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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60화 (60/250)

60화

이도하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지켜보지 않고 돌아섰다. 전혀 통쾌하지 않았다. 기분이 더 더럽기만 했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얼굴을 처박은 것처럼 구역질이 났고 난잡했다. 성큼성큼 걷던 이도하가 우뚝 멈춰 섰다.

“아… 시발.”

이도하가 근처에 있던 쓰러진 고목을 걷어찼다. 우지끈! 거대한 고목이 처참한 소리를 내며 짓이겨졌다. 그가 홱 돌아섰다. 케이시 윌리엄스가 서 있었다.

‘이건 서약이에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기가 닥쳤을 때, 좌시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어느 때든, 어떤 때든 있는 힘을 다해 돕겠다는 약속. 신중히 생각하세요, 의무를 강요하는게 아니니까.’

18살. 이드로의 서약서를 내밀며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가 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게 이드로가 하는 일이에요? 왜요? 이거야말로 정신 나간 영웅 심리 아닌가?”

“……”

케이시 윌리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도하도 곧 제가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괜한 사람 정도가 아니라, 사실 이드로의 단장인 케이시 윌리엄스는 이것보다도 더한 상황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이도하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침인데도 벌써부터 우유를 흘려놓은 것 같은 구름들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안온한 날이었다.

“저들이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케이시 윌리엄스가 말했다. 다부지고 유쾌한 얼굴이 피곤을 드러냈다. 손짓 하나로 중장비가 필요할 것들을 들어 올리고, 쳐다보는 것만으로 거대한 빌딩 하나를 모두 불태워버릴 것 같던 화마를 잠재우고, 수술실이나 복잡한 의료 기기 없이도 상처를 낫게 한다.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을 가능하게 한다. 있는 듯 없는 듯 세상에 스며들어 사람들은 특기에 익숙했지만, 때로는 이렇게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질감을 느끼는 때가.

“쉬워 보여서 그래요.”

그러니 기대기도, 부탁하기도 쉽다. 특기자에겐 별일 아닐 테니까.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 재난. 마땅하지 않은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 앞에서 경계는 늘 흐려지기 일쑤였다. 어디까지가 선의고, 어디까지가 의무이고 책임인가.

기준은 언제나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재난, 이도하는 몰랐지만 이드로는 활동 기준부터 갖가지 토론 대회의 단골 주제였다.

“그거 알아요? 처음에 이드로가 창설된 이유는 사실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으쌰- 이도하가 작살을 내놓은 고목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케이시 윌리엄스가 말했다.

“별별 일에 도와주겠다고 뛰어들었던 특기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지.”

“알겠네.”

이도하가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툭 내뱉었다.

“환멸 나요.”

“더 짜증 나는 게 뭔지 알아요?”

몸을 기울인 케이시 윌리엄스가 은근히 속삭였다.

“그럼 시발 그냥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 하고 가버릴 수가 없다는 게 제일 환멸 나요.”

“아, 시발. 하지 마요.”

듣기만 해도 인류애가 닳는 듯 이도하가 진절머리를 했다. 케이시 윌리엄스가 깔깔 웃었다. 그녀가 으아아아 신음하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어떡하겠어요. 같이 사는 세상인데. 그러려니, 해야지.”

“저 개소리를 듣고도요?”

눈을 동그랗게 뜬 케이시 윌리엄스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엄마야? 내가 무슨 빙다리 핫바지로 보여요? 나도 할 말은 해요?”

“빙….”

도대체 저건 영어로 어떻게 들리는 걸까. 케이시 윌리엄스는 제가 썼던 말을 듣고 그대로 쓴 걸까. 이도하는 케이시 윌리엄스가 주먹으로 툭 친 제 어깨를 살살 문질렀다. 주먹은 조그마한데 망치로 때린 것처럼 얼얼했다.

