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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54화 (54/250)

54화

“자, 선배. 같이 보면서 어디를 얼마나 못 만들었는지 찾아줘요. 소환진이 엉망이라던가, 오즈는 저렇게 안 생겼다던가, 뭐 그런 거 있잖아요. 허점을 들춰주세요. 오지는 리뷰 남겨줘야지.”

이주연이 음산하게 말했다. 이주연은 조별 과제로 삐뚤어진 나머지 남의 조 과제를 아주 편파적으로 뜯어놓겠다는 심산 같았다. 나만 불행할 수 없다는 심보와 일맥상통하다. 다른 영화였더라면 이도하도 좀 흥미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이주연의 말처럼 ‘어디 한번 보자’까지는 아니고 일반인의 상상력으로 묘사된 오즈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내친김에 역대 오즈 소재 영화로는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화는 무려 감독 본인이 계약자였다. 아무튼 이 영화는 아니다.

샬롯 하퍼는 끝내 답을 찾지 못했으니까. 이도하는 이도하답게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그러나 샬롯 하퍼의 장례식 날 유족들은 텅 빈 관을 들었고, 전 세계가 유언 한 마디 적히지 못한 비석에 추모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주연아.”

이도하가 영화 예매 창을 두드리며 눈을 희번득거리는 후배를 불렀다.

“나 머리 묶는 것 좀 가르쳐 줘.”

“네. 네?”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던 이주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도하가 고슬고슬하게 구부러진 이주연의 긴 머리칼을 가리켰다. 겨드랑이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이 그 사람보다는 짧지만 연습은 될 것 같았다.

“머리끈 있어?”

“있죠. 있는데 머리는 왜….”

떨떠름해하면서도 이주연은 일단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머리끈을 건네려다 본인의 머리로먼저 시범을 보였다. 이도하는 유심히 관찰했다. 다시 머리를 푼 이주연이 머리끈을 주고 등을 보였다. 이도하가 조심스레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옆에서부터 그러모으고요….”

“이렇게?”

“네. 잡고 그 안으로 모아야 해요.”

이건 무슨 그림이냐. 윤윤형이 레모네이드 캔을 물고서 둘을 구경했다. 주연아, 너 그러다 이모 형이랑 스캔들 나겠어- 하는 헛소리도 했다. 이도하는 늘 그렇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나 공공재로 남기로 서약한 경영대 존잘 남신 선배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궁리하던 이주연은 그 말에 뭔가 번뜩 생각이 난 듯했다.

“악! 선배 여자 친구 생겼어요?!”

이주연이 홱 돌아보았다. 거의 다 그러모은 머리칼이 이도하의 손에서 쑥 빠져나갔다. 이도하는 모양만 남은 제 손을 내려다보다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안 생겼어요.”

“아아, 안 돼 안 돼. 안 돼요. 선배는 경영대 공공재라고요. 누군가의 남친으로 전락해서는 안-”

“나 게이야.”

풉- 레모네이드가 화려하게 비산했다. 안개 분사 수준으로 허공에 곱게 뿌려진 레모네이드는 이도하의 재빠른 대처로 옹기종기 다시 하나의 방울로 변해 곱게 캔 안으로 돌아갔다. 사레가 든 윤윤형이 요란하게 기침을 해 댔다. 이주연이 입을 떡 벌렸다. 격한 반응에 이도하는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켁, 미친놈아!”

반쯤 숨이 넘어가던 윤윤형이 눈치를 보며 한껏 목소리를 죽이고 외쳤다. 이주연이 입을 틀어막았다. 이도하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감격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이번에는 윤윤형이 와락 제 몸을 감싸 안는다.

“너, 설마….”

이도하가 냅다 노트를 집어던졌다. 야무지게 윤윤형의 얼굴을 찰싹 때린 노트가 그의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헐, 선배….”

“…아닐 수도 있고.”

말 해 보면 좀 더 확실해질 줄 알았는데. 사실 이도하도 제가 게이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상대가 성별을 초월한 얼굴을 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같은 것 달린 남자인데 키스를 할 수 있었고, 심지어 또 아주 좋았다. 더한 걸 할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걸 보면 게이라고 해도 될 만한데, 또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한다고 생각하면 발끝이 주뼛 섰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별로 안 좋아졌다. 남이 동성과 키스를 하건 말건 관심 없지만 제가 한다고 생각하면 아주 싫었다.

시오한이라서. 시오한만이라고 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다. 문제가 아주 산재해 있다. 이도하는 속이 수틀려 뚱하게 손목에 건 머리끈을 퉁겼다. 쭉 당겼다가 탁, 놓으니 손목이 알싸하다. 잠깐 따끔할 뿐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는데 손목에 빨갛게 자국이 생겼다.

“아니, 선배…. 너무 좋은데 그런 걸 여기서 말하면 어떡해요. 물론 전 입에 지퍼 채움.”

“네가 왜 좋아. 어쨌든 아무도 못 듣게 해 놨어.”

이도하는 과감하지만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앞뒤로 빽빽하게 찬 강의실에서 그런 폭탄선언을 하면 숨 두 번 쉬는 사이에 온 세상이 알게 된다는 상식도 있었다. 당연히 이미 안 들리게 해 놨다. 거리낌은 없지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안주거리까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강의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안 들린 거 확실해요, 선배…?”

