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던 오한울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오한울이 했던 말을 썩 믿지는 않아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폐하.”

그때 시리스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때까지도 쭈그리고 앉아 있던 이도하의 허리로 불쑥 들어온 손이 그를 쑥 일으켜 세웠다.

“화이람, 뭐 해?”

“어, 아니 그냥.”

안 듯이 바짝 붙은 시오한이 먼지가 묻은 이도하의 손을 털어주었다. 이도하는 고개를 돌려 시오한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군나르 아스터가 서 있었다. 이도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목례한다. 팔이 꿰뚫려 기절한 남자를 그가 데려갔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이도하의 기색을 눈치챈 시오한이 먼저 대답했다.

“사라졌어.”

“사라져?”

“계약주가 죽은 거야.”

계약주가 죽었다. 그 말에 이도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추적을 피하려고 꼬리를 자른 거지, 자진인지, 살해일지는 모르겠지만. 역소환을 막을 수는 있어도 계약주가 죽어 존재 자체가 흩어져버리는 것은 막을 길이 없어. 이제 차차 전부 사라질 거야.”

그리고 다른 세상으로부터 왔던 그 남자가 이 세상에 잠깐이라도 존재했었다는 흔적 같은 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편리하지.”

시오한이 말했다. 상상력과 욕심이 풍부하다면 이런 계약자의 특징을 이용해 얼마든지 재미없는 짓을 할 수 있다. 이도하의 세계는 오즈가 늘 ‘꿈과 모험의 세계’ 정도로 홍보해 대지만 실상이 그럴 리는 없었다.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가 세상에서 계약자들은 계약주들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범죄도 살인도 저질렀다.

황제인 시오한은 다른 세상으로부터 온 인간들이 쳐대는 분탕질을 수도 없이 겼었을지도 모른다. 이도하는 어떻게 해서 시오한이 계약자의 역소환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과정이 퍽 환멸나고 짜증스러웠을 것이란 것도.

“그럼 다 놓친 건가.”

“암군이 추적에 들어갔으니 잡을 겁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서 있던 군나르 아스터가 대답했다. 복면을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인 그는 발소리도 하나 없었다.

“그래서… 여긴?”

시오한이 물었다. 이도하가 고개를 저었다. 허탕이라는 뜻이었다.

“그 셋이 전부-”

말하던 이도하가 다시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셋이 전부. 그 말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셋이 전부 러시아인들이라고요?”

곧장 튕겨 나가는 바람에 아주 잠깐 보긴 했지만 그래도 셋이 다 행색이 비슷했다. 여자나 술 따위의 영양가 없는 얘기들은 저쪽의 일이었고. 계약은 우연성이 크다. 특기자들은 소환되는 그 순간까지 제가 평생 소환이 될지 안 될지, 누가 제 계약주가 될지도 모르는데 세 사람은 원래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유도계약이에요.”

시리스가 불쾌한 듯 말했다.

“불법이에요. 여기서도, 저쪽에서도.”

“소환은 넓게 말해서는 소망이라고 할 수 있지.”

시오한이 설명했다. 바로 뒤에 붙어서 그리 말하니 귀 언저리에 입술이 맴돌아 간지러웠다. 따뜻한 숨이 스쳐 오싹하기도 하다. 이도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다 그만두었다. 그들은 반 뼘 정도밖에 키 차이가 나지 않는데, 시오한이 너무 가까웠다. 그가 소리도 없이 웃음을 흘리며 한 걸음 옆으로 떨어졌다. 춥지도 않은데 등이 휑해졌다.

“가지고자 하는 힘, 이루고자 하는 일, 그런 기원을 담아서 소환진을 그리고 소환을 하는데… 미리 계약자를 알고서 그를 대상으로 기원을 맞추면 그 계약자가 소환될 가능성이 커지는 거야. 성공할 확률은 반반이고, 성공해서 계약했다고 해도 별로 좋지 못한 끝으로 이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도….”

시오한이 뒷말을 흐렸다. 이도하가 물었다.

“왜 그런데?”

“…마력이 있다고 해서 소환에 무조건 성공하지는 않아, 화이람. 소망, 기원, 그런 것들이 다 이루어지지 않듯이. 같은 이유로 그런 것들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 조작되었다면… 운명이라고 할 만한 본래의 계약자가 소환된 게 아니라는 뜻이야. 유대도, 무엇도 생기지 않아.”

깜깜한 어둠속에서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이도하를 보며 말했다. 곧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도 도박을 도전이라 여기지.”

“유도계약은 미리 환계의 계약자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현자의 탑에서 불법적인 자금 마련을 위해 암암리에 알선하던 일입니다. 근래에 들어서 특히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암군에서는 발라리온의 반군이 현자의 탑에 자금을 댄 이유도 유도계약 때문이라고 판단했었습니다. 강한 힘을 가진 계약자와 계약한 계약주는 한 명만 있어도 큰 전력이 되니까요.”

