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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56화 (56/250)

56화

“여기는 어쩌고요?!”

올리버 로스가 외쳤다.

[케이시!]

새된 목소리가 머릿속을 카랑카랑 울렸다. 뇌에 정을 대고 직접 박아 넣는 것 같다. 쩡- 하고 울리는 순간적인 충격에 이도하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올리버 로스와 케이시 윌리엄스도 마찬가지였다.

[예보가 틀렸어요! 틀렸대요, 케이시! 규모 8.9가 아니라 9.4였어요!! 범위가 너무 커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세 사람의 머릿속에 다급하게 울렸다. 올리버 로스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멈추어 있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이면 그들을 모두 쓸어버릴 것 같은 거대한 바다의 벽을, 그 그림자 아래 필사적으로 달리는 사람들의 아비규환을 바라보았다.

“스펜서!!”

케이시 윌리엄스가 벼락같이 소리쳤다. 셔츠를 걷어붙인 채 사람들을 인솔하고 있던 남자가 그들을 보았다. 땀 범벅이 된 남자의 눈에 새파랗게 섬광이 올랐다. 사람들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어느 순간 두 손끝으로 허공을 찍어 움켜쥐고 잡아 뜯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땀으로 흥건한 남자의 셔츠자락, 잔해에 깔린 차 모퉁이를 담은 허공이 얇은 종이처럼 그대로 뜯겨 나갔다. 그 자리에 대신 나타난 것은 광활한 대양의 광경이었다.

높은 하늘에서 유영하는 새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은 넓은 바다다. 일견 잠잠해 보였으나, 아니었다. 마치 그 밑에 거대한 무언가를 숨긴 것처럼 부풀어 있다. 시선이 내려갔다. 웅크린 채 모든 걸 터트릴 준비를 하고 달려가는 바다 끝에는 긴 해안선이 있었다. 허공을 뜯어낸 남자조차도 그 모습을 보고 아연해졌다. 신이시여…. 올리버 로스가 중얼거렸다.

“가요!”

케이시 윌리엄스가 소리쳤다. 그러나 이도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일순 체념한 사람처럼 보였고, 이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이곳은 너무 큰 도시였고, 거대한 쓰나미가 이미 지척에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 발버둥 치고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모두를 구하는 건 불가능할 일일 테였다.

굳어 있던 거대한 물결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마침내 이도하가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도망치는 것마저 포기한 사람들은 멈춰서 멍하니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 거대한 벽을 올려다보았다. 우우우웅-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공기가 떨며 허공이 흐릿해졌다. 까만 눈동자에 푸른 기운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눈동자를 완전히 새파랗게 잠식한 섬광이 넘실거린다.

“-!!!”

사이렌 소리마저 잡아먹힌 진공 속에서 케이시 윌리엄스가 뭐라고 외쳤다. 이도하가 빳빳한 입매를 끌어올렸다. 이도하가 제 팔을 잡은 케이시 윌리엄스의 손을 감싸 잡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진동이 멈추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단번에 파악하지 못했다. 머리 위로 바다가 쏟아져 흘러가고 있었다. 단 한 방울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이상 현상’에 익숙한 특기자들마저도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경악으로 입을 벌리고 고개를 꺾어 머리 위로 흘러가는 물결에 넋을 놓았다. 차츰, 그들은 이도하가 도시 위로 어떤 막을 둘렀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방어막 같은 것.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오, 시발….”

누군가 중얼거렸다. 둥근 막도, 파도를 빗겨낸 경사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건 절단면이었다.

바다가, 횡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쿵- 둔중한 울림이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머리 위에서 흔들리며 흐릿하게 투과되던 빛이 완전히 잠식되며 단숨에 사위가 어두워졌다. 도시를 완전히 쓸어버렸을 거대한 쓰나미는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물결에 부딪혀 단지 그 너머로 세차게 흘러갈 뿐이었다. 수평선도 사라졌다. 갈라진 바다의 경계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래위가 온통 바다다. 이도하가 갈라버린 바다는 점점 더 위로 떠올랐다. 하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바다가 있었다.

검푸른 빛이 일렁이며 지상에 단 한 번도 닿은 적 없던 물결의 그림자를 그려냈다. 아래에서는 불꽃과 조명이 바다를 비추었다. 세상은 이제 회색도 무엇도 아닌 기이한 빛을 띠고 있었다. 밤하늘이 사실 바다였더라면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화이람.]

착잡하게 제가 띄워 올린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이도하가 굳었다. 푸른빛이 어른거린다. 다정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천천히, 이도하가 시선을 내렸다. 이제는 익숙한 푸른 소환진이 그의 발치에 빛을 뿌리고 있었다.

[화이람.]

‘부르면 오잖아?’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 돼.

푸른 소환진이 일렁였다. 망막에 소환진이 그려진 것처럼 온통 그것만 보였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이도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지금은 안 돼.

