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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59화 (59/250)

59화

이도하가 횡으로 갈라버린 바다를 세계의 머리 위에 띄워 육지를 샌드위치 꼴로 만들어버린 지 만 하루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진짜 말 더럽게 많네요.’

‘놔둬요. 한참 떠들고 지쳐야 입 다물어요. 이미 피곤한데 괜한 힘 뺄 필요 없잖아요, 아깝게.’

“이 씨!”

아 정말. 이도하는 이 구수한 호칭이 정말 싫었다. 가뜩이나 위화감이 드는데 다 큰 어른들이 묘하게 떼쓰는 것처럼 들려 더 그랬다. 그러나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명이 되자 일일이 지적하며 고쳐주는 것도 일이었다. 자동 번역의 폐해는 특기조차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왜요.”

“나누죠. 한 번에 말고, 차근차근 조금씩 나눠서. 지금으로서는 그 대안밖에 떠오르질 않아요.”

“……”

이도하가 깊게 심호흡했다. 비슷한 레퍼토리의 대화를 이미 두 번쯤 반복했다. 박박 긁어모아도 남은 인내심이 얼마 없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빌딩들을 어떻게 하고, 이건 이렇게 하고… 그들은 이미 알아서 이도하가 해야 할 일들을 차곡차곡 정한 뒤였다. 특기야 두말할 것도 없지만 구조 공학 따위에는 문외한인 이도하의 의견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는 태도였다.

그러니 처음에 몇 마디 했던 이도하는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뚱하니 앉아있게 되었다. 바다를 띄워 놓는 게 아니라 솟구치는 짜증과 분노를 참는 게 더 일이었다.

개개인은 재능 기부나 자원봉사자들처럼 일하지만 이드로는 분명 기구라는 이름을 가진 국제단체다. 이드로에는 구조단의 단원들 외에도 재난 구조 활동을 지원하고 예기치 못한 소송, 혹은 단원들이 사고를 쳤을 때 일을 수습하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 이도하를 앉혀놓고 서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며 간접적으로 그에게 ‘너 지금 사고 쳤다’ 하고 윽박을 지르고 엄포를 놓아대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보세요, 박사님들.”

윽박지르고 엄포를 놓으면 놓을수록 성질이 더 더러워지는 반골 이도하는 한껏 내리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건 일단 차치하고서, 그들의 걱정을 이해는 한다. 내려놓는 게 확실히 좀 더 까다롭긴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하고 차분히 설득하는 건 이미 두 번이나 했다. 이도하는 정말 이해했다.

뭘 모를 때나 태평할 수 있지, 원래 사람이 알면 알수록 걱정이 많아지는 법이다. 그러나 질량이 어쩌니 반작용이 어쩌니 뭐니 소리를 해대도 저가 어디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이도하 제 자신이었다.

태평양을 쪼개서 내려놓으면 시간은 좀 들어도 힘도 아끼고 안전하고 어쩌고저쩌고!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제법 합리적이겠으나 이도하가 듣기에는 완전히 시간 낭비였다. 언제 또 부를지도 모르는데. 소환을 두 번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무슨 빙다리 핫바지로 보여요?”

“……”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세가 아주 험악한 욕쯤으로 들린 건 분명했다. 그들 머리 위에 바다를 올려놓은 사람이 화를 내자, 이드로의 박사들은 조금 당황했다. 내 말은-, 이도하가 깊이 심호흡했다. 이 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내가 무슨 도구 같은 걸로 보이냐고요. 이래라 하면, 이렇게. 저래라, 하면 저렇게 하는 뭐 그런 걸로 보여요? 내 말은 말 같지도 않습니까? 왜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지?”

“그런 게 아니라-”

“올린 사람도 나고, 내려놓을 사람도 나예요. 난 이미 한 번에 한다고 했어요. 자꾸 똑같은 말 하게 하지 마요, 진짜 짜증 나니까.”

“이 씨.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미 여러 번 경고했지 않습니까. 무모하게 힘자랑 같은 걸 할 때가 아니에요. 도전 같은 걸 할 일이 아니라고요. 아주 조금의 가능성도 무시해서는 안 돼요. 수백 수천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잖아요!”

“힘…!”

