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이건 서약이에요.’
18살, 인소더블 판정을 받았을 때 이도하는 아이라의 이드로 가입 권유를 받았었다.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흰 가운을 입고 있었고,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이도하는 여자가 내민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기가 닥쳤을 때 좌시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어느 때든, 어떤 때든 있는 힘을 다해 돕겠다는 약속. 신중히 생각하세요. 의무를 강요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도하군 힘이면 분명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 거예요.’
18살의 이도하는 그 말을 듣고 울고 싶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울고 싶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목에 아플 정도로 힘을 줘야 했다. 여자는 충분히 경고해 주었다. 그리고 18살의 이도하 역시 알고 있었다. 오직 선의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원망과 비난 역시 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네.’
그렇게 할게요. 간신히 울음을 삼켜낸 18살의 이도하는 그렇게 대답했다.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서약서에 서명을 한 이도하는 그 길로 화장실에 가 한참을 울었다. 제가 왜 우는지 통 알 수가 없어 짜증을 내면서 울었다.
왜 그랬지?
이도하는 문득 생각했다. 18살의 저는 어떻게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서명할 수 있었고, 왜 그렇게 울었을까. 오즈, 특기자, 계약자….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겠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것조차도 왜 그랬더라?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고 들어왔다. 순간적인 상념에 빠져들었던 이도하가 숨을 들이켰다. 다시 현실이 들이닥쳤다. 영화 얘기나 하며 시시덕거리던 강의실이 아니라, 불탄 냄새가 목구멍을 찌르는 현실이었다.
심장이 머리에서 뛰는 것 같다. 사이렌 소리가 심장 소리와 머리를 두들겼다. 이도하가 제 가슴을 틀어쥐었다. 왜 이러지? 꽉 막힌 것처럼 아팠다. 숨을- 숨을 못 쉬겠어. 이도하가 몸을 수그리는 순간 쿵! 발밑이 흔들렸다. 누군가 달려가며 그의 어깨를 퍽, 쳤다.
그렇지 않아도 시야가 이지러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던 이도하가 휘청, 넘어졌다. 뾰족한 돌멩이가 손바닥을 따끔하게 찔렀다. 부딪친 무릎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악과 비명 소리에 머리가 멍멍하다. 이도하는 그중에 제 이름을 들었다. 어설픈 발음이지만 제 이름이었다. 이도하가 까득, 입술을 깨물었다. 거칠게 머리를 턴 이도하는 섬뜩한 감각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도약으로 그를 이곳까지 데려온 남자가 그를 향해 고함치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남자의 머리 위로 부서진 거대한 건물의 잔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공중에서 우뚝 멈춘 잔해가 잠시 부르르, 떨더니 팟- 가루가 되어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빌딩에서 막 뛰쳐나오려던 사람들이 겁에 질려 주춤거린다.
“나와요!! 나오라고!”
이도하가 소리쳤다.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사이렌, 도로에 가득 찬 채 멈춰버린 알람 소리, 도시 전체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다. 무릎을 딛고 일어서며 이도하가 다시 손짓했다. 나와요! 한 사람이 머리를 감싸고 뛰어나오자, 그 뒤를 이어 우르르 뛰쳐나온다. 이도하는 사람들 사이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가오며 남자가 무언가 외치며 손짓해댄다. 그러나 여전히 찢어질 듯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와 차들의 알람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뭐라고 하는-”
우뚝, 이도하가 멈추어 섰다. 등골이 서늘하다. 그때, 발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바닷물이었다. 바닷물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무너진 도시, 갈라진 지면, 지진- 바닷물.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동공이 확 좁아 들었다. 기울고 비틀린 건물 틈 사이를 지나 시선이 순식간에 먼 곳에 닿았다.
“!!!”
바다가 있었다. 먹구름과 맞닿아 길게 펼쳐진 수평선이 어둑하다. 여전히 귀를 찢을 듯 다급하게 울려대는 사이렌은 요란했으나, 저 바다의 끝은 기이한 침묵 속에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먼 수평선은 다른 세상처럼 고요해 보였다. 그러나 이도하는 숨 막히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심장이 꽉 조여든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그리고 이도하는 깨달았다. 그건 수평선이 아니다. 파도였다. 맹수처럼 소리 없이 한껏 불린 몸을 낮추고 다가오고 있었다. 지척이다- 이미 해변은 삼켜지고 있었다. 해안 바로 인접한 건물들 사이로는 성난 바닷물이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물은 벌써 이도하의 종아리까지 차 있었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사방에서 난무한다.
도망치려는 사람들, 한 명이라도 구해보려는 사람들. 그러나 늦었다. 더 거대한 게 다가오고 있다. 이도하가 이를 악물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순식간에 새파란 섬광으로 물들었다.
쾅!!!
어마어마한 굉음이 허공을 찢을 듯 흔들었다. 몸집을 키워 웅장하게 밀려들던 쓰나미가 거대한 벽에 부딪혀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구쳐 올랐다. 부서진 파도가 새하얗게 허공을 뒤덮었다. 연이어 밀려든 파도는 틈을 노리듯 옆으로 퍼졌으나 마찬가지였다. 콰아아앙-! 파도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사이렌 소리마저 집어삼켰다. 엄청난 굉음에 공기가 떨리는 것이 살갗으로 느껴진다.
