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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62화 (62/250)

62화

“시오한.”

이도하가 제 눈을 덮은 손을 쥐었다. 손끝이 떨렸다. 카가각! 석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 무언가 깨어졌다. 그 순간 이도하는 소환진이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용했다. 공기 중에 불꽃의 탄내가 조금 날 뿐이었다. 등 뒤에 닿은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아프도록 차가운 속으로 아주 따뜻한 물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도하는 뒤죽박죽으로 엉키고 날뛰던 제 감정도, 특기도 모두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정리되지 않고 날뛰던 숨을 모두 모아 내뱉듯 천천히, 깊은숨을 내쉬었다. 허공으로 옅게 퍼져 사라지는 숨소리가 모두 들린다.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제 눈을 덮은 시오한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부드럽게 그의 눈을 감싼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놔.”

시오한의 몸이 흔들리고, 콰직- 또다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도하가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나 시오한이 그대로 그를 당겼다. 부드럽게 그를 휘감는 팔에 이도하는 어느새 시오한을 마주보고 있었다. 빛이 모두 사라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옅은 눈동자가 어렴풋이 이도하를 마주보았다. 시오한이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미안해.”

“놔.”

“그러지 마.”

여전히 조용하다. 더 이상 이명은 없었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끌어올리던 특기가, 미동도 없다. 마력이 없었다. 오즈에서 특기를 행사할 때 필요한 계약주의 마력이 조금도 따라주지 않고 있었다. 이건 시오한의 마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가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만큼, 딱 그만큼의 마력 외에는 조금도 허락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도하의 계약주가.

시오한이.

이도하가 시오한의 멱살을 그러쥐고 당겼다. 긴 금발의 머리칼이 흘러 이도하에게 쏟아졌다. 코앞까지 다가온 눈동자가 저항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계약을 하려고 했어.”

이도하가 으르렁거렸다.

“내게 이름을 주려고 했어.”

어떻게 해서 이미 계약자인 이도하를 소환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해서 그에게 이름을 듣지 않고도 계약명을 주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도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분명 무슨 일인가 일어나려고 했다. 혹시라도 성립했더라면.

“나를-,”

어떻게든 절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끊임없이 흘러들어 오는 그의 감정 사이를 뚫고 온전히 분노를 쏟아냈다.

“당신에게서 나를 훔치려 했다고!”

시오한이 뒷목을 감싸 당겼다. 입가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이도하가 멈칫했다. 달래듯 부드러운 입술이 이도하의 입가를 따라 잔잔하게 지분댄다. 닿을 듯 말 듯 스치다, 이도하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시오한이 입술을 겹쳤다. 이도하가 입을 열었다. 코끝이 스치고,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집요하면서도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던 이전의 키스와는 전혀 달랐다. 뜨겁고 뭉근한 혀가 이도하의 혀를 노골적으로 감고 빨았다. 입천장을 쓸고 혀를 비비면서 그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처럼 아주 깊숙이 파고들었다. 젖은 입술 사이로 질척한 소리가 적나라했다.

이도하는 감은 시야조차 아찔할 정도로 숨이 막혔으나, 고개를 비틀어 시오한이 더 깊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얇은 허리를 당겨 안았다. 차가운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자 매끈한 타래들이 연약한 손가락 사이를 쓸고 지나가는 감각이 선연하다. 이도하가 옅게 신음했다.

잠시 멈칫한 시오한이 이도하의 입술을 핥으며 다시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서늘한 향에 이도하가 느리게 숨을 골랐다. 시오한의 어깨 너머, 이제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온통 금이 가고 어긋나 위태로운 석벽이 거뭇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도하가 빤히 그 석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귀 뒤 여린 살에 시오한이 느리게 입술을 누른다. 시오한이 속삭였다. 평온한 목소리였다.

“감히 아무도, 내게서 그대를 빼앗아 갈 수 없어, 화이람.”

“……”

설령 그게 세계라고 할지라도.

“그러니 그러지 말아.”

시오한의 어깨가 움직였다. 이도하가 기대지 않은 다른 쪽의 어깨였다.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날카로운 것의 끝이 묶인 듯 꼼짝도 하지 못하는 남자의 살을 가른다. 아무것도 그 전진을 막지 못했다. 저항은 무의미했다. 근육을 뚫고 뼈를 부수며 천천히,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나아간다. 허억- 이도하는 꺽꺽거리며 말려들어가는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검 끝에, 심장이 닿았다.

심장이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펄떡댄다. 그러나 검은 멈추지 않고, 연약한 그 살덩이를 파고 들어갔다. 두근- 두근- 꿰뚫린 것이 어떻게든 펄떡거리다, 힘을 잃어간다. 몸부림도 멈추었다. 검 끝, 긴 검신, 손아귀에 쥔 검의 손잡이, 팔의 근육, 어깨의 움직임을 통해 전해진 그 감각이 고스란히 이도하에게 닿았다.