눈을 감고 지그시 제 머리를 내리누른 이도하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너무 열 받으니 머리끝이 뜨끈뜨끈한 것 같다. 참아라, 이도하. 최근 들어 유독 특기가 튄 일이 많았던 이도하는 거의 수양하는 마음으로 성질을 눌렀다. 그가 그렇게 꾹 눌러 참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껏 탄력을 받은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러게 애초에 이게 뭡니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었어요? 그냥 막으면 됐지 이 요란한 쇼를 벌이니까 일이 이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죠!”

잠자코 있던 케이시 윌리엄스도 이 말에는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그냥 막으면 됐지? 그녀가 살벌하게 말했다.

“그렇게 쉬우면 당신이 하지 그랬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나는 말을 하는데 당신은 뚫린 입이라고 쓰레기를 뱉잖아요. 뭐요, 쇼?”

“괜한 말꼬리 잡지 마요. 이게 지금 얼마나 큰일인지 감이 안 오는 모양인데-”

“감이 안 오는 건 당신이겠죠. 당장 미국과 멕시코의 서부 해안선 전체가 모래성처럼 쓸려갈 뻔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건 나와 도하니까!”

“지금 누굴 비겁한 사람 취급하는 겁니까?! 나는 더 이성적인 판단을 했어야 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헛되었다고 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솔직히 이게 괜한 영웅 심리의 결과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재난을 피하자고 재앙을 부르게 생겼잖아요! 자연재해가 인재가 될 거라고요! 조금이라도 피해가 생겼다가는 그 비난을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까?!“

“이-”

이도하가 케이시 윌리엄스의 어깨를 짚었다. 분명 굉장한 험한 말을 하기 직전이었던 케이시 윌리엄스가 씩씩거리며 홱 돌아보았다. 이도하가 말했다.

“그래요. 내가 괜한 허세를 부렸나 보네. 이성적이지 못했나 봐요.”

“……”

“어디 한 번 설명 좀 해 줘 봐요.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나는 당신이 한 일을 낮잡으려는 게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요.”

“누가 뭐랍니까? 알려달라니까?”

사뭇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떻게 하다 보니 언성을 높이고 삿대질까지 해 가며 바락바락 싸우는 모양이 되긴 했지만 그 자리의 누구도 그걸 곧이곧대로 들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얼음물을 들이부은 듯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마치 억울하고 부당한 취급을 받은 사람처럼 보여서 이도하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더 훌륭하고 이성적인 방법이 있을 테니까, 다음부턴 당신이 직접 해요.”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도하는 친절하게 다시 말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부턴 당신이 직접 하라고요. 영웅 심리에 취해서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나 하고 뒷감당도 안 되는 쇼 하는 나한테 맡기지 말고. 괜히 어설프게 재난을 막으려다 재앙을 만들면 큰일이잖습니까?”

“이게 무슨 억지입니까? 어깃장이 아니고 뭐예요, 이게?”

“아니, 자꾸 나는 안 된다며? 나는 못한다면서요? 그럼 안 하겠다고. 간단하잖아요. 근데 그게 어깃장입니까?”

“책임을 져야죠!”

“책임?”

“그래요, 책임! 이건 당신 책임이자 의무라고요! 그만한 특기를 가지고 태어났으면-”

빠드득, 이를 간 이도하가 와락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어어어- 다방면의 전문가들은 분분히 일어났다. 끼릭-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불쾌하게 신경을 긁었다. 그러나 섣불리 이도하를 말리려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라도 도망갈 준비가 된 것처럼 엉거주춤 엉덩이를 빼는가 하면 핸드폰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쥐고 긴장하여 몸을 경직시켰다.

“책임? 말 잘했네. 내가 줄곧 말했잖아요. 당신들 말마따나 영웅 심리에 취했든 뭐든 내가 올려놓았으니 내가 내려놓는다고. 망할 책임 내가 지겠다고. 거기까지요, 딱 거기까지. 그게 내 책임이죠.”

“이, 이런 무모함이 위험하다고 하는 거예요. 더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사람들을 위해 쓰는 시간이 아깝습니까?”

뭐가 아까워? 진짜 말하는 꼬라지…. 이도하는 남자를 던져버리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했다.

“아까웠으면 내가 여기까지 와서 잠도 못 자고 이러고 있겠습니까? 당신한테나 무모함이겠지.”

