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케이시 윌리엄스는 이드로의 단장답게 빠르고 정확하게 구조 활동을 진두지휘했다. 샌디에이고 먼바다에서 한 번, 그리고 내륙에서 한 번, 다시 가까운 앞바다에서 불과 1분 남짓한 차이로 연이어 터진 지진은 모두 규모가 너무 컸다.
그 탓에 미국의 서부 해안선 전체는 물론 멕시코와 캐나다, 먼 러시아까지 쓰나미의 예상 범위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태평양을 접한 모든 나라에 어째서 바다가 두둥실 떠올랐는지 설명해야 했다. 전화와 전이 계열의 특기까지 모두 활용해 거의 전 세계와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구조 활동을 지휘하는 케이시 윌리엄스는 몸이 열두 개라도 모자라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되도록이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신신당부를 받은 이도하는 커다란 담요를 두른 채 기꺼이 그렇게 얌전히 앉아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임시 천막이 세워지기 시작하는 공원의 한쪽으로 피해 나무 밑에서 멍하니 턱을 괴고 있었다.
원래도 먹구름으로 흐릿했지만 거기에 바다까지 해를 가리는 바람에 사방에 밤처럼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바다에 반사된 가로등 빛이 별처럼 흔들거렸다. 수많은 헬리콥터들이 그 아래를 바쁘게 날아다녔다. 구조 헬기도 있었고, 방송 헬기도 있었다.
이도하의 옆으로는 조그만 쥐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줄을 선 쥐들은 지나는 사람들이 질색을 하건 귀여워하건 얌전하게 차례를 기다리다가 그 끝에 선 교복 차림의 어떤 남자애에게 가 뒷발을 들고 열심히 찍찍거렸다. 이드로가 가입을 권유하는 최소 나이가 18살이니 아마 저 애도 18살일 것이다.
허리를 숙인 그 애가 주의 깊게 쥐가 찍찍거리는 걸 듣고 나면 옆에 있는 스펜서 데이튼이 허공을 북 찢어냈다. 찢어낸 허공은 여지없이 어딘가에 매몰되거나 갇힌 사람들을 비추었다. 게시판처럼 그렇게 뜯어놓은 허공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그 주위는 온통 땜질을 해 놓은 것 같았다. 이따금 갈매기들이 날아와 교복 차림 남자애의 어깨에 앉아 뭔가 속삭이기도 했다.
찰칵. 생쥐들은 저렇게 얌전하고 귀여운데, 정작 이 익숙한 셔터 소리가 이도하의 신경줄과 인내심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온 도시가 무너지는 지진을 때려 맞았지, 쓰나미를 피해 도망치는데 바다가 떠오르질 않나, 혼이 다 빠져 누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이제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진짜 저래야 하나. 저도 핸드폰 없이는 못 살고, 바다가 하늘의 자리를 차지한 게 아마 죽기 전에 다시는 못 볼 풍경이기는 하다. 그러면 바다나 많이 찍어놓지, 저는 왜?
“저… 이 씨.”
이 씨? 와지직 표정을 구긴 이도하가 돌아보았다. 실타래처럼 흩날리던 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꽉 묶은 여자였다. 아마 여자는 이도하를 미스터쯤으로 부른 게 분명했다. 마땅한 한국어 번역이 ‘-씨’이다 보니 끔찍하게 구수했다.
“그냥 리라고 불러요.”
“아, 예. 한나 브라운이에요.”
참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이도하는 생각했다. 그게 끝이었다. 이도하가 멀뚱히 저를 올려다보자 한나 브라운이 어깨를 움츠렸다. 숨거나 도망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까도 그랬지만 그녀는 이도하를 좀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원래 엄청나게 소심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예민한 사람이거나.
“케이시가… 좀 쉬라고 해서요. 그래서 잠깐….”
한나 브라운이 어색하게 말했다. 케이시가 윌리엄스가 바로 곁에 있지 않는데도 이렇게 말이 통하는 건 그녀가 전이 계열 특기자이기 때문일 테였다. 좀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한나 브라운의 눈동자가 이도하의 인중과 쇄골 사이를 방황했다.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이도하가 물었다. 좀 무섭긴 한데 그래도 대화의 물꼬라도 터 분위기를 만들어보려고 했던 한나 브라운은 이 우회 없는 직구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조심스레 이도하를 살폈다.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요.”
“……”
한나 브라운이 주뼛거렸다. 이도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좀 민망했다. 다행히 그런 이도하를 두고 한나 브라운이 말을 이었다.
“어렸을 적에… 내가 살던 곳에도 이렇게 쓰나미가 온 적이 있거든요. 나는 특기로 남들보다 좀 더 먼저 알았는데… 마음이 급해서 우리 가족밖에 못 구했어요. 더 살릴 수 있었는데….”
“…그쪽 잘못은 아닐 텐데요.”