“절박한 사람들이잖아요. 이해는 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면 끝도 없어서 그렇지. 마음이 약해져서 정말 끝없이 희생하다 보면 아무도 감사하지 않게 돼요. 내 무덤을 내가 파고, 결국 끝에 남은 건 원망만 남은 나밖에 없어요. 그러니 적당히 욕먹고, 적당히 감사받고.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해야 하는 건 경계를 잘 구분하는 일이죠. 이드로를 이끌다 보면 가장 안타까운 착각이 뭔지 알아요?”

케이시 윌리엄스가 물었다. 이도하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의무는 자국에게 있으니까요. 우리가 아니라. 우리도 우리 삶은 살아야지.”

“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이도하가 심란하게 말했다. 케이시 윌리엄스가 물었다.

“후회해요?”

“…안 했으면 좋겠어요.”

“엿 제대로 먹이긴 했지만 사실 그냥 사람들 딱! 모아놓고 자- 보십시오, 하고 보여줘도 좋았을 텐데. 사람들이 최고예요! 고마워요! 우리 살았다! 하면서 기뻐하는 거 보면 다시 사랑이 뿜뿜! 차오르거든요.”

이도하는 한숨이나 내쉬었다. 이미 쓰나미를 막 막아냈을 때 비슷하게 한 번 겪어봤다. 사랑이 뿜뿜 차오른다기보다는 쥐구멍으로 좀 숨고 싶었고. 그래도 기분이 이상하기는 했었다. 생전 느껴본 적이 없어 이상하다는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던 기분이었다.

“자, 밥이나 먹으러 가요. 잠도 좀 자놓고.”

힘차게 일어난 케이시 윌리엄스가 말했다. 이도하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미리 위로하는데, 낮에 또 좀 힘들 거거든요. 담배 필요하면 말해요.”

“됐어요.”

이도하는 그냥 밥 먹고 잠이나 한숨 푹 자고 일어나고 싶었다.

“뭐 먹고 싶어요?”

“맛있는 거요.”

“아, 샌드위치가 정말 끔찍하긴 했지.”

이도하의 어깨를 두드려준 케이시 윌리엄스가 자리를 떴다. 혼자 남겨진 이도하는 잠시 넋을 놓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분명히 졸리고 배도 고픈데 아무것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득 이도하는 제가 발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냈다. 짬 나면 해야지, 해야지 하고 미루던 일이었다. 미처 신호가 한번 가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아들!!

“엄마.”

반가운 목소리에 이도하가 픽 웃었다. 예정에 없던 도강에 들어가는 바람에 이도하의 행방을 찾던 이드로에서 그의 어머니에게까지 전화를 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강의는 끝났는데 집에도 안 왔지, 멀리서는 당장 난리가 났다지, 그런데 그곳에 가야 한다지, 난리가 안 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어디 다친 곳은 없냐, 괜찮냐, 놀랐다, 한동안의 부산스러운 난리를 친 이후에야 이도하의 어머니는 차분함을 되찾았다.

“아, 엄마.”

-응?

“혹시 나 어릴 때 지진 같은 거 난 적 있어요?”

이도하가 물었다. 한나 브라운의 말이 아무리 생각해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좀 놀랐나보다, 하고 지나갔을 수도 있었을 제 반응이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가 않았다.

-지진?

“꼭 지진 아니더라도 뭐 큰 사고라던가.”

-글쎄. 음.

잠깐 생각한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너 두 살인가 세 살이었나, 한 번 우르릉, 한 적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너 슈퍼맨 놀이한다고 날다가 천장에 부딪혀서 병원 갔던 일 정도? 왜?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별로 알고 싶지 않은 흑역사였다. 게다가 두 살인가, 세 살인가 할 나이라면 우르릉, 하는 소리에 공룡이 울었나 보다! 할 나이 아닌가. 아예 아무 생각도 안 하거나. 트라우마가 될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이도하는 여러 번 더 제 부모님을 안심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뭐지, 도대체….”

트라우마가 아니었나.

이도하는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답답하니 그냥 한나 브라운을 찾아가 도대체 어디가 어느 면에서 그랬냐, 하고 물어볼까도 싶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그 미어캣 같은 여자가 심장마비라도 걸릴 것 같았다. 이도하도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재주는 없었다. 사회적 편견이라고 말이 많지만 이도하가 봐도 정신계열 특기자들은 원래 성격이 좀 극단적인 면이 있었다.

