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61화 (61/250)

61화

눈앞의 이 남자는, 이도하의 소환주였다.

히죽- 남자가 웃었다. 입술과 입가에 피가 끈적하게 엉겨 있다.

“됐어. 하하하. 됐다고.”

“너 뭐야.”

“네 주인이 될 사람이지.”

이도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텅 빈 웃음소리가 석벽을 타고 울렸다. 이도하가 발밑을 내려 보았다. 이제 보니 한때는 하도 많이 봐서 눈만 감아도 떠오르던 그 소환진이 아니었다. 소환진에 쓰이는 글자들은 이제 해석도 잘 되지 않는 아주 오래된 고어라 어차피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없지만 생김새만 봐도 쓰인 게 다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더 복잡하고, 더 크다. 붉은 횃불이 그 위로 일렁거려 언뜻 붉은 기가 비춘다. 불쾌하다. 이도하가 눈을 들었다.

“시오한 어디 있어.”

“아, 황제 폐하.”

“그래, 내 주인.”

“뭐, 어디에 있겠지.”

“……”

이도하가 고개를 기울였다. 연신 히죽대며 남자가 이도하를 마주 응시한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이도하가 소환진 위로 발을 비볐다. 소환진의 빛이 그의 발아래 가려졌다, 나타났다 한다.

이성적으로는 사실 태연해야 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시오한은 대제국 이리스티리움의 황제이며, 제1기사이기도 했다.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을 리 없다. 계약주의 안위다. 생겼다고 해도 이도하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순간, 이도하는 응답하지 못한 소환진을 떠올렸다. 곧바로 또 소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웨이드.”

환하게 웃으며, 남자가 말했다. 반응한 소환진이 흔들렸다. 소환진 위로 한 겹의 소환진이 더 떠올랐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돌던 소환진 두 개가 철컥- 맞물렸다. 형태가 어지러운 획들이 얽혔다. 각각 하나로 보이던 두 개의 소환진이 겹쳐 또 다른 하나의 소환진을 그려냈다.

같은 순간, 사방의 석벽에서 새파란 빛을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소환진에 그려 넣는 고어들이 온 벽면에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명이 울린다. 빛이 점점 더 강해진다. 시야가 온통 파랗게 물들었다.

이도하는 깊은 바닷물에 잠긴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일렁이는 빛에 속이 울렁거렸다.

이 소환은 대체 뭐지?

단 한 명의 소환주, 단 한 명의 특기자. 단 한 번의 계약. 그게 섭리였다. 절대로 어긋날 수 없고 깨어질 수 없는 법칙. 이미 계약이 성립된 계약자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소환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의 계약이 파기된 게 아니라면.

그럴 리 없는데.

이도하가 무심코 제 눈 밑을 더듬었다. 매끈한 살갗이 손끝에 닿는다. 애초에 만져질 리 없는 것이었다.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었다. 맹약이다. ‘반드시 지켜질 약속.’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맹세.’

‘우르슬라의 계약주는-’

김윤혜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죽었잖아.’

제 목소리가 울렸다.

‘제국은 황실에 나 하나뿐이니, 기회를 노려볼 법 하지 않겠어.’

다람쥐의 굴 같던 따뜻한 집무실, 저를 보던 얼굴.

‘당신한테 무슨 일, 생길 일 없잖아.’

‘그러려면 그대가 늘 내 곁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화이람.]

한참을 기다렸다가 천천히 흩어져 사라진 소환진.

그럴 리 없어.

헉- 숨을 토해내며 이도하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네 이름은-”

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석벽에 부딪혀 울렸다. 이도하가 눈을 들었다. 우우우웅- 공기가 떨기 시작했다. 시야가 흔들리고 석벽이 덜거덕거린다. 떠오르듯 새파랗게 달아오르던 고어들이 흔들린다. 모래와 돌가루가 쏟아졌다. 새파랗게 섬광이 오른 눈동자가 남자에게 꽂혔다. 남자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컥- 피를 토해낸다. 콰직-! 견디지 못한 석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시오한, 어디 있어.”

처박힌 채로도 핏발이 선 눈동자를 새하얗게 치뜨고 남자가 이도하를 올려다본다.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웃는 모습은 매우 기괴했다. 희열. 남자는 희열에 차 있었다. 이도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심장이 조여들어 아프다. 거칠게 조각난 숨을 그는 간신히 뱉어냈다.

계약의 시작은 이름의 교환으로, 성립은 명명으로. 그 이전에 특기자들은 오즈에서 어떤 힘도 행사할 수 없다. 그것 또한 절대로 부수어질 수 없는 섭리다. 그리고 그는 지금 특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섭리가 깨졌다고 봐도 좋지 않나. 아니야. 이도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도하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특기가… 이중계약, 계약파기. 어느 거지? 어느 게 먼저지?

“팔…ㅋ…ㅔ….”

짓눌린 남자가 말했다. 콰직! 남자가 처박힌 석벽 바닥이 동그랗게 파여 들어갔다. 남자의 눈에 선 핏발이 터졌다. 코피가 흘러 바닥을 적셨다.

