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랜든, 닥치고 정신 차려! 네 계약자는 어떻게 됐지?”
끔찍하게 널브러진 제 동료의 시체 앞에 넋을 놓고 있던 랜든이 고개를 들었다. 동료가 순식간에 그 모양이 되니 공황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제기랄- 이브롤테가 욕지거리를 했다. 모리온이 차게 웃었다. 저딴 새끼가 반군이라고. 거창한 이름을 달고 여기저기 들쑤시는 건 잘하는 주제에 저따위로 눈물 바람을 보이니 조소가 나왔다.
“모, 모르겠어요. 역소환 된 건 아닌 것 같은데, 힘을 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는 제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브롤테의 얼굴은 당장 시체처럼 창백해지고 말았다. 이중에 하나라도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모리온이 즉시 외투를 챙겼다. 그가 후드를 깊이 눌러썼다.
“잠깐-! 어딜 가지?”
“당신들에게 유도해준 계약자들이 모두 작살이 났다는데 상황파악이 안 됩니까?”
아무리 유도계약으로 계약한 계약주라도 계약자의 생사 정도는 느낄 수 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역소환 된 것도 아니고 힘을 쓰고 있지도 않다면 그거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붙잡힌 게 틀림없다는 소리니까. 모리온은 다른 세상으로부터 소환된 그 깡패가 그들을 위해 입을 다물어주길 바라느니 개가 하늘을 날기를 바라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안 되겠지. 그러다 사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으면 일단 튀는 게 좋을 겁니다.”
“모리온!”
이브롤테가 모리온을 붙잡았다. 모리온이 흘긋 그녀의 뒤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마커스가 느긋하게 술병을 챙기고 있었고, 넘어진 의자를 세우고 앉은 그의 계약자가 주머니에 손을 꼽은 채 이쪽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딴청을 부린다. 쯧, 모리온이 혀를 찼다.
“어차피 당신은 우리와 이미 한 배를 탔어.”
이브롤테가 말했다. 옅은 초록색 눈동자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모리온이 말했다.
“...그렇지. 우린 한 배를 탔죠.”
멍청했지. 모리온이 속으로 자조했다. 그의 시선이 이브롤테가 든 단도를 향했다가, 여전히 멍청하게 선 랜든에게 향했다. 이브롤테가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더는 창백해질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똑똑한 여자이니 뭘 해야 할지 알 것이다. 하긴, 정말 똑똑했다면 반군 따위에 가담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이리스티리움을 무슨 수로 뒤집겠다고.
“부탁이니 제발 살아남으십시오. 협박을 하든 뭘 하든 그건 그다음에 하고.”
그녀의 손을 털어낸 모리온은 그대로 방을 나섰다. 복도에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가 그를 보더니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성도의 구석진 외곽에 자리한 이 낡아빠진 여관은 저 고양이와 비슷했다. 누가 오가든 말든 사람이 죽어 나가든 말든 돈만 잘 주면 신경도 쓰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가니 주인은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사내 두엇과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로 모리온이 내려놓은 삯을 챙길 뿐 고개도 들지 않았다.
밤이 늦어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모리온은 후드를 더 깊이 눌러쓰고 골목골목으로 길을 돌아가되 그림자를 피해 걸었다. 계약자들은 조금만 불리해지면 곧바로 역소환이 가능하다. 랜든의 계약자가 붙잡혔다는 것은 그런 계약자를 붙잡을 수 있을 만큼 계약자를 다루는 데 능숙한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소리다.
이리스티리움에서 그런 일이 가능한 게 누군인지 추려보자면 한 손에 꼽는다. 그중 누구라도 이번 일에 개입한 게 맞다면 모리온도, 이번 일에 가담한 발라리온의 반군들도 이미 산목숨이 아니라고 봐야 했다.
조금 번화한 곳에 들어서던 모리온은 문득 길 중앙에 멈춰 섰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후드를 벗었다. 이런 곳에서는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게 더 주목받기 쉽다. 사방에 가로등이 깔린 플라쥬 거리는 밤이 늦었음에도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가게들이 많았다. 그러나 요란하고 떠들썩한 거리가 눈에 띌 정도로 어수선했다. 굉음이… 불꽃이…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그는 갈 길을 잃은 사람처럼 그대로 잠시 서 있다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치안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더 가면 현자의 탑이었다. 어떤 불안한 낌새는 없었다. 어수선하긴 해도 거리는 평소와 같다. 그러나 모리온은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누굴까.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걸까. 이대로 도망가면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모리온이 다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반군이 운영하던 도박장에서부터 이어진 추적이 결국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라면. 만약 지금 그들의 뒤를 쫓고 있는 게 황제의 암군이라면.
모든 판이 뒤집힌 게 혹시라도 황제가 직접 개입했기 때문이라면 아무리 그림자를 피해도 그는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끝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일 테였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시야가 일그러진다. 우뚝 서 있던 모리온이 휘청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식은땀이 묻어났다.
[내가 인소더블이었으면 와, 씨. 그냥 세상 다 찜쪄 먹었다. 근데 그 형은 그냥 평범하게 학교나 다닌대. 존나 이해 안 가지 않아? 아 학교가 뭐냐면-]
언제나처럼 시시콜콜하게 떠들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현자의 탑으로는 갈 수 없다.
그는 목적지가 있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걷다가, 다시 멈춰 섰다. 그는 어느새 꽉 쥐고 있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자국이 난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하다.
“…멍청했지.”
