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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63화 (63/250)

63화

화이람. 이도하는 그 이름을 제 혀끝으로 굴려보았다.

“…이름, 다시 불러줘.”

“화이람.”

“또.”

“화이람.”

“…응.”

이도하가 웃음 지었다. 그가 시오한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서로의 발이 교차했다. 시오한이 그의 얼굴을 덧그리다, 머리칼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이도하가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럽게 그 손에 머리를 비볐다. 생각해 보면 쭉 그랬다. 처음부터 시오한과의 접촉은 그에게 이런 만족감을 주었었다.

이도하는 부정하지 않았다. 김윤혜가 말했듯이 계약자가 자연스럽게 제 계약주에게 가지게 되는 애착, 시작은 그랬을 것이다. 만지고 싶고, 닿고 싶고…, 그렇게 하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했다. 안았고, 키스했다. 이도하는 애초에 충동에 저항한 적도 없었다. 감정은 다른 문제였다.

계약에 의한 애정. 이도하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그건 고작 종잇장 같은 것에 불과했다. 얼마든지 찢어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다른 세상의 존재를 불러들여, 그들이 맞닥트릴 제 것들을 위해 이 세계가 해야만 했던 최소한의 보호. 고작 그 정도이기 때문에.

문제는 당신이었지.

이도하가 시오한의 가슴을 짚었다. 이도하는 제가 이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전에 없이 벅차고, 무겁다. 만약에 이게 당신이 내도록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라면.

“당신이 왜 날 이렇게… 아끼는지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그런데 이제 정말 상관없거든.”

“……”

“어디 가지 마, 시오한.”

“…응, 화이람.”

“당신이어야 해.”

시오한이 이도하를 당겼다. 다시 입술을 겹쳤다. 이도하는 빛줄기 같은 속눈썹 아래 그와 눈을 마주했다. 시오한이 몇 번에 걸쳐 입술을 머금었다.

“그대야말로 약속해, 화이람.”

맞닿은 입술로 시오한이 말했다. 또렷하게 그를 바라보며.

“사라지면 안 돼.”

“무슨 소리야?”

이도하가 물었다.

“내가 사라질 일이 어디 있다고. 부르면-”

부르면 되잖아, 하려던 말은 삼켜졌다. 이도하가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이건 어감이 다른 느낌이었다. 시오한의 눈이 일렁였다. 웃는 것 같지만… 꼭 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척이라 잘 알아볼 수 없다. 이도하가 조금 몸을 물리려고 했으나, 시오한이 그를 더 제게로 당겼다.

“사라지지 마, 화이람.”

“……”

“그러면, 나는 그대를 잡을 수가 없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럴 수도 없어, 시오한.”

이도하가 대답했다.

“당신, 이미 나를 붙잡았잖아.”

헤어지지 않을 약속. 반드시 지켜질 맹세. 맹약. 보란 듯 제 눈 밑을 슥 쓸며 이도하가 씩 웃었다. 마침내 시오한도 빙그레 그를 따라 웃음 지었다. 이도하는 제가 내도록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절 보며 웃는 얼굴이 이도하에게는 가장 익숙했다. 이도하가 그의 뺨을 부여잡고 뽀뽀했다. 쪽! 소리가 나자 시오한이 하하 웃었다.

“아, 지금 이게 이럴 때가 아닌데.”

몇 번 더 입술을 맞추며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그가 일으킨 옅은 바람이 피비린내는 몰아냈지만 그들 뒤에는 여전히 시체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건 좀 미친 짓 같았다. 이도하는 제가 이렇게 키스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 영화에 수시로 입을 맞추는 커플이 나오면 왜 저러냐고 질색을 했는데 제가 그럴 줄이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음.”

그러나 시오한은 그를 말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가 이도하의 입술을 핥았다.

“그대는 지금 많이 놀랐잖아.”

“놀랐지.”

고작 놀랐다는 표현을 쓰면 좀 맘이 상할 정도로 아주 경악을 했지. 제가 뭘 했었는지 기억이 잘 안날 정도로 눈이 뒤집혔었고… 시오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진정이 필요한 거야.”

“진정은 한 것 같은데….”

“아니야, 화이람.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대의 맹약자잖아.”

“…그거 괜찮네.”

맹약자. 계약주라는 단어보다 맘에 든다. 그래, 그게 더 적합하지. 부드럽게 파고드는 혀를 받아들이며 이도하가 낮게 신음했다. 정말 몸이 달았다. 미치겠다. 아무래도 부족했다. 이도하의 손이 시오한의 품을 파고들었다. 풍성한 옷자락이 이리저리 휘감긴다. 이제 보니 예의 그 화려한 정복인 모양이다. 이 망할 것… 어느새 미끄러져 목을 잘근거리는 입술에 고개를 꺾으며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황제가 수도사도 아니고, 이딴 걸 왜 몇 겹씩이나 겹쳐 입는단 말인가?

시오한이 그의 허리를 안아 당겼다. 배가 바짝 붙었다. 시오한이 목을 깨물었다. 읏- 이도하가 그의 허리를 쥐었다. 단단한 몸인데도 허리는 얇았다. 이도하는 허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들이 궁금했다. 이를테면 이 쓸데없는 옷가지가 치워진 어깨선이라던가, 허벅지라던가. 키도 크고 늘씬한 몸에 근육이 매끈하게 붙어 있었으니 몸 선도 진짜 장난 아닐 텐데…. 이도하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오한이 물고 빨던 목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가 깊게 웃었다. 화려한 눈매가 휘어지며 눈웃음 짓는다. 이도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물론 아무리 궁금하다고 해도 여기서 옷가지를 벗겨낼 수는 없다. 그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뭘 더 하면 그건 정말 미친 바퀴벌레 한 쌍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저렇게 웃음 지으니 갑자기 울분이 좀 치솟았다.