“개소리 하지 마. 시오한 어디 있어.”

“ㄹ…ㅗ….”

“시오한 어디 있냐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사방으로 부딪쳐 겹쳤다. 사방에 선 석벽, 깊은 바닷물처럼 일렁이는 소환진, 횃불- 붉고 푸르고 뜨겁고 차갑다. 이도하가 머리를 흔들었다. 시끄러워. 쿵쿵쿵- 귓가가 온통 울려 생각을 할 수가 없다.

“ㄴ…내 거…. 내 거야.”

이도하가 손가락을 움칠 떨었다. 신경의 작용에 불과한 것 같은 작은 움직임이었다. 커헉- 남자가 제 목을 틀어쥐었다. 남자는 압사당하고 있었다. 끈적하게 뭉쳐진 공기가 그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남자가 목을 비틀며 제 목을 긁었다. 손톱 아래에 피와 살갗이 벗겨 나왔다.

남자가 꺽꺽거리며 웃었다. 팔을 뻗는다. 손바닥이 붉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간신히 소환진에 닿은 순간, 날개가 펼쳐지듯 소환진이 붉은 빛으로 확 솟구쳤다. 날카로운 발톱에 찢어발겨져 깃털이 산산이 흩어지듯 푸른빛이 떨쳐졌다. 붉은 빛이 순식간에 사위를 잠식했다. 빛의 잔상이 핏방울처럼 번졌다. 어지럽게 얽힌 수십 갈래의 획 하나하나가 뱀의 머리처럼 이도하의 몸을 타고 기어오른다. 이도하는 멍하니 제 손 위를 타고 오르는 붉은 빛의 갈래를 보았다.

피.

붉은 마법진.

하- 이도하는 제 숨소리를 선명히 들었다. 쿵쿵쿵 시끄럽게 울리던 소리가 사라졌다.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남자를 보았다. 문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도하도 남자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피?

“하하….”

저건 생채기다. 제법 심하게 긁긴 했지만 그래봐야 겉가죽이나 조금 상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 그랬는지 손바닥을 벤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게 어디 동맥을 잘라낸 것과 비할까.

감히.

코를 찌르던 피비린내를 이도하는 아직도 기억했다. 처음으로 이도하는 그 날의 시오한을 떠올렸다.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하지 않아 그 이후로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으나, 돌이키니 이렇게 선명했다. 흥건하게 온 바닥을 뒤엎고도 기어가듯 번져가던 피바다. 그 위로 젖어 들어가던 금발.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 베어진 양 손목. 그렇게 모든 걸 버려 이미 죽은 사람인 양 핏기 없이 창백하던 얼굴. 그럼에도, 빙그레 웃고 있던 얼굴.

‘안녕.’

인사하던 목소리.

“네 까짓 게….”

그랬는데.

“팔…케…!”

남자가 꺽꺽거렸다. 콰직-! 이도하의 발밑이 부수어졌다. 부서진 돌 조각들이 떠올랐다. 붉게 일렁거리던 소환진이 흔들렸다.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뇌를 꿰뚫는 듯한 이명이 커졌다. 형형하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가 새하얗게 가라앉았다. 공간 전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죽여.

마치 낙인이 찍히는 것과 같았다.

죽여.

새빨갛게 떠오른 그 한 단어가 온통 이도하를 좀먹었다. 불안, 분노, 혐오, 증오 - 공포. 이 석벽처럼 축축하고 서늘하고, 차갑고 뜨거운 것들. 이도하가 제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격렬한 감정들이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으하하하하! 남자가 피를 토하며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린다. 석벽 위로 튕겨진 목소리가 온 사방에 가득 찼다. 실핏줄이 터진 눈동자가 온통 붉다. 이도하의 몸 위로 얽혀있던 붉은 소환진이 달아올랐다. 피부 위로 드러난 핏줄처럼 넘실거리던 것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맹렬하게 흔들리던 횃불이 잘게 찢어졌다. 수백 개의 조각으로 찢긴 불꽃들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졌다. 석벽을 붉게 달군 열기가 남자를 겨누었다. 끝이 새하얗게 물든다. 파르르 떤다. 당장이라도 쏘아져 나갈 것 같은 순간이었다. 찢어질 듯 웃던 남자가 소리쳤다.

“팔케로--”

“화이람.”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눈을 치뜬 남자는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만.”

이명이 뚝 그쳤다. 허공을 뜨겁게 달구고 있던 불꽃들이 그대로 흩어졌다. 빛이 사라졌다. 덜덜덜 떨리며 부서지고 조각나던 석벽도 멈추었다. 휘몰아치던 모든 게 멈추었다. 바스라져 떠오르던 석벽의 가루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도하도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던 특기가 베어낸 것처럼 멎었다. 따뜻한 것이 그의 눈을 덮었다. 단단한 가슴에 등이 닿았다.

“…시오한.”

그가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래. 나야, 화이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