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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64화 (64/250)

64화

이도하는 뭐가 더 말이 안 되는지를 따지는 건 포기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었다. 이도하가 머리를 짚었다.

“그럼 누군가 당신 마력을 훔쳐다, 이 새끼한테 준 거라는 말이야?

“그런 게 아니야, 화이람. 그대의 계약주는 나고, 그렇기 때문에 그대를 이 세상에 불러들이는 데는 필연적으로 내 마력이 들 수밖에 없어. 내가 보기에는….”

시오한이 칼끝으로 바닥을 짚었다. 거대한 발톱에 할퀴어진 것처럼 깊고 거칠게 베인 흔적은 그의 흔적이 분명했다. 소환진은 부순 흔적이었다.

“소환진을 매개삼아 내 마력으로 그대를 소환하고, 이 자의 마력으로 새 계약을 성립시키려고 한 거야.”

특기자를 소환할 때 가장 마력이 들 때라고 하면 역시 첫 소환의 순간이었다. 그건 처음 산을 뚫어 길을 내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이건 처음 소환에 드는 마력은 하나도 쓰지 않고 아주 경제적으로 남의 계약자를 훔쳐다 쓰겠다는 의도였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이렇게 창의적으로 돌아버린 잔머리를 굴렸지….”

제법 차분해졌던 이도하는 다시 뒷목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계약주의 마력을 이용해 계약자를 소환해내서 새 계약을 뒤집어씌우는 것도 모자라 마력도 없는 새끼한테 마력을 준다… 죄다 계약주가 되겠네. 이게 가능하긴 해?”

이도하가 시오한을 올려다보았다. 시오한이 고개를 저었다.

“되게 하려고 했던 모양이지.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시신은 그사이에 아까보다도 더 늙고 쪼그라들어 이제는 거의 수백 년 된 미라처럼 보였다.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쪼그려 앉아 아직 피가 번지지 않은 바닥을 쓸어보았다. 벽돌이 울퉁불퉁할 뿐 파인 홈 같은 건 없었다. 먼지만 손끝에 묻어나온다. 석벽을 문질러 보니 미세한 홈이 걸린다. 거미줄처럼 얇고 많아, 무수히 떠오르던 글자들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저 오래된 벽에 흠이 많구나, 했을 정도였다.

손끝에 묻은 석벽 가루를 비벼 떨어트린 이도하가 바닥을 바라보았다. 어른거리는 불빛 속에 천천히 덜어진 가루가 꾸덕하게 번진 피 위로 떨어졌다. 내 거, 내 거 지껄이던 광기 어린 얼굴이 생각나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가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이거, 현자의 탑이지.”

죽든, 사라지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사형수. 마력을 우겨넣은 몸. 감옥처럼 철창이 달린 조그만 석실. 섭리에 어긋난 소환. 고작 이런 보잘것없는 사형수 따위가 혼자서 이 모든 일을 했을 리가 없다. 탐욕스러우면서 악하고, 멍청한 인간들은 보통 탐욕스럽고 똑똑한 인간들이 쓰고 버리기 딱 좋다. 탐욕스럽고 똑똑하며, 오즈에서 계약자와 계약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곳이라고 하면 현자의 탑밖에 없었다.

“그 불법실험.”

이도하가 말했다.

“이 새끼들이 계약자를 훔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던 거야?”

이미 계약이 성립한 계약자를 소환해 계약을 시도한 것도 모자라서 그러기 위해 계약주의 마력을 끌어다 쓴다. 홧김에 ‘훔친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제 보니 아주 정확한 표현이었다. 만약 이게 그게 되는지 안 되는지를 실험한 거라면, 그는 방금 그걸 직접 실험 ‘당할’ 뻔 한 것이다.

“이 미친….”

“이제부터 물어보면 알겠지.”

시오한이 슬쩍 웃음 지었다. 이 석실의 냉기가 스며든 것처럼 서늘했다. 정말 ‘물어’보지만은 않으리란 게 아주 확실한 어조였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이도하는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상하지. 화이람, 왜 그대를 소환했을까.”

느른하게, 시오한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체를 내려다보는 싸늘한 눈동자가 내리깔린 속눈썹에 감추어졌다.

“…그러게. 그거 이상하네.”