이도하가 말했다. 위로하려는 건 아니었다. 난데없는 사연털이에 갑자기 친밀감을 느낄 만큼 이도하는 성격이 부드럽지 않았다. 그냥 이도하가 생각하기에는 사실이 그랬다. 제 탓이 아닌 이유로 일어난 일에 이런 식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건 정말 불필요하고… 쓸데없었다. 외면했다면 모를까.
“어… 고마워요.”
듣기에 퍽 다정한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시큰둥한 낯을 하고 있으니 한나 브라운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심지어 이도하는 심지어 기분이 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매끄럽게 잘생긴 눈썹이 영 좋지 않은 각도를 그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슬슬 좀 불편해지고 있었다. 이런 식의 감사 인사가 물론 불쾌할 리는 없지만 사실 썩 달갑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서 한 것뿐이고, 그렇게 생각해서 말한 것뿐이다. 누군가 짐작하듯 생각해주는 마음이나 호의가 듬뿍 담겨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나 브라운이 재차 말했다.
“…네. 그냥, 고마워요. 나는 단지, 이 일이… 리에게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을 살린 거니까. 아주 옛날이지만 나도 그때 일이 쭉 트라우마였었거든요. 몰랐는데, 은근히 남아 있더라고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그래서… 많이 무서웠어요. 리가 아니었다면-”
“무슨 소리예요?”
“예?”
“나도?”
“…?”
잠시 생각한 한나 브라운이 의아하게 물었다.
“트라우마… 있지 않아요?”
“없는데.”
정말로 없어서 고민도 없이 대답했는데,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봐도 없었다. 재난이라고 하면 이도하는 창문에 테이프나 붙여봤다. 건물이 무너지고 빌딩만 한 파도가 몰려오는 상황은 머리털이 나고 처음이었다. 지진은 체험으로라도 겪어본 적 없었고 폭발이나 붕괴 따위는 더더욱 겪어본 적 없다. 트라우마 같은 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설마… 이도하는 불현듯 좀 전의 일이 떠올랐다. 숨이 막히고, 시야가 제멋대로 이지러졌던 일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무릎이 꺾이고,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확실히 뭔가 사연이 있다고 오해할 만한 반응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 한나 브라운은 옆에 없었을 텐데?
“기억도 읽어요?”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음. 진짜 아니에요. 좀 다른데, 설명하기가… 어, 아닌가 봐요. 내가 착각했나 봐요!”
추궁한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한나 브라운은 발이라도 밟힌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달팽이처럼 오그라든 그녀는 횡설수설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 비슷한 것을 늘어놓더니 이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동정심이 별로 없는 이도하도 좀 안쓰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도와주는 것 같아 그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 아무튼 정말 고마워요. 난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어요!”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한 한나 브라운은 의문만 남은 이도하를 남겨놓고 급기야 후다닥 도망을 쳐버렸다. 이도하는 어처구니가 없어 공원을 가로질러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쫓아가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세상에 참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이 여자처럼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트라우마?
나무에 등을 기대며 이도하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세 번 생각해도 정말 그런 일은 없었다. 애초에 트라우마가 될 만큼 강렬한 기억이라면 굳이 이렇게 애써 떠올리려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진짜 왜 그랬지?
***
“그러니까 지금 잘못하면 오히려 쓰나미보다도 더 큰 재앙이 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엄청나게 무모한 짓을 한 거라고요!”
“원래 미국인들은 이렇게 목청이 이렇게 큽니까? 큰일은 당신 때문에 나겠네. 여기 아무도 귀 안 먹었습니다?”
“딴소리 좀 하지 마요. 어린애들도 아니고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지금 중요한 게 뭔지 몰라요?”
“고작 24시간이에요. 그 안에 일어날 파장은 그렇게 크지 않아요. 중요한 건 지금까지 사상자가 아무도 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진짜 속 편한 소리하고 있네요. 지금 그가 퍼낸 바다가 몇 톤이나 되는지나 압니까? 나는 가늠도 안 되거든요. 바다라고요, 바다. 나는 저걸 있는 그대로 내려놓을 수 있다는 소리는 못 믿겠습니다.”
진짜 놀고 있다. 이도하는 생각했다. 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이도하라도 자면서까지 특기를 운용하는 기똥찬 재주는 없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대로 의자에 늘어진 이도하는 꼬르륵, 하고 들리는 소리에 옆을 보았다. 이도하와 눈이 마주친 케이시 윌리엄스가 입을 속삭였다.
‘배고파 뒤지겠어요.’
‘나도요.’
앞에서 서로 삿대질까지 해대며 난리가 났건 말건 둘은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렸다. 특기의 사용은 운동만큼이나 칼로리를 소모하는데, 둘 다 아까 누군가 쥐여준 더럽게 맛없는 샌드위치를 빼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웬만큼 무난한 입맛을 가진 이도하는 샌드위치가 맛이 없을 수도 있음을 처음 알았다. 배고프고 지친 와중에도 그 정도로 맛이 없었으니 이도하는 저와 요리 솜씨가 비슷한 누군가가 만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냥 식도로 식량을 밀어 넣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