이도하는 문득 신기루처럼 흔들리는 시야를 보았다. 그 남자가 보였다. 어둠 속, 새빨갛게 핏기로 뒤덮인 채 경악으로 치뜬 눈. 분노와 증오, 그 모든 걸 뒤덮은 공포로 얼룩진 눈. 좀 전과는 다르게 순식간에 늙어버린 듯 주름진 얼굴. 엄청나게 긴 검이 꿰뚫고 들어간 가슴. 마치 시오한의 시선 같다.

쉬-

시오한이 속삭였다. 신기루처럼 흔들리던 시야가 깜빡, 다시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더 선명해진 감각은 그대로 전해졌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잘게 떠는 심장을 그대로 통과해, 우드득- 뼈와 살을 가른 검 끝이 마침내 질긴 살갗을 찢고 반대편으로 뚫고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꿰뚫은 그 모든 길을 통과해 이제 살덩이가 된 몸을 벗어났다. 털썩- 이도하는 생명이 떠난 몸뚱이가 허물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도하가 움칠 몸을 떨었다. 아무것도 아닌 양, 너무도 쉽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괜찮아.”

시오한이 속삭였다.

축축하고 서늘한 지하의 냄새가 불쾌하게 묻어 나오는 석벽, 그 속에 스멀스멀 섞이는 피비린내, 닿은 몸을 통해 전해지던, 몸뚱어리에서 생명이 떠나가던 감각. 이명, 웃음, 석벽이 부딪치고 금이 가던 균열, 그 모든 소리가 얕은 물처럼 흔들리는 침묵. 어둠.

찰나에 이도하는 무언가 저를 향해 몰려든다고 느꼈다. 사람과 건물들로 빈틈없이 가득 찬 그 거대한 도시를 향해 소리 없이 몸을 부풀리고 다가오던 물결처럼.

“……”

이도하는 눈을 감았다. 시오한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맞닿고 배가 붙도록 그렇게 꽉 안았다. 시오한의 숨이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보고 싶었어, 화이람.”

이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득 떠올랐다. 거대하게 몰려들던 파도를 앞에 두고 숨이 막히던 통증이. 이도하를 제 어깨로 당겨 안았던 시오한이 몹시도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쓸었다.

“어떻게….”

“응.”

“아니야. 그냥 잠깐만….”

잠깐만 이러고 있자. 이도하는 뒷말은 삼켰다. 시오한은 되묻지 않고 조금 고개를 숙여 이도하의 어깨에 파묻었다. 목에 따뜻한 숨이 닿아 퍼졌다. 괜찮아. 살아있다. 여기 있다. 단단하고 따뜻한 몸, 서늘한 향, 그런 것들이 온몸으로 가득 와닿자 그제야 머리가 좀 개는 것 같았다. 이도하가 그대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단단한 석벽이 닿았다.

“시오한.”

“응, 화이람.”

이도하는 더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며 그 짐작대로라면 정말 굉장한 일일 테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이곳에 소환된 저 자체라던가. 그런데….

이도하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머리칼이 흔들렸다. 창문 하나 없는 실내에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그는 시오한의 어깨 너머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실타래 같은 바람 한 줄기가 엮였다가 흩어졌다.

계약자, 계약주. 그런 것들을 잊은 적은 없었다. 늘 소환돼서 한 것이라고는 놀고먹는 것뿐이었고, 급기야 얼마 전에는 고양이처럼 뒹굴기만 하겠다고 못까지 박았지만 시오한이 매번 그렇게 침대 신세를 지는 걸 보았으니 의식하지 않으려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계약자와 계약주. 이도하는 아주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더해, 제게 고개를 파묻은 시오한의 감정까지 정리되지 않은 그 기묘함 속으로 혼란하게 섞여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면 이도하는 어느 게 제 것이고 그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옅게 느껴지던 이전과는 달랐다. 그조차 주체할 수 없는 듯 여과 없이 고스란히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도하는 그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뭐지? 자조… 혐오?

이도하가 시오한을 밀었다. 저항 없이 그대로 밀려난 시오한이 등 뒤의 벽에 부딪힌다. 머리 위에서 불꽃이 팍 튀더니 화르륵 타올랐다. 계란보다도 작은 크기였으나 시오한의 얼굴을 비추기에는 충분했다. 시오한 오르페노스. 이리스티리움의 황제. 계약주.

“…어렵다, 진짜.”

이도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손을 뻗었다. 손끝이 시오한의 이마에 닿았다. 곧고 단정하게 뻗은 눈썹을 지나,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을 스친다. 시오한은 그대로 이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이 눈동자를 스치는데도 눈을 감지 않고서. 이도하가 그의 눈 밑을 매만졌다.

“왜?”

이도하가 묻고, 이도하가 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시오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도하의 손에 제 뺨을 기대고는 그가 옅게 웃었다. 몇 가닥의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길고 곧은 목과 유려한 턱선 사이로. 일견 연약해 보이나, 이도하는 아직 그의 손에 검이 들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이 괜찮다고 했잖아.”

평온하게, 아무렇지 않게 제게 말해놓고는 왜 이제 와서 당신은 그렇게 아픈 얼굴을 하고 있는지.

“한 번 더 말해 줘.”

불꽃이 일렁거리는 황금색 눈동자가 언제나처럼 따뜻한 빛을 띠고 있었다.

“괜찮아, 화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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