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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65화 (65/250)

65화

수위가 낮아진 물이 무너진 천장을 졸졸졸 흘러내려 바닥에 고인다. 바닥에 흥건한 피와 섞여 역겨운 피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핏물이 풍성한 옷자락의 아랫단을 물들이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시오한은 방금 전까지 이도하가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는 얼굴은 무섭도록 표정이 없었다. 그가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1초 전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곳이 보이지 않게 잘려나갔다. 미처 따라가지 못한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나가 허공으로 나폴 날아올랐다. 시오한은 제 앞에 꼬꾸라진 두 인영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팔이 꿰뚫린 남자는 이도하의 범위 안에 들어 수차례의 폭발로부터 목숨은 건졌지만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었다. 동료를 챙기는 무리는 아닌 모양이지. 냉소하며 시오한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소리도 충격도 없었지만 머리 위의 공간이 잘려 나갔다. 그대로 있었으면 머리와 목이 분리되었을 것이다. 시오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길바닥에 기어가는 벌레, 혐오스러워 보기 불쾌하지만 굳이 수고를 하여 죽일 필요까지도 없는 미물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발등이 꿰뚫린 남자가 씨근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온몸을 벌벌 떨었으며,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수치와 분노에 차 있다. 남자의 신형이 흔들렸다.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릿해졌다 말았다를 반복한다.

-시오한!

순간 시오한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집중하여 유심히 서 있던 그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감돌다 사라졌다.

“들렸나? 아니, 아니군… 환청은 제법 익숙하지만….”

남자에게 묻는 것 같다가도 자문자답한 시오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을 때 미소 같은 건 흔적도 없었다.

“역소환이 안 되나?”

“이, 이럴 수는-”

“이리스티리움의 검이로군.”

“당신이 왜 여기에-”

핏물에 젖어 지저분해진 신발 끝이 여전히 남자의 발을 꿰뚫고 있는 검 자루를 툭 차올렸다. 끄아아악-! 남자가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다.

“무엄하구나. 알아보았다면 조아려라.”

시오한이 이번에는 검 자루를 위에서 밟아 내렸다. 아아아악! 아악! 몸부림치며 남자가 엎드렸다. 땀이 더러운 핏물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이제 명백하게 공포로 덮여 있었다.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게임이나 영화 속의 인물이 아닌, 그의 세계와는 달리 이 자리에서 정말로 그를 처형할 수 있는 제국의 군주를 눈앞에 두었다는 공포가 남자를 엎드리게 만들었다.

“왜 화이람을 소환했지?”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시오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별안간 남자의 발에 박혀있던 검이 시오한을 향해 쑥 뽑혀져 나왔다. 검 자루가 빨려 들어가듯 시오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가 검을 휘둘렀다. 캉! 번쩍 불꽃이 튀었다. 붓질을 한 듯 어둠 속에 궤적이 번졌다. 챙강! 다시 한 번 충돌한 빛이 두 개로 쪼개졌다. 튕겨져 나온 것 중 하나를 잡아챈 시오한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집어던졌다. 쐐액-! 부러진 칼날이 공기를 찢으며 쏘아져 나갔다.

“아악!”

허공에서 또 다른 남자가 곤두박질쳤다. 그가 시오한을 향해 기습적으로 날린 군용 나이프의 반쪽이 쇄골을 자르고 박혀 있었다. 그 사이에 발이 꿰뚫렸던 남자는 사라지고 없다. 찰나에 역소환으로 돌아간 것이다.

쯧, 시오한이 나직이 혀를 찼다. 그는 단 하나도 살려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 외에 더 이상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남자들은 셋이었고, 이제 둘이 남은 것이다.

헉헉- 어깨를 움켜쥔 남자가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시오한을 노려보았다. 순간 푸른색 눈동자 위로 섬광이 번뜩였다. 쾅! 폭발이 일었다. 시오한의 코앞에서 터진 구름 같은 화염이 이글거리며 그의 신형을 삼켰다. 열풍이 휘몰아쳤다. 풍성한 옷자락이 펄럭였다. 하! 남자가 핏발 선 웃음을 터트렸다.

“시발- 지가 황제라고 해 봐야 인간이지.”

비틀거리며 남자가 일어섰다. 제 동료에게 다가가려던 남자의 발치에 시체가 걸렸다. 사형수의 시체였다. 시발새끼! 남자가 시체를 걷어찼다.

“미친 새끼! 주제도 모르는 새끼! 일을 이 따위로-”

“처음부터 화이람은 계획이 아니었군.”

“!!!”

남자가 입을 벌렸다. 경악으로 홉뜬 눈동자에 불꽃 속에서 드러나는 실루엣이 비춰졌다. 열풍에 휩쓸려 잔뜩 떠올랐던 황금색 머리칼이 가라앉고 있었다. 무심히 그를 보는 눈동자에 기이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섬광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되었다, 이제.”

“안… 컥!”

