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57화 (57/250)

57화

스펜서 데이튼이 소심하게 속삭였다.

“아니, 그거 말하지 말라고요, 좀. 그 숙녀가 있으니까 다리 하나 건너서 됩디다.”

케이시 윌리엄스가 잠시 스펜서 데이튼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누군가 제 특기명을 입에 올리는 것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처럼 구는 특기자들의 행동에 잠시 환멸이 난 것 같았다. 곧 인내심을 추스른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래요. 다급했을 텐데 응용까지 했다니 참 기특하네. 그럼 이제 다시 공원으로 돌아가서 구조 활동에 임해 줄래요? 다들 많이 놀랐을 테니 상황 설명도 좀 해 주고요.”

“아니, 내가 뭐라고 합니까? 이게 설명이 되는 상황이에요? 샌디에이고가 지금 망할 아틀란티스가 됐는데?”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였구나. 이도하는 그제야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케이시!”

참새가 소리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목소리라고 생각한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칼이 실타래처럼 가늘어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는 여자가 헐레벌떡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가왔다. 머리칼만큼이나 그녀는 가늘었고, 어디서부터 뛰어왔는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격하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케이시 윌리엄스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여자는 다급하게 이도하를 가리켰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당장 숨부터 쉬느라고 여력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이도하는 잠깐도 기다릴 수 없었다. 고작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지구 반대편으로 날라 와 너무 많은 것을 겪어놓으니 덜컥 불안감부터 들었다. 이도하가 여자의 어깨에 손가락을 올렸다. 여자가 흠칫 놀랐다. 이도하의 손 주위로 푸른빛이 감돌다 사라졌다. 주춤거리다 곧바로 호흡이 멀쩡해진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회복을….”

“부탁인데, 또 무슨 일이 생겼다고는 하지 마요.”

이도하가 말했다. 여자는 이도하가 좀 무서운 것처럼 슬그머니 떨어지더니 제 머리카락만큼이나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당신 혹시… 태평양을 다….”

삐죽, 여자의 손가락이 소심하게 하늘을 가리켰다.

“아.”

“뭐라고요?”

이건 케이시 윌리엄스마저도 놀란 것 같았다. 태평양을 입에 올렸는데 고작 아, 따위로 반응하는 걸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는 아니고, 거의.”

“…….”

“…흘러내릴까 봐요.”

이도하가 손을 기울여 보였다. 바다를 통째로 갈라 들어 올리는 짓거릴 한 사람치고는 제법 태연해 보였다. 태도만 봐서는 그냥 물그릇에서 숟가락 하나 정도 퍼 올린 사람 같았다.

그제야 이도하는 익숙한 것 같았던 여자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케이시-! 머릿속을 카랑카랑하게 울리던 그 목소리였다. 지진 규모를 전했던 것도 그렇고, 허공을 뜯어내 다른 곳을 비추었던 스펜서 데이튼의 말을 미루어 보면 여자의 특기는 전이 계열이었다. 그것도, 아마 전 세계로 닿을 수 있는 초장거리 전이가 가능한 특기자.

어쨌든 다들 한 마음으로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쳐다보니 이도하는 순간적으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바다를 갈라놓는 거창한 짓을 한 건 아마도 모세 이후로 그가 처음일 것이다. 작대기 하나 든 양반에게 의지해 갈라진 바다 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일화를 들은 어린이 이도하는 ‘와, 미쳤다. 뭘 믿고!’ 하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쉽다.

심지어 그 모세도 바다를 머리 위에 올려놓지는 않았다. 저야 제가 올려놓았으니 괜찮다 싶지, 남들이야 사정이 다를 것이다. 하물며 난데없이 바다가 떠오르는 걸 본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말이다.

이도하도 바다를 횡으로 갈라 통째로 띄우는 게 시각적으로 너무 과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급하다, 급하다 재촉했던 것처럼 쓰나미가 지척이었으며, 그게 이도하가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물론 이도하라도 이걸 곧이곧대로 가장 쉬운 방법이라서 그랬다, 고 답하면 안 된다는 느낌은 왔다. 이럴 때는 구구절절을 할 수밖에 없다.

“남아시아 대지진 때 반대편의 아프리카까지 쓰나미가 닥쳤다면서요. 쓰나미라는 게 지진으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 건데 통째로 막아봤자 어디로 튀어서 또 무슨 일이 생길 줄 모르고, 일단 다 퍼 올리면 거기서 다 해소될 테니까….”

이도하는 말하면서 흘긋 아래를 살폈다. 소환진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도하는 제 속이 저 바닷물처럼 요동치는 것 같았다. 가슴이 지그시 눌리는 것 같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문득 시오한이 처음 저를 소환했던 때가 새삼 생각나기도 한다. 그는 좀 유쾌한 생각을 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순간, 누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모를 박수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도하는 곧바로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 마, 하지 마, 그가 질색한 얼굴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에 무색하게, 곧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 소리가 사이렌 소리마저 뒤덮었다.