고작 사형수였다. 그것도 우겨넣어진 마력조차 감당하지 못해 죽어가던 남자였다. 시도가 성공해 이도하와 계약을 맺었다고 한들 아무것도 못할 게 분명했다. 인소더블인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은밀하게 자금을 끌어들여 실험을 감행해 놓고 하필 황제의 계약자인 이도하를 소환하는 건 누가 봐도 멍청한 짓이다.

앞과 뒤를 따져 합리적으로 해야 할 일과 안 될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인간이었더라면 애초에 사형수가 되지도 않았을 테니, 또 언뜻 그럴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도하는 찝찝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런 악수를 둔다고?

문득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화이람.”

“어?”

석실 밖 복도에서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겹치는 소리가 한두 개가 아니다. 적어도 서넛은 되는 것 같았다. 허공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팟- 꺼졌다.

“어이- 웨이드!”

건들거리는 목소리였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그냥 길거리의 불량배들 같다.

“이건 씨, 뭘 했으면 됐다 안 됐다, 얘기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뒈졌나?”

“떠들지 마, 울리잖아.”

“대답이 없어.”

시오한이 입구를 봉쇄한 철창 옆 벽에 몸을 붙이며 이도하를 당겼다. 이도하가 훌쩍 피 웅덩이를 뛰어 넘었다. 시오한이 그를 제 발위에 올렸다. 긴 옷자락 끝이 끈적한 피로 물들었다. 됐어, 이도하가 속삭였다. 시오한은 슬쩍 웃기만 했다.

시답잖은 농담으로 쓸모 있는 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이 떠들며 남자들은 금세 철장 앞으로 다가왔다. 불빛이 어른어른 비추며 남자들의 그림자가 석벽 안으로 드리워졌다. 어둠속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에 빛이 비추며 색이 입혀진다.

“뭐야, 진짜 뒈진 거야?”

“이 새끼, 성공할 거라고 그렇게 장담을 했다며?”

“소환하다 죽은 게 아니라 마력 때문에 터져 죽은 거 아닌가…. 이야, 이 피 좀 봐.”

“열어 봐.”

철컹철컹, 철장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시오한이 흘긋 이도하를 보았다. 그가 검을 고쳐 쥐었다. 덜컹! 철장이 찢어지는 소리를 길게 내며 열렸다. 고작 두세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석실이었고, 시체는 입구에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 있으리란 의심조차 하지 않는지 남자들은 석실을 살펴볼 생각도 없어 보였다. 문가에 선 남자가 시체를 뒤집어보았다.

“오. 이거 호러네. 좀 더 비춰 봐.”

이도하는 불빛을 등진 남자를 보았다. 환한 금발에 덩치가 크다. 고개 숙인 옆모습이 얼핏 봐도 백인이었다. 정장 바지에 검은색 구두, 검은색 재킷. 어딜 봐도 오즈의 복식은 아니다. 계약자였다.

“죽어서도 역겨운 새끼, 꼬라지 봐라. 아무래도 이 새끼는 안 될 것 같다고 했지, 내가?”

“챙겨. 일단 시체라도 갖다 주면 해체를 하든, 뭘 하든 하겠지.”

“쯧, 일이 또 복잡하게 돌아가네. 현자의 탑도 공치고 시간도 얼마 없는데 또 언제-”

“잠깐만.”

시체를 들춰 올리려던 남자가 멈칫했다. 그가 시체의 품을 헤집었다.

“여기 상처가-”

어떤 기민한 감각에서였는지 남자가 그대로 시체를 내팽개쳤다. 재빨리 물러서려고 했으나, 이미 시오한의 검이 남자의 팔을 꿰뚫은 뒤였다. 관절을 정확히 관통한 검이 바닥을 두부처럼 뚫고 깊숙이 틀어박혔다.

“으아아아악!”

“뭐야?!”

표본처럼 못 박힌 남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그 순간 쾅! 폭발이 일었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열기가 가득한 바람이 사방으로 삽시간에 뻗어나갔다. 녹아내린 철장이 창날처럼 튕겨나가고 석벽과 천장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서늘한 밤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쾅! 한 번 더 폭발이 일었다. 벽돌과 파편들이 총알처럼 날렸다. 그러나 단 하나도 둘에게는 닿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반원형의 역장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이도하가 고개를 흔들자 푸르스름한 역장 위로 쌓여 있던 것들이 모래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

쾅! 또다시 폭발이 일었다. 끝이 아니었다. 연달아서 미친 듯이 폭발이 이어졌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불꽃과 열기가 뒤덮어 눈이 시릴 정도였다. 저쪽에 폭발이 특기인 계약자가 있는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짐작건대 이리스티리움의 성도에서 아득히 떨어진 곳도 아니었다. 이 정도 난사를 해대면 임종 직전의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어 쳐다본다. 수도 치안대는 물론이고 궁성 기사단까지 끌어들일 화려함이었다. 뒷일 따위는 개나 줘버린 미친 짓이다. 이 세계에 적을 두지 않은 계약자들이나 가능한 짓이며, 제 계약주들의 안위가 안중에도 없어야만 할 법하다.