검이 남자의 가슴을 관통했다. 두부를 찌르듯 쉽고 무성의했다. 정확하게 심장을 관통한 검에 남자가 왈칵 피를 토해냈다. 그대로 검을 놓아버린 시오한은 남자가 절명하는 것을 다 지켜보지도 않고 돌아섰다. 그의 앞으로 새까만 옷을 입은 사내가 뚝 떨어져 내렸다.

“군나르.”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직속 암군 사령관, 군나르 아스터가 부복해 고개를 조아렸다. 짙은 남색 머리칼에 눈동자가 꼭 밤을 그대로 덜어낸 듯한 남자였다. 그가 더러워진 시오한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추렸다.

“두어라.”

“늦어서 죄송합니다.”

“화이람을 소환한 건 이 사형수의 독단이었던 것 같으니 아직 저쪽에서도 상황 파악이 안 되었겠지. 이들 중 하나가 역소환 되어 돌아갔으니 시간 싸움이다. 쫓아라.”

“명 받듭니다.”

널브러진 시체들에 시선을 준 시오한이 덧붙였다.

“꼬리를 자르려 할 테니 형군이 함께 움직여야 할 것이다.”

“예, 폐하.”

“치안대는 자리를 지켜 성도의 소란을 정비하라 하여라. 쓸데없이 불안감을 조성할 필요 없으니.”

“속히 움직이겠습니다.”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천장이 뻥 뚫린 석실 위에 어느새 이도하가 서 있었다. 새까만 밤하늘, 별빛을 모조리 삼켜버리고 휘영청 뜬 보름달을 뒤로 하고 그를 내려다본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오한이 손끝을 움찔했다.

이도하가 스스로 돌아온 것을 그는 진작 알고 있었다. 남자를 조아리게 하고, 심장에 칼을 쑤셔 넣을 때도 그의 계약자는 이곳에 있었다. 다 보고 있었다.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고. 그리고 시오한은 기다렸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달빛이 시오한에게로 그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미하게 맴도는 불꽃의 냄새와 역겹게 떠도는 피 냄새를 서늘한 밤바람이 쓸어갔다.

시오한은 여전히 무너져 내린 지하의 석실에 서 있었다. 흘러내린 물과 피가 뒤엉켜 옷자락을 물들이고, 무너져 내린 석실의 벽돌들이 그의 발치에 나동그라져 있다. 심장에 검이 꽂힌 시체가 망가진 인형처럼 하늘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을린 돌과 사방에 난무한 피로 전쟁터와 같다.

그 틈바구니에 선 시오한이 말없이 이도하를 올려다보았다. 이도하가 얼핏 눈살을 찌푸렸다. 물끄러미 시오한을 바라보던 이도하가 몸을 숙였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올라 와.”

천천히, 시오한의 얼굴 위로 표정이 번졌다. 말간 웃음이 떠올랐다. 시오한이 무너져 내린 석벽을 밟고 이도하의 손을 잡았다. 이도하가 힘을 줘 그를 끌어올렸다. 이전에 안아봤을 때도 느꼈지만, 키와 근육에 비해 가벼운 몸이 쑥 딸려 올라왔다. 이도하의 등에 손을 올린 시오한이 그대로 부드럽게 그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화이람. 다쳤어?”

시오한의 어깨에 턱을 올린 이도하가 제 손을 바라보았다. 시오한의 손에 튀었던 건지 손끝에 피가 번져있다. 손을 비벼 문질러보지만 번지기만 할 뿐 닦여 사라지지 않는다. 주먹을 쥐어 손을 안으로 말아 넣은 이도하가 대답했다.

“나한테 다쳤냐고….”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그가 물었다.

“당신은.”

시오한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도하는 그제야 제가 아플 정도로 몸에 힘을 주고 있었음을 알았다. 깊이 안도하며, 이도하는 그대로 시오한에게로 늘어지고 말았다. 단단한 팔이 그를 받쳐 안았다.

“…당신이 쫓아낸 거 아니지?”

이도하가 물었다. 그런 식으로 오즈에서 튕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에는 보통 시오한의 마력이 다했을 때였는데, 그가 이렇게 멀쩡한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다행이면서도 찝찝하고 불안했다.

폭발이 터지고 보이지도 않는 것으로 벽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는 상황이었다. 행여나 제가 다칠 것을 걱정해 시오한이 저를 쫓아냈을까, 하는 찰나의 가설이 놀랍게도 그럴듯해 이도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라면 좀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럴 일은 영원히 없어, 화이람.”

그의 등을 토닥이며, 시오한이 대답했다.

“소환이 불안정해서 그랬던 것 같아.”

이도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당신이 부른 게 아니었으니까.”

당신이 부른 게 아니었으니까.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시오한이 아닌 다른 사람이 저를 부를 수 있다는 생각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었다. 불가능한 일을 굳이 왜. 만약 그 계약이 성공했더라면. 만약 시오한이 검을 다룰 줄 몰랐더라면. ‘만약에.’ 이도하는 그 말 하나로 오늘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들을 잠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거인의 눈알 같은 달이 머리 꼭대기에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여기가 오즈다.