당장 그들을 쓸어버렸을 쓰나미에서는 살아남았지만, 머리 위에 떠오른 바다가 떨어져도 쓰나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테였다. 그러나 바다가 절대 떨어지지 않으리란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사람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에 눈물을 터트렸다.

이도하는 제발 아무도 절 끌어안거나 키스 따윌 날리지 않길 바라면서 푹 고개를 숙였다. 부디 아무도 절 알아보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그렇게 고개를 숙이니 아직도 영롱하게 빛나는 소환진이 발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쥐구멍이 바로 여기 있는데, 갈 수가 없다. 슬픈 진퇴양난에 빠진 이도하는 근심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흘긋, 눈을 들어 올렸다가 허공을 말 그대로 ‘뜯어냈던’ 스펜서 데이튼과 시선이 마주친 이도하는 미간을 구겼다. 예민해진 그가 눈썹을 세웠다. 포옹 따윌 하려고 들면 저 바다에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아니, 존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해 놓고 이유는 존나 상식적인 게 신기해서….”

덩치도 근육도 겉으로 봐서는 곰이 둔갑한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순하게 대꾸했다.

“태평양이 무슨 빌어먹을 푸딩도 아니고….”

“윌리엄스.”

저벅- 지척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사람 안 구합니까?”

내디딘 구두 한 켤레로부터 수천만 개의 빛 알갱이들이 달려들듯 모이더니 순식간에 사람의 형체를 이루어냈다. 마지막으로 달라붙은 빛무리가 어른거리다 사라진 것은 보기 드문 옅은 금발이었다. 새까만 양복 주머니에 손을 꽂은 남자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장관이긴 한데… 그만큼 빨리 움직여야 하는 게 아닌가 해서.”

단정하게 넘겼었던 것 같은 짧은 금발은 세찬 바람에 흐트러졌다. 홀린 듯 남자의 금발을 바라보던 이도하는 그 아래,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눈매가 깊은 수려한 눈이 짧게 이도하를 보다 옆으로 빗겨 시선을 옮겼다. 남자의 눈동자가 잠깐 일렁인다 싶더니 붉게 물들었다. 눈동자 속에 불꽃이 이는 것처럼.

이도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두 블록 너머 건물 옥상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한낱 촛불처럼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이도하는 즉시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자잘하게, 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크게 특기 관련 범죄가 일어나는 미국에서 매번 그때마다 매스컴을 타기 때문이었다. 수사관보다는 할리우드에나 더 어울리는-방정맞은 미국의 몇 언론들은 그렇게 떠들어댔다.

FBI 특별 범죄 분석팀 SCU(Special Crime Analysis Unit)의 팀장, 레무스 비숍. 그는 특기가 역사에 기록된 이래 유일하게 섬광이 붉게 발현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우르슬라 다음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특기를 가지고 있기도 하며, 그 특기는 대체로 비유와 은유로 이루어져 길어지는 특기명 중 가장 짧고 단순하기로도 유명하다.

‘불꽃.’

시선 한 번으로 불길을 잠재운 레무스 비숍의 눈동자가 다시 푸른빛으로 돌아왔다. 그는 표정 없이 흘긋 머리 위의 바다를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이도하는 짧게 흔들리는 그의 금발에 응시하다 기이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구우우웅, 하고 공기가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그들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엄청나게 크고 넓적한 무언가가 너울거리며 허공을 유유히 허공에 미끄러졌다. 자세히 보니 깜찍한 동시에 너무 거대해 좀 무섭기도 한 빙그레 미소가 보인다. 낯이 익다 했더니 무려 가오리였다. 집채만 한 가오리가 허공을 날고 있었다. 등에는 노약자들과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고층 빌딩의 옥상에서 사람들이 가오리로 옮겨 탔다. 올라탄 누군가는 인접한 거리에서 호버링하고 있는 헬리콥터에 격렬하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린다.

“별….”

스펜서 데이튼이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 선 모든 이들의 심정을 복잡한 대변하는 간단하고 함축적인 감탄사였다. 어쨌거나 그들은 이렇게 서서 실없는 감탄 따위나 하고 있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살아있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같은 순간에, 이도하는 천천히 빛이 꺼지다 마침내 사라지는 제 소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이도하가 애써 생각했다. 별일 아닐 것이다. 밥 먹자. 좀 걸을까. 이리 와. 안아 줘. 또 그런, 별것 아닌 일일 게 틀림없었다. 괜찮아. 이도하가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이 소환진 너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얼굴, 다정하게 휘는 눈매, 그런 것들은 떠올리지 않아야 했다.

괜찮다. 시오한은 대제국 이리스티리움의 황제이며, 제1기사이기도 했다. 한 번쯤, 저 하나쯤은….

“아.”

이도하는 완전히 사라진 소환진에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한때는 이 소환진이 사라지는 걸 보며 진절머리를 쳤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지금은.

“…미안.”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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