이도하보다 이주연이 더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물론 확실한데… 갑작스럽게 감도는 묘한 긴장감에 이도하가 얼굴을 굳혔다. 윤윤형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

“자, 이제 수업 시작할게요. 핸드폰은 눈치껏 넣어주세요.”

교수가 명랑하게 다시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주연과 이도하에게 핸드폰을 보이려던 윤윤형이 도로 내려놓았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이도하가 소리 없이 입을 벙긋했다. 우웅-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도하가 얼른 핸드폰을 쥐었다.

쾅! 누군가 강의실 철문을 두드렸다. 노크가 아니라 부술 듯한 기세였다. 이도하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덩달아 집중하고 있던 이주연은 반쯤 튀어 올랐다. 교수는 물론이고 학생들까지 놀란 참새 떼처럼 고개를 돌렸다. 벌컥, 문이 거세게 열렸다. 문가에 선 것은 호리호리한 외국인이었다. ‘excuse me.’ 땀범벅이 된 남자가 성의 없이 말했다. 눈은 바쁘게 강의실 안을 헤집고 있다. 잠시도 기다릴 수 없었는지 남자가 크게 소리쳤다.

-이도하!

“이도하 학생!”

외국인 뒤로 헐레벌떡 나타난 중년 남성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머리고 옷이고 죄 흐트러져 있었다. 소리친 것과 동시에 이 중년 남자는 이도하와 눈이 마주쳤다. 너 무슨 사고 쳤어? 윤윤형이 약간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우웅, 우웅, 핸드폰이 계속 진동한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이도하 학생 좀 잠시. 이도하군!”

“아, 예. 이도하군…?”

괜찮은 거야? 선배- 불안해하는 이주연과 윤윤형의 어깨를 대충 두드려 달래주며 이도하는 일단 강의실을 나섰다. 1분 1초가 모자란 사람처럼 다급해 보이니 영문을 모르는 이도하도 절로 긴장이 됐다. 책상 사이를 지나는 걸음이 빨라졌다. 남자가 초조하게 이도하를 강의실 밖으로 이끌었다. 강의실은 통째로 물에 빠진 것처럼 숨 막히는 정적에 눌려 있었다.

쿵, 등 뒤로 문이 닫히며 차가운 쇳소리가 긴 복도를 울렸다. 시선들이 가려지기 무섭게 외국인이 이도하의 팔부터 잡았다.

“왜-”

“이도하군, 지금 당장 가야 돼요. 이드로에서 긴급지원요청 왔어요!”

이드로.

이드로라고. 귓가에 찡, 이명이 울렸다. 이도하는 제가 차분히 숨을 내뱉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명 너머 그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손에 든 핸드폰은 여전히 진동하고 있었다. 쿵쿵쿵쿵,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진정해. 이도하가 되뇌었다. 그러나 별로 효과는 없었다. 긴장감에 뒷목이 뻣뻣해졌다. 왜 이러는 거야. 질끈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뜬 이도하가 숨을 들이켰다. 제 팔을 잡은 이 외국인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남의 손목은 축축했다. 이도하가 남자의 눈을 직시했다.

-ready?

우우우웅- 공기가 진동했다. 남자의 연한 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새파랗게 타올랐다.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방울이 남자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뚝, 떨어졌다. 이도하는 진동하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머리칼이 방향 없이 마구 휩쓸렸다. 바람에 짠내가 물씬 난다. 매캐한 탄내가 섞여 있었다. 사방에서 사이렌 소리가 비명처럼 찢어지고 있었다. 먹물이 씻겨나가듯 천천히 시야가 돌아왔다. 귓가가 멍멍했다. 이도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한층 더 또렷해진 시야에 눈앞의 광경이 들이닥쳤다.

무너져 내린 도시였다. 곳곳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먹구름이 긴 어두운 하늘 위로 새까만 연기가 치솟는다. 부서져 떨어진 간판에서 전류가 튀었다. 건물은 기울어져 있고, 떨어진 건물의 잔해들이 비참하게 널브러져 있었으며 깔린 차 안에는 누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솟고 갈라진 지면에 삐딱하게 기울어진 채 버려진 차들이 노란빛을 번쩍이며 요란하게 울어댄다. 도로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혼란과 공포에 빠져 울고 소리치고 있었다.

International ESP Disaster Rescue Organization. 국제 이능력 재난 구조 기구. 통칭 IEDRO(이드로).

화산, 지진, 홍수, 태풍, 해일 등의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자연재해, 혹은 다수의 인명 피해가 예고되어 재난이 선포될 위험이 닥쳤을 때에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아이라 산하의 국제기구.

‘감당할 수 없는 수준’ 수준의 자연재해나 재난이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에 이드로는 전문 구조 교육을 받은 소수 외에는 상시 인력이 없다. 재난 및 구조 교육을 진행하긴 하지만 재난 등급에 따라 그때그때 상황을 고려해 미리 가입된 특기자들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이건 서약이에요.’

18살, 인소더블 판정을 받았을 때 이도하는 아이라의 이드로 가입 권유를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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