미친 듯이 냉소적이거나 미친 듯이 소심하거나. 한나 브라운은 오백 미터 밖에서 봐도 후자였다. 누구나 짐작할 만한 이유로 그들은 본인들의 특기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꺼려 하는 편이었다.

‘기억도 읽어요?’

‘아니요! 아니에요!’

기억. 기억… 이도하가 곰곰이 되뇌었다. 그러나 정말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건 없었다.

“아, 모르겠다.”

이도하가 머리를 헤집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해도 될 일 같은데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처럼 자국이 남아 찝찝하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당장은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의사를 찾아가 보든가 해야지. 이도하가 생각을 털어냈다.

어쨌든 날씨는 좋다.

이도하는 이번 일이 사람들 기억 속에 그저 ‘끔찍했지만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았던 일’ 정도로만 기억되길 바랐다. 아무래도 다 헛된 희망 같았지만. 이래서 18살 적의 저가 그렇게 엉엉 울었었나. 이도하가 실없이 생각했다.

아마 피할 수 없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시오한이 저를 소환했을 때 그렇게 거부하지 말 걸 그랬지. 조금 시끄러워지긴 했지만 되려 시오한과의 계약이 이도하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밥 먹자, 안아줘, 놀러 가자, 걷자.

그래. 시오한과의 시간이 오히려 그가 바랐던 일상에 가까웠다.

하- 형체 없는 한숨이 옅게 퍼졌다. 이도하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온종일 사람들에게 밟히고 쓸려 풀이 다 카펫처럼 납작 눌려 있었다. 이도하는 슬슬 발을 쓸어 누운 풀을 살려보았다. 그뿐이었다. 타이밍 좋게 무슨 일인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가 쓰게 웃었다. 도하- 멀리서 부르는 소리에 그가 일어났다. 기껏 세워놓은 풀들이 다시 힘없이 늘어졌다.

점심은 아주 맛이 좋았다. 다행히 지진으로부터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어느 유명 햄버거 가게에서 공수해 온 버거는 이도하의 얼굴만 했으며 기름과 치즈가 줄줄 흘렀다. 도저히 한입에 다 넣을 수 없을 만큼 속이 꽉꽉 채워져 있어 하나를 다 먹고 나니 배가 불러서 토할 것 같았다. 그렇게 부른 배로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 이도하는 그냥 바로 구조 활동에 뛰어들었다. 차라리 빨리 해치워버리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몹시 후회했다.

“절대 안 돼, 지금 그게 말이 돼요?”

“이 미친 새끼야! 내 딸이 밑에 깔려 있다고!”

“누가 뭐래?! 보니까 지금 당장 죽게 생긴 것도 아니구만 잠깐만 기다리면 될 거 아니야! 당신 딸만 목숨이야?! 이것도 나한테 목숨 같은 건물이야!!”

“이것 보세요.”

“아, 안 돼! 절대 안 돼! 할 거면 나 죽이던가, 어? 아줌마! 나 죽이고 당신 딸 살리든가! 그럼 되겠네!”

토할 것 같다. 맛이 좋았던 햄버거가 하나도 소화되지 않는다.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속이 불편했다. 이도하가 머리를 짚었다. 아, 열이 좀 나는 것 같은데. 옆에 선 하야시 유이토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지금 제 눈앞에서 일어지는 일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도하는 자라나는 새싹에게 이따위 광경을 보여주는 일에 죄책감마저 느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하면 이건 정말 별 것 아닌 수준이라는 게 절망적이다.

“내 딸!! 내 딸 빨리 구해내란 말이야!!”

“건물에 금이라도 가기만 해요- 바로 소송이야. 알아? 당신 인소더블이라며? 바다도 가르면서 이까짓 일도 못해? 뭐 건물을 통과하게 하거나, 그렇게 해서 빼내면 될 거 아니야!”