할 얘기가 많았지만, 이도하는 시오한을 안은 팔에 좀 더 꽉 힘을 주었다.

***

“커억-!”

왈칵 토해낸 피가 지푸라기만 굴러다니는 초라한 여관 바닥에 뿌려졌다. 내장이 찢겨졌는지 뱉어낸 핏덩어리들이 잔뜩 엉겨 있었다. 피를 토해낸 몸이 허물어져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브리안!”

내내 어떻게든 그를 추스르려고 했던 그의 동료가 황급히 쓰러지는 몸을 붙잡았다. 그러나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놓치고 말았다.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가 쩌억 쩌억 갈라지고 있었다. 순했던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일그러진 얼굴이 오래된 고목나무처럼 처참했다.

발라리온 반군의 일원인 그가 피를 쏟기 시작한 것은 아주 잠깐이라고 할 만한 짧은 시간 전이었다. 그들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고, 큰 걱정은 없었다. 위험부담을 안은 실험이 아니었다. 실패한다면 막대하게 쏟아 부은 자금이 한 순간에 날아가겠지만 그게 전부였다. 성공한다면 대륙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약간의 초조함과 기대, 흥분, 그 정도였다. 이런 일은 전혀 예정에 없었다.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었다.

“마커스!”

이브롤테가 벼락같이 외쳤다. 푸석푸석한 잿빛 머리칼의 남자는 테이블에 발을 올린 채 뻑뻑 담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이브롤테가 기울어진 의자 다리를 걷어찼다. 콰당!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간 마커스 위로 순식간에 올라탄 이브롤테가 그의 목에다 단도를 들이댔다.

“어어.”

마커스가 두 손을 들었다. 이브롤테가 으르렁거렸다. 계약자가 마력을 많이 소모하는 바람에 그녀의 안색 역시 좋지 못했다. 창백하게 질려 있었으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입술엔 푸른빛이 돌았다.

“이 개새끼- 무슨 수작을 부렸어.”

“수작은 무슨. 왜 나한테 덤터기야, 마력 조절 하나 못하는 당신 동료한테 따져야지. 끌어간다고 그걸 다 뺏기냐.”

“내 계약자는 지금 역소환 됐어!”

“누가 들으면 계약자를 걱정하는 줄 알겠네. 유도계약 주제에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보지?”

“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집어치워요, 이브롤테. 마커스의 계약자가 그만한 능력이 있는 줄 압니까?”

이브롤테가 고개를 들었다.

“모리온.”

푸석푸석한 머리칼이 짚더미 같고 장작처럼 마른 남자였다. 창백한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흘긋 모리온을 본 마커스가 히죽 웃었다. 기분 나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가 말했다.

“그래, 내 계약자는 그만한 능력이 없지. 내가 괜히 팔아치우려고 하게? 그쪽이 날 선택한 이유도 까먹었어?”

“어차피 실패하면 네놈한테는 한 푼도 없어.”

“아니라니까.”

짜증스럽게 말한 마커스가 입을 열었다.

[온타]

깊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웅, 울렸다. 그의 머리맡에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소환진이 쫙 펼쳐졌다. 빛의 파편 같은 푸른 알갱이들이 잔뜩 떠올랐다. 중심으로 확 몰려들더니 형체를 이룬다. 완전히 뭉쳐진 순간 형체가 한 발 내딛었다. 빛이 꺼지듯 사라지며 소환진이 흩어졌다.

까만 머리칼에 까만 눈, 등 뒤에 기계공학과라고 적힌 항공 점퍼를 걸친 남자는 심드렁하게 처음 보는 여자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것 같은 계약주를 바라보았다.

“또 지랄 났네.”

“보여? 여기 있잖아, 내 계약자. 소환된 적도 없다고.”

마커스가 제 계약자를 가리켰다. 운동화를 신은 발끝이 마커스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마커스가 짜증스럽게 손을 휘저었다.

“야, 또 술 쳐 마셨냐? 이번엔 성추행이야? 존나 가지가지 한다?”

“꺼져, 온타.”

“오라 가라, 이 새끼가 아주 누굴 개새끼로 보나. 마력이나 내놓던가.”

“곰도 재주를 부려야 돈을 주는 거다.”

“응, 돈이나 있고 말하시고요. 마력도 쥐똥만 한 게 허세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이브롤테가 신경질적으로 검을 떼고 일어섰다. 그녀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모리온.”

모리온은 안경 너머로 꼬꾸라진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브롤테의 말이 맞았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됐다. 저건 마력을 과다하게 소모했을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증상 중 하나였다. 마력이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바닥나면 저렇게 되었다.

그러나 절명한 브리안이 저렇게 될 만큼 그의 계약자가 힘을 쓸 일은 이번 계획에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그 사형수는 마커스의 계약자를 소환해야 했고,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마커스의 계약자는 그의 말마따나 공격 능력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면에 브리안에게 유도해 준 계약자는 폭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반항 정도는 제압할 수 있었다.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렇게 골랐다. 그런데 일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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