“이 씨발 놈들이 진짜-”

참다못한 이도하가 서늘하게 눈을 치떴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눈동자에 언뜻 섬광이 스쳤다. 우우우우웅-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쿠르릉- 용이 울부짖는 것 같은 묵직한 진동이 내려앉았다. 쾅! 또 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불꽃이 부풀어 오르며 열기를 터트리려는 찰나였다.

웅크리고 있다 터져 나온 것 같은 물결이 불꽃을 휩쓸어 삼켰다. 그들 위를 완전히 덮치고 가로막는 것은 뭐든 부술 기세로 짓쳐 나갔다. 고막이 흔들리도록 이어지던 폭발 소리가 사라지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바다 속에 들어온 것처럼 거세게 일렁이는 물결 위로 까만 하늘이 투영되어 보였다.

“장관인걸.”

언제 어디서나 태연한 시오한이 느긋하게 말했다. 손을 들어 물결에 손을 콕 넣어보기까지 한다.

“…우리가 맹약자는 맞나 보다. 운명 공동체네, 이건.”

설마 이 광경을 또 보게 될 줄이야. 이도하는 약간 질려 말했다. 이도하가 손을 벋어 시오한의 뺨을 만져보았다. 약간 따스한 뺨과 목에서 땀이 조금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미 한 번 특기를 지나치게 남발했다. 이도하는 더 이상 도박을 할 수 없었다. 특기를 오래 펼쳐서는 안 된다. 특히 이곳에서는.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힘으로 짓누르라면 이도하에게 그보다 쉬운 게 또 없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되는 때였다.

순간 시오한이 이도하를 당겼다. 콰직! 돌바닥이 부수어지는 소리가 났다. 번쩍이는 칼날이 방금 전까지 이도하가 있던 곳에 꽂혀 있었다. 이도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분명 물결로 뒤덮였던 곳에 남자가 허공을 밟고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네모난 곽에 유리된 것처럼 남자의 주변으로 물결이 꺾여있다.

이도하가 남자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멩이들이 남자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끝이 창날처럼 뾰족하게 벼려진 돌멩이들이 남자가 딛고 선 허공에 박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유리가 깨진 것처럼 쩌저적 금이 갔다. 동시에 시오한의 신형이 움직였다. 바닥에서 뽑혀 나온 칼이 대체 어떤 각도로 어떻게 움직였는지 이도하는 보지도 못했다. 허공이 잘라지듯 빛이 홱 번졌고, 칼날이 남자의 발밑을 꿰뚫고 들어갔다.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남자가 떨어져 내렸다. 다시 빈 허공으로 얕아진 물결이 밀려들었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휘둘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등골이 주뼛 섰다. 이도하가 황급히 엎드렸고, 시오한이 몸을 비틀었다. 둘 사이에 있던 석벽이 네모나게 툭 떨어져 나왔다. 잘린 단면이 원래부터 그 모양이었던 것처럼 매끈했다.

“뭐-”

그 순간 이도하의 시야가 거뭇하게 휩쓸렸다. 노랗고 붉게 물들며 속이 뒤집힌다. 뇌가 뜯겨나간 것처럼 아팠다. 어깨에 둔탁한 충격이 왔다. 장막을 걷은 것처럼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도시의 소리였다. 훅 들이킨 숨에 바다 냄새가 물씬 풍겼다.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이도하가 번쩍 눈을 떴다. 고층 빌딩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다. 통유리로 된 건물 외벽이 햇빛을 쨍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외국인들이 뭐라 뭐라 떠들어댔지만 하나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소환되었던 그 도로에 내팽개쳐진 이도하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튕겼어?

세계로부터 뱉어지는 그 더러운 느낌. 제가 어떻게 된 건지 깨달은 이도하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당황으로 얼룩져 있던 얼굴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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