“아, 아니-”

이것 봐라. 이도하는 처참한 광경에 한숨을 내쉬며, 어이가 없어 한마디 하려는 하야시 유이토를 막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한다. 이건 그냥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야시 유이토가 이도 저도 못하고 당황해하고 있을 때 겉보기엔 꽤 멀쩡해 보이는 건물로부터 조그만 생쥐가 쪼르륵 달려 나왔다. 건물 주인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던 여인이 꺄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라 흠칫했다. 심지어 생쥐도 놀라 찍! 하고 울부짖었다.

“이 쥐새끼는 뭐야!!!”

“이 애가 아이 상황을 전해주고 있는 건데요….”

겁먹은 생쥐를 안아 들며 하야시 유이토가 말했다. 엄청난 기세에 무슨 말을 해도 잘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무척 소심한 목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에 호통이 날아왔다.

“미쳤어요?! 우리 애는 쥐를 무서워한단 말이야!!”

“……”

귀를 막고 싶다. 이도하는 영어 듣기 실력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한나 브라운이 그 경이로운 전이 능력으로 케이시 윌리엄스의 특기를 매개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을 텐데. 왓, 쏘리? 이따위 소리나 하며 그냥 밀쳐내고 알아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소송이 뒤따라왔겠지. 소송이 무섭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몹시 더럽기는 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게 이렇게 옥신각신 할 일도 아니라는 게 가장 괴롭다.

9층 건물의 지하에 6살짜리 아이가 깔려 있었다. 건물은 입구와 지하가 조금 붕괴한 정도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9층 건물이 그런 식으로 붕괴할 수 있었는지 기이한 현상은 차치하고, 그리고 어떻게 해서 6살 아이 혼자만 장난감 매장이라는 지하에 깔렸는지 그것마저도 차치하고서, 아이의 엄마와 건물 주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태였다.

기둥과 파이프, 철근 사이에 교묘하게 낀 아이는-생쥐가 전해 준 바로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나 상처는 없었다. 그래도 6살 아이였고, 공포에 질려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구해내는 게 시급했다. 그러나 건물 주인이 건물에 지금 이상 한 톨이라도 흠집이 나면 무조건 소송을 걸겠다고 달려든 결과가 이 개판이 된 것이다.

정 그러면 그쪽 말마따나 건물을 통과할 수 있는 특기자를 불러다 줄 테니 기다리라고 하면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당장 꺼내라고 아이의 엄마가 난리, 그러면 지금 지하를 모조리 부수고 아이를 꺼내겠다고 하면 건물 주인이 난리를 치는 끔찍한 개판이었다.

“비켜요.”

이도하가 팔을 대자로 뻗고 막아선 건물 주인을 밀쳐냈다. 소송 걸려면 걸라지. 사람 살려놓고 폭행으로 소송 하나, 손해배상으로 또 소송 하나, 아주 완벽하다. 기분은 지금도 충분히 더러우니 최대한 이 토할 것 같은 상황을 벗어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저는 사람만 구해내면 되고, 이건 이드로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그렇게 해서 구조 활동에 뛰어든 지 반나절 만에 이도하는 총 34명의 사람을 구해내고, 잠재적 소송을 5번 걸리고, 정강이를 한 번 까이게 되었다.

이도하가 지켜본 바, 재난 구조 현장이라는 것은 그 어떤 인간 드라마도 비할 수 없는 오욕칠정의 참 집합체 같았다. 상상할 수 있는 일과 상상할 수 없는 다채로운 일들이 다 일어났다. 대체로 감동적인 일 틈틈이 보기만 해도 제가 다 수치스러운 일, 눈물이 찔끔 난 가슴 아픈 일과 인류애가 다 흩어질 것 같이 가증스럽고 역겨운 일들이 하루 만에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다 지나갔다.

이도하는 이제 인생을 2회 차쯤 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환경 자체가 사람을 백 번쯤 치댄 빨랫감으로 만드는 감정의 블랙홀이었다. 이도하는 정말 미친 듯이 지치고 피곤했다.

“안녕하세요, 이 씨!”