군나르 아스터가 말했다.

“이제 보니 반군들은 그저 이용당한 것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래서 유도계약이 위험하다는 거야. 이쪽이 의도를 가진 만큼 저쪽 역시 의도를 가질 수 있으니. 계약자라기보다는 감시자였다고 봐야 옳겠어.”

“폐하, 만약 이 불법실험이 오즈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저쪽에서 의도한 거라면….”

시리스가 뒷말을 삼켰다. 시오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든 변하는 것은 없다. 시리스.”

“…예.”

시리스는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한편 그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이도하는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시리스, 아까 그 셋이 사형수를 데리고 와서 잠깐 나갔다가, 내가 소환된 뒤에 다시 돌아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죠.”

“사형수를 들여보내고 바로 나왔다는 말이에요?”

“5분도 안 걸렸으니 그런 셈이에요. 넣어놓고, 문을 잠그고. 그 정도의 시간?”

“그럼 그 벽의 고어들은 누가 새겼을까요.”

그 순간, 시리스의 눈이 반짝 이채를 띠었다. 소환진은 획 하나조차도 허투루 그려지는 법이 없는 예민한 것이었다. 계약의 특혜 따위로는 넘을 수 없는, 김윤혜나 할 법한 연구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하물며 5분은 그 러시아의 깡패들이 소환진을 그릴 시간이 아니고, 그렇다고 정신 나간 사형수가 난해한 고어들을 벽에 새겼을 리도 없었다. 누군가 그런 작업들을 해야 했다면, 현자의 탑 연구원들 밖에 없었다.

그녀가 바로 무릎을 굽혀 다시 그림자를 짚었다. 웅- 작은 이명이 진동하며 다시 파장이 뻗어 나갔다. 이도하는 이번에 깨어지는 그림자 조각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다시 고개를 든 시리스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이틀 전에 두 사람이 지나가기는 했어요. 다만 후드와 복면으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어요. 체격도 가늠하기 힘들어요.”

아무래도 틀렸다, 하며 그녀가 고개를 저을 때였다.

“왜지?”

시오한이 물었다.

“예?”

“왜 얼굴을 가렸을까.”

“……”

“암군이 현자의 탑을 조사하기 시작한 지가 꽤 되었으니 시리스, 그대도 연구원들의 얼굴은 다 알고 있겠지.”

현자의 탑 연구원들이 한둘도 아닌데 그걸 다 어떻게 알겠나, 싶었으나 시리스가 대답했다.

“…예, 압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굳이 얼굴과 체형을 가리고, 쓸데없이 눈에 띄는 폭발을 일으켜 석실을 다 무너트리고, 전력이라고 할 만한 계약주를 죽여 꼬리를 자르고….”

시오한이 느른하게 말했다.

“군나르.”

“하문하십시오.”

“암군에 간자가 있나?”

“없습니다.”

군나르가 즉답했다. 약간의 망설임이나 의심도 없었다. 시리스는 당황하고 긴장하여 그런 제 계약주를 바라보았다. 이도하가 시리스를 보았다. 어렴풋이 빛의 끝자락이나마 번진 어둠속에서 시선이 엇갈렸다.

“아이라에서 알잖아.”

문득 이도하가 말했다.

“시리스, 당신 특기 말이에요.”

공식적인 모든 계약자들의 특기와 계약주들은 아이라에 기록된다. 물론 누구도 쉽사리 열람할 수 없는 블랙박스 같은 것이었으나, 어쨌든 누군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 어떤 것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비밀이 아니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지금 세상은 머릿속에 있는 것도 썩 완벽하게 비밀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아이라, 저쪽 현자의 탑 말이구나.”

시오한이 눈을 휘었다.

“화이람,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건 말이 안 돼요.”

시리스가 말했다. 이도하가 약간 인상을 썼다. 뭔가 마뜩찮은 마음이 들었다. 제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시리스도 미간을 구겼다.

“내 말은, 지금 그건 아이라가 계약자 정보를 오즈에 유출했다는 말인데 그럴 리가 없어요. 아이라가 그런 식으로 오즈에 개입했다가는 정말 엄청난 스캔들이 될 거라고요!”

“이렇게 말해서 미안한데, 나는 지금 그럴 리 없다는 말 같은 건 별로 안 믿겨요.”

웬 사형수에게 소환을 당한 것도 모자라, 됐을지 안 됐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계약까지 할 뻔한 이도하가 말했다. 어찌 되었든 아이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단체였다. 사람이 다섯만 모여도 이상한 놈이 꼭 하나는 튀어나온다는데 그만한 사람이 모였으니 오죽할까. 거기에 굉장한 돈이 될지도 모르는 정보까지 끼어있으면 이도하가 보기에는 이미 만연하다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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