이도하는 새까만 그림자에 집어삼켜졌다. 솟구쳐 오른 바다는 그대로 쏟아져 그와 이 도시를 덮쳐 쓸어버릴 것 같았다. 후두두둑- 부서진 파도의 파편 같은 물줄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놀라 반사적으로 머리를 파묻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등 뒤를 보았다. 쾅! 다시 한 번 밀려든 파도가 물러서려던 물결 뒤에서 또다시 들이받았다. 공기가 요동쳤다. 남자가 입을 벌렸다.
모든 것을 쓸어버릴 기세로 들이닥쳤던 바다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 벽에 맞닥트려 위로 솟구친 채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시선이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시야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해를 가리고 도시 전체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도열하듯 서 있었다. 나아가지 못한 채 갇힌 거대한 힘은 내부에서 그대로 거세게 요동치고 있는 반면, 멈춘 바다는 기가 막히게도, 아름다웠다.
부서진 파도의 끝자락에서 하얀 포말들이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떠오른다. 빗줄기처럼 쏟아지던 파도의 파편도 더 이상 없었다. 허공에 물방울들이 정지해 있었다. 수천 수십억 개의 방울들이 천천히 다시 허공으로 떠오른다. 이미 바닥에 흥건한 바닷물조차도. 감히, 감히 장엄한 광경이었다.
남자가 멍하니 이도하를 보았다. 젖은 머리칼이 이마를 덮고 눈가로 잔뜩 흘러내려 있었다. 우르릉, 또다시 땅이 울었다. 뱃전에 선 것처럼 흔들린다. 어디로든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달리던 사람들이 남자처럼 멍하니 멈춰선 채로 솟구친 바다를 바라보다 또 겁에 질려 웅성거렸다. 그러나 더 이상 어디로도 움직일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휘청거린 이도하가 얼굴에 흥건한 물기를 떨쳐냈다. 보이지 않는 힘에 붙잡혀 허공에 그대로 멈춘 파도의 끝자락으로 빛이 갈래갈래 쪼개지며 그들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깨트렸다. 이도하가 다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서늘한 눈매가 훤하게 드러나는 것을 본 남자가 경악했다. 이도하의 새까만 두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섬광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만한 힘을 써 놓고도 이도하는 크게 힘든 기색이 없었다.
다 끝난 것 같았다. 도시는 무너졌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을 테지만 더 큰 재앙은 막았다. 도약으로 이도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남자, 올리버 로스는 헛웃음이 나왔다. 맙소사. 입매를 쓸어내리며 그는 장엄하게 솟구친 바다를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이도하에게 다가갔다. 이도하-!! 그때 누군가 외쳤다. 아주 분명한 목소리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도하!”
자그마한 키의 여자였다. 머리끝이 이도하의 턱 끝에나 간신히 닿을 것 같았다. 아주 다부진 얼굴을 한 새파란 눈의 흑인이었다. 옷이고 얼굴이고 죄 그을음이 묻어 있다. 꽉 묶은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케이시?”
올리버 로스가 놀라 그녀를 불렀다.
“뛰어요! 가요! 펫코 파크까지 가요! 어서!!”
양복에 와이셔츠를 둘둘 걷어 올린 또 다른 남자가 사람들 틈에서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덩치도 근육도 곰과 비슷한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반쯤 넋을 놓고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모르다가 곧 뛰기 시작했다. 길에 가득 멈춰선 차의 틈 사이로, 무너진 잔해를 밟고 뛰어넘는다. 순간 하늘에 푸른빛이 번쩍였다.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옅은 푸른빛을 띤 그물망 같은 것이 거미줄처럼 사람들의 머리 위로 쫙 펼쳐져 있었다. 그 너머, 더 높은 옥상에서 사람들이 마구 소리친다. 다급하게 팔을 휘두른다. 쿠우웅- 다시 한 번 도시가 길게 신음했다. 땅이 지그시 흔들렸다. 휘청거리던 건물의 유리창이 부서져 내렸다. 아래로 떨어진 창문의 파편은 넓게 펼쳐진 그물망에 닿는 순간 파삭, 가루가 되어 곱게 흩날렸다.
“올리버! 지금 당장 라호이아, 라호이아로 가요!!”
여자가 이도하의 팔을 잡았다. 이도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케이시 윌리엄스, 이드로의 단장이었다. 이드로의 정기 구조 교육 때 두어 번 본 일이 있었다. ‘어긋나지 않을 자유’. 그녀는 언어 계통으로 세계에서 최고로 꼽히는 특기자였다.
“케이시, 여긴-”
“끝이 아니에요! 쓰나미가 또 올 거예요, 더 커요! 라호이아 쪽은 전부 주거 지역이라 고층 건물도 없어요, 이대로 또 쓰나미가 닥치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요! 지금 당장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