“……”

이도하는 불쑥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마이크에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죽이면 안 되지. 그건 돈지랄로도 해결 못한다. 그건 정말 큰일 난다. 눈앞에서 플래시를 터트리고 관심을 끌어보겠다고 물총을 쏘아대는 미튜버에 비하면 이건 천사다. 세 번쯤 되뇌었을 때에는 벌써 멘트를 주르륵 쳤는지 기자가 눈을 빛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모르겠다, 지금 어떠세요, 그 정도 물어봤겠지. 보통 다 그랬다. 어떻기는, 아무 생각 안 나고 존나 피곤해요. 이도하의 진심은 그랬다.

“그냥 다들 빨리 집에 갔으면 좋겠어요.”

화 낼 정성도 없는 이도하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을 때였다.

“도하!”

다급한 목소리가 외쳤다. 엄청난 현장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기자가 열심히 오디오를 채우며 물러났다. 반나절 동안에 어지간히 급한 일은 다 정리된 줄 알았는데, 또 어디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어느 멕시칸 식당의 주방에서 지뢰가 튀어나왔다고 해도 이제 놀라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발밑이 쿠르릉, 운다. 땅이 흔들렸다. 여진이었다. 강한 지진은 아니었으나 이미 한 번 크게 데인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이도하의 발밑으로 소환진이 쫙 펼쳐졌다. 푸른색의 거대한 소환진이었다. 놀란 이도하가 흠칫 굳었다. 도하! 또 다시 외쳤다. 이도하는 울컥 화가 치솟아 올랐다.

그는 잠시 이도저도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었다. 쿠르릉- 다시 한 번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이번에는 지진이 아니었다. 꽤 먼 거리에서도 보인다. 거대한 빌딩 아래로 먼지가 확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진으로, 빌딩이 붕괴하려고 하는 것이다. 공교롭다고 할 만한 우연이었으나, 사실 여태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으니 그렇게까지 우연도 아니었다. 그저 제가 처해 있는 상황이 나쁜 것뿐이다.

이도하가 한 발 내딛으려는 때였다. 그는 문득 멈추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도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푸른색 소환진.

“...”

계약이 성립된 이후의 소환진은 약식으로 조그맣고 간단한 모양을 하고 있다. 첫 소환처럼 복잡하고 커다랗지 않았다. 그게 정상이었다. 근데 갑자기 왜? 그리고 이도하는 깨달았다.

화이람. 늘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가 없었다.

호명이 없다.

도하!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멀게 들린다.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경찰들이 다급하게 몇몇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도하는 눈을 감았다.

스위치를 내린 듯 복잡한 소리들이 사라졌다. 짠 내도 사라졌다. 눈을 감고 있지만 주변의 빛이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늘하고 축축한 돌 냄새가 났다. 공기가 차고 뜨거웠다. 이도하가 눈을 떴다. 아주 오래된 것 같은 석벽이 눈앞에 있었다. 등 뒤에서 위태롭게 어른거리는 불빛에 제 그림자가 흔들린다.

“……”

이도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타오르는 횃불이 망막을 어지럽혔다. 열기가 확 끼쳤다. 그 아래 엎드린 실루엣에 이도하는 불쾌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도하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푸른빛의 소환진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사라지지 않고.

“…뭐야.”

머리 위에서 싸늘한 냉기가 쏟아져 그에게서 산뜻하고 따뜻한 것들은 몽땅 쓸어갔다. 실루엣이 고개를 들었다. 횃불이 그 위로 사나운 열기와 빛을 쏟아냈다. 담요를 뒤집어 쓴 것 같은 행색 아래 모습이 드러났다.

엉망으로 엉켜 흐트러진 새하얀 더벅머리. 핏발이 선 눈, 붉은 횃불이 일렁이는 갈색 눈동자. 창백한 얼굴이, 새하얗게 웃고 있다. 이도하가 숨을 멈추었다. 척추에 창이 찍힌 것 같은 섬뜩함이 그를 관통했다.

호명 없는 소환.

이건 소환이다.

눈앞의 이 남자는, 소환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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