앞으로 이도하의 평생에 그가 있다고 봐도 좋았다. 언제라고 이렇게 소환에 응할 수 없는 순간이 또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그러니 괜찮다. 크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도하는 애써 소환진을 무시했다.

“도하-”

어깨를 툭, 건드리는 손길에 이도하가 돌아보았다. 케이시 윌리엄스가 기가 막힌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를 친 것은 그녀만큼이나 다부진 주먹이었다. 이도하의 발밑에 펼쳐진 소환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소환진에 가까이만 가도 혹시나 함께 빨려 들어갈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봐 온 이도하에게는 생소한 반응이었다.

“진심이었네요.”

“…아.”

무슨 말인가 했더니. 구조 교육 시간에 만났던 케이시 윌리엄스는 언젠가 이도하에게 여러 가지 상황을 제시하며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개중에는 쓰나미도 있었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이도하는 대답했었다. ‘바다를 통째로 떠내겠다.’고.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들고 있다가 휘청하는 바람에 넘쳐버린다면 조금 떠내버리는 게 가장 간단하고 쉬우니까. 당시 쓰나미가 몰려오는 상황을 상상해 본 이도하는 복잡한 해안선을 일일이 막는 것보다는 그게 더 쉽고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케이시 윌리엄스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말았었다. 둘 중 누구도 설마하니 그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러게…. 진심이었네요.”

케이시 윌리엄스가 내민 주먹에 힘없이 제 주먹을 툭 부딪치며 이도하가 대답했다. 영혼 없는 대답에 케이시 윌리엄스가 흘긋 이도하의 소환진을 바라보았다. 여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르페노스 황제, 맞죠?”

소환진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며 이도하는 고개만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소환진이 꼭 이도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리지 마, 시오한. 그럴 필요 없어. 뭔가… 그냥 뭔가 하고 있을 수 있잖아. 이도하가 꽉 주먹을 쥐었다.

“그 이리스티리움의 황제잖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그렇겠죠.”

진이 좀 빠진 목소리로 이도하가 대답했다. 힘에 부치지는 않았으나,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느껴졌다. 그걸 어떻게 이해했는지 케이시 윌리엄스가 덥석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도하가 그 팔을 내려다보았다.

“저거, 24시간은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해 줄래요?”

“욕심이 과하시네.”

농담을 할 때가 아니긴 한데 사람이 너무 급작스럽게 충격으로 내몰려 해초처럼 쓸리다 보니 정신이 좀 멍했다. 머리 위에 바다까지 흐르고 있으니 더 그랬다. 와, 물고기가 보여. 한껏 고개를 꺾고서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말처럼 수천 마리의 물고기 무리가 휘청거리는 물결에 따라 유영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이 물고기들은 난생처음 육지를 지느러미 아래 둔 것도 모르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평화로웠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요.”

이도하가 말했다. 잠긴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때까지도 이도하의 눈에 잔영처럼 남아있던 섬광은 곧 차분하게 가라앉아 사라졌다. 케이시 윌리엄스의 얼굴에 놀란 빛이 스쳤다. 이도하는 24시간이 아니라 밥만 주면 석 달 열흘도 올려놓을 수 있다는 얘기까지는 굳이 할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 좆 같은 사이렌 좀 제발 멈춰달라고 해 줘요. 멀쩡한 사람도 불안증으로 죽겠다고.”

이도하는 진심이었다. 위험을 경고하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이건 정말 과했다. 귀가 멀어버릴 것처럼 멍했고 뇌까지 얼얼한 느낌이었다. 하하- 케이시 윌리엄스가 시원하게 웃고는 말했다.

“그럴게요.”

“아니, 시발. 이게 다 뭐야…. 이게 지금 바다를… 아니, 바다잖아….”

어느새 다가온 남자가 약간 얼이 나간 얼굴로 위를 가리켰다. 허공을 뜯어냈던 남자였다. 양복에 셔츠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린 남자는 덩치도 근육도 곰과 비슷했지만 지금은 3살짜리 아이처럼 순진해 보였다. 이도하는 좀 신기한 기분으로 그들을 보았다. 한국어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이도하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흑인과 백인이 유창한 한국말로 옥신각신하는 걸 보는 기분이 참 새로웠다.

“바단데…?”

“정신 차려요, 스펜서. 아직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 유이토는 어디 갔어요?”

“그 꼬맹이는 공원에 두고 왔죠, 조막만 한 게 오다가 쓸려가기라도 하면 어떡하라고?”

“그럼 ‘훔쳐-’”

“악!”

덩치가 곰과 비슷하더니 고함 소리도 곰이 울부짖는 것 같다. 난데없이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 소리에 이도하마저 흠칫 놀랐다. 말하다 놀라 거의 혀를 씹을 뻔했던 케이시 윌리엄스가 그의 어깨를 찰싹 후려쳤다. 스펜서 데이튼은 이미 제풀에 제가 놀라 쭈그러들어 있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머리 위의 바다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도하를 놀라게 했다가 자칫 바다가 그대로 떨어질까 두려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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