“이 요망한….”

이 비난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울분에 시오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한 웃음소리가 좁은 석벽 안에 울렸다. 끙, 신음한 이도하가 몸을 떼어내며 투덜거렸다.

“장담하는데, 당신은 황가에서 안 태어났어도 나라를 해 먹었을 거야.”

“나는 그대만 먹으면 되는데.”

“……”

어떻게 그런 말을. 방금 전까지 실컷 욕심가는 대로 행동했던 이도하가 뜨악해 그를 보았다. 몸 가는 건 쉬웠는데 귀로 들으니 전혀 달랐다. 시오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작정하고 눈웃음을 치니 경악스러울 정도로 어울렸다. 진짜 미친 거지. 무슨 황제가… 이도하가 괜히 가슴을 콩콩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요망해….”

“하하.”

돌아선 이도하는 순간 흠칫해 물러섰다. 불행하게도 잠깐 잊힌 시체가 피가 낭자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화이람. 시오한이 조금 걱정스럽게 그를 불렀다. 이도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놀랍게도,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피비린내가 역겹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다행이긴 하지만 찝찝하기도 하다. 계약자들은 오즈에서 살인을 해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한다더니.

“늙었네?”

이도하는 피 웅덩이에 얼굴을 박고 죽은 남자가 처음에 보았던 모습과는 아주 다른 것을 알아차렸다. 머리가 희고 인상이 미친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20대 쯤 되어보였는데 지금은 늙어 죽은 노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간혹 무리하게 소환을 밀어붙이다 이런 사고가 생겨. 마력과 더불어 본신의 생명까지 끌어다 쓰면 이렇게 돼. 흔한 부작용이야.”

“간혹?”

“매년 조금씩.”

“…몰랐네.”

“대개 이런 경우에는 환령… 그대의 세상에서는 특기자라 부르지. 환령을 실체화시킬 능력조차 못되니까. 그대의 세상에서는 알기가 힘들겠지.”

하기야, 다른 세상의 피해자 같은 건 그의 세상에서 별로 이슈가 아니기는 하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보았다.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시오한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이도하가 모른 척 말했다.

“날 소환한 것부터도 말이 안 되는데, 마력도 모자란 새끼였다고?”

“그자의 마력이 아니야.”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이번에 그대를 소환한 건 그자의 마력이 아니야. 내 것이지.”

“…씨발.”

이도하가 답지 않게 험악한 욕을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그건 희망과도 비슷했다. 시오한과의 맹약이 파기된 게 아니라면 소환이 되지 않았어야 하는데, 소환은 됐다.

계약을 맺지 않았으나 특기는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여야 했으니, 이도하는 차라리 그게 시오한의 마력이길 바랐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감히 다행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도하는 마른 손에 얼굴을 묻고 잠시 짜증을 추슬렀다.

“그럼 이 새끼는 왜 이 꼴이 됐을까.”

시오한이 칼끝으로 엎어진 남자를 뒤집었다. 썩은 고목 같은 몰골이 드러나자 이도하가 질색을 하며 조금 물러섰다. 남자의 손목에는 붉은 색으로 여덟 자리의 숫자가 박혀 있었다.

“사형수야. 폭행, 강간, 살인… 유아 살인까지 골고루 다 했군.”

번호가 죄목을 뜻하는 모양이다. 이도하는 속이 뒤집히는 혐오감을 느꼈다. 오즈가 아니었더라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는 엄청난 폐기물이었다. 시오한이 그의 등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어때, 화이람. 이런 사형수가 마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시오한이 온화하게 물었다.

“마력이 있기는 해?”

소환도 남의 것을 끌어다 쓴 새끼가 분에 넘치게 웬 마력.

“정확히는, 있었지. 상당한 수준으로. 지금은 다 흩어지고 없어.”

“죽으면서 없어졌다는 말이야?”

사람이 죽으면 마력이 흩어지기는 하지만 놀란 쥐 떼가 달아나듯 이렇게 순식간에 흩어져 버리지는 않는다.

“맞아.”

그럴 수가 있나. 이도하는 잠시 생각했다. 짧은 지식이 자유롭게 떠돌다 불쑥 가장 그럴듯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가 툭 내뱉었다.

“그럼 애당초 이 새끼 마력이 아닌 거겠지.”

게다가 계약이 먹고 살 길이 되는 건 이도하의 세상이나 오즈나 비슷했다. 계약자들이 대체로 상당한 부를 누리는 것처럼 계약주들 또한 이곳에서 굉장한 대우를 받는 편이다. 애초에 ‘상당한’ 수준의 마력이 있었더라면 이 사형수가 이런 썩은 고목 같은 몰골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도하는 남자의 행색을 기억했다. 낡은 실오라기처럼 하얗게 세어 있던 머리, 핏발이 선 눈, 피가 끈적하게 엉겨 있던 입가와 치아. 그때는 저도 눈이 뒤집어져 몰골이 역겹다, 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아무리 봐도… 꼭 녹아내리기 직전의 사람 같았다.

시오한이 눈을 휘며 웃었다. 똑똑하다, 하고 칭찬하는 것 같은 웃음이라 이도하는 민망해졌다. 말하고 나니 앞뒤가 좀 안 맞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마력이 그렇게 순식간에 흩어지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은 경우이긴 한데, 그 마력이 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말이 안 되기로 따지면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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