이제껏 세상에 어느 것 하나 그의 마음대로 되었던 게 없었는데, 아무것도 틀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다니. 잠시 망연히 서 있던 그가 다시 꽉 주먹을 쥐었다. 바짝 날이 선 눈이 번뜩였다. 그가 발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높게 올려 묶은 긴 검은 머리칼이 말총처럼 흔들렸다. 섬광이 새파랗게 돋은 눈동자 위로 반짝이는 그림자 조각들이 비추어졌다. 두 손바닥이 닿은 부분부터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처럼 뻗어 나간 파장은 까만 그림자를 모자이크 조각으로 잘게 부수었고, 그렇게 깨어진 조각들은 리듬에 맞춰 통통 튀어 오르는 그래픽처럼 불규칙하게 솟았다 가라앉으며 반짝 빛났다.
이도하는 파장이 제 발밑까지 뻗자 분분히 물러나다 삐끗 넘어지고 말았다. 시리스가 그런 그를 보고 깔깔 웃었다. 이도하는 멋쩍게 투덜거리다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조각난 그림자들을 만져보았다. 둥글게 휘어진 벽에 등이 딱 닿을 정도로 구석으로 물러난 상태였으니 별 방해는 되지 않을 것이다. 튀어 오른 그림자를 통과해 쑥 들어간 손끝에 우둘투둘한 바닥만 만져졌다.
“…?”
이도하가 멈칫했다. 손톱 끝에 얕은 홈이 걸렸다. 아주 얕아서 그저 거친 표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홈이 옆으로 쭉 이어졌다. 마치 얇은 선 같았다. 착각이 아닌 것 같은데. 이도하는 완전히 손바닥을 붙이고 바닥을 더듬어보았다. 빛을 비춰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림자가 훼손되면 안되기에 그럴 수 없었다. 뭐지.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세 명이 맞아요. 처음부터 세 명이었네. 그 사형수를 포함해서 네 명.”
마침 고개를 들며 시리스가 말했다. 모자이크 조각으로 쪼개져 있던 그림자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암군의 사령관인 군나르 아스터의 계약자인 그녀는 일정 시간 이상 고정된 그림자로부터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드물게도 당당하고 유쾌하게 ‘그레텔의 그림자’라는 자신의 특기명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도하는 아이라의 괴악한 작명법답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감성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형수는 데리고 올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원래도 정신 나간 놈이겠지만 좀 더 나간 것 같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짜증 나게 자꾸 웃기만 해서 몇 대 맞았는데 이가 나가버리니까 더 이상 손대지 않던데요.”
“여기만 읽은 거 맞아요?”
“네. 잠깐 사이에 많은 걸 했네요.”
그곳은 넓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동공이었다. 천장이 낮아 이도하가 선 채로 팔을 들기만 해도 손끝에 천장이 닿았다. 양옆으로 뻗은 긴 복도에는 좌우로 철장이 달린 좁은 석실이 늘어서 영락없는 지하 감옥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이도하가 소환된 곳은 그 복도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석실이었다.
지금은 천장이 무너져 달빛이 쫙 쏟아져 들어오지만 그것도 이 동공까지는 닿지 않아 아주 깜깜했다. 잘 살펴보면 구석에 조그만 계단이 붙어 있었는데, 벽에서 벽돌이 삐뚤빼뚤하게 튀어나온 것에 불과해 보일 정도로 작고 성의 없는 계단이었다.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붙잡히고, 한 명은 역소환으로 도망간 세 명의 남자들과 사형수 웨이드는 그 성의 없는 계단을 타고 내려와 안쪽의 석실에 다다른 것이다.
“그럼 그 사형수 놈을 데려다 놓고 나갔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다가, 당신이 소환된 뒤에야 내려온 거죠. 그리고 나서는….”
시리스가 주먹 쥔 양손을 쫙 펴며 머리 위로 둥글게 뻗었다. 폭발하고 무너지고 난리가 났다는 뜻이다.
“뭐라고 하는지는 못 들었어요?”
이도하가 물었다. 시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말 그대로 그림자에 남은 흔적을 읽는 거라서 계약 특혜가 발현되지 않아요. 중국어가 아니라면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는 소리죠. 러시아인들 같던데요.”
“러시아?”
“마피아들일 수도 있어요. 차림새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일반인 같지는 않지 않아요?”
이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군나르 단장이 끌고 갈 때 얼핏 봤어요. 팔이 문신이 많던데.”
“레드 마피아네. 삼합회처럼 레드 마피아도 마력 산업에 뛰어든 지가 꽤 됐거든요. 그래도 이건 대체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네. 실패했다고 했죠?”
계약을 말하는 것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몹시 불쾌해 이도하는 얼굴을 구겼다.
“몰라요. 시오한이 중간에 깨트렸으니까. 시오한이 아니었더라도 내가 죽였을 거고.”
“하긴.”
시리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 계약의 전말이 이중계약인지, ‘훔친다’고 이도하가 표현했던 것처럼 계약자의 탈취인지, 강제 계약파기인지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계약자인 그들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더러웠다.
“이거 정말 보통 일이 아닌데….”
시리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실패했다고 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실험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성공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그들이 찾았다고 하면 단순히 이도하와 시오한 사이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오즈보다도 그의 세계가 더 발칵 뒤집어질 일이다. 계약자들의 일에는 다 설명할 수도 없는 어른의 사정이 깊이 엮여있으니 아주 지저분한 난장판이 될 가능성이 몹시 크다.
“이 지경까지 오도록 정말 감쪽같이 숨겼네요. 당신이 소환되어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겠어요.”
시리스가 말했다. 이도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차라리 제가 소환되어서 다행이다. 그 말이 축축한 걸레처럼 그를 찝찝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