“그래요!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아무리 봐도 무모함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당신한테는 아무 일도 아닐지 몰라도 일반인들에게는 다가오는 느낌 자체가 다르다고요! 그걸 무시해서는 안 돼요!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어차피 당신한테는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남자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아, 아니 퀸테 박사, 말이 너무-”

슬슬 일이 정말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는지 누군가 주춤거리며 그를 말렸다. 그러나 이미 얼굴까지 붉게 달아오른 남자, 퀸테 박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고, 더 안전한 길을 찾고, 궁리하고, 그게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법칙이나 과학 따위는 전부 무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태어난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말다툼 정도로나 보일지 몰라도!”

“그래서, 이건 내가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난 힘일 뿐 쥐뿔도 모르니까 나는 닥치고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이를 꽉 문 이도하가 짓씹듯 물었다. 온갖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그 분위기를 제가 모를 줄 알았나. 은근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열띠게 목소리를 높이며 이따금씩 이도하를 흘긋거렸다. 주눅이 든 이도하를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들이 그렇게 나이를 먹고 주름이 지도록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것들을 쥐고 이도하를 누르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내가 당연하지?”

이도하가 서슬 퍼렇게 물었다. 눈에 안광이 돌았다. 섬광이 돌 것처럼 기이한 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하자 남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뻔하지. 그게 당신들 생각 아니야. 저 새끼는 운이 존나게 좋아서 쩌는 힘을 가졌으니 당신네들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해야지. 희생하고 감내해야지. 어차피 인소더블인데 좀 도와주는 게 뭐 힘든 일이라고. 뭘 잃는 것도 아닐 텐데.”

내 평범한 하루쯤이야 당신들이 생각하기에는 겨우 ‘그것 따위’일 테니까. 당신네들에게는 희생으로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

“도하. 진정-”

“그럼 달리 당신이 그만한 힘을 가진 이유가 뭐 때문이게요!”

케이시 윌리엄스가 이도하의 어깨를 짚었다. 남자가 아득바득 외쳤다.

“‘많이 받은 종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이고, 많은 일을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원하신다’. 그 힘이 당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기적인 거예요! 당신 부모님이 당신을 그렇게 키워서는-”

“퀸테! 닥쳐요!”

케이시 윌리엄스가 외쳤다. 동시에 한국어로 들리던 말이 원래의 이탈리아어로 그대로 들려 그다음 말을 더 들을 수 없었다. 재빠른 판단이었고, 다행한 일이었다. 이도하는 정말 제가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이미 천막 밖으로 멀리 끌려 나와 있었다. 케이시 윌리엄스가 그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물 냄새가 잔뜩 나는 습기 찬 공기가 득달같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숨을 몰아쉬며 이도하는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8시. 날이 개었는지 햇볕이 투과되어 바다는 좀 더 투명하게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보였다. 아까 전에는 고래가 지나갔다며 사람들이 우르르 소리를 지르는 것도 들었는데, 그건 못 봤다.

여기야말로 다른 세상 같다. 이도하는 생각했다. 그가 꽉 주먹을 쥐었다.

이상함을 느낌 케이시가 그를 부르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이도하의 눈이 파란 섬광으로 달아올랐다. 우우우웅- 지구가 신음하는 것 같은 엄청난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제각각 일에 몰두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삽시간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도시 전체를 물그림자로 덮고 얕게 퍼져 있던 바다가, 다시 제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천천히 물러나고 있었다. 파도가 치는 것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기이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햇볕이 비추기 시작했다. 화창한 아침 하늘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꾸덕한 습기에 이파리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나무들이 눈부신 초록으로 빛난다.

바다의 영역으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간 또 다른 바다는 이제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박사들이 말했던 대로 가늠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톤의 물이었으니 그에 마땅한 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할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바람도 불지 않았고, 소리도 없었다. 사람들이 미처 일어나는 일을 완전히 파악하기도 전에 떠올라 있던 바다는 이미 원래의 바다와 합쳐져 언제 그랬냐는 듯 짙은 푸른색으로 잔잔하게 반짝거렸다.

도시를 향해 달려들었던 일 같은 건 처음부터 꿈이었던 양 평화로웠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대기를 뒤흔든 이명에 놀라 천막을 뛰쳐나왔던 박사들이 아연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올로 퀸테와 눈이 마주친 이도하가 말했다.

“나는 당신을 납득시킬 필요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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