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이름으로 우리는 사람들이 처음에 이 다른 세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어요. 지금은 모두가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게 오즈, 오즈, 하지만 사실 이 이름에는 인식이 담겨 있는 거예요.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고만 조그만 소녀. 믿을 리가 없겠죠? 하지만 그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던 누군가가 아예 이건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하고 엮어서 세상에 내놓으니 모두가 열광했어요. 믿지 않았을 때부터도 이 다른 세계란 그렇게 매혹적이었던 거죠.”
교수가 크게 칠판에 적었다. ‘오즈’.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 가둔 교수는 옆에 또 하나의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조랭이 떡 먹고 싶다…. 이도하는 옆에서 중얼거리는 이주연을 무시했다.
“오즈가 우리 세계에 정식으로 공인된 건 1907년이에요. 그때는 사실 뭐, 우리 세계나 오즈나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해요. 우리는 자동차도 굴러가고, 카메라로 사진도 찍었지만 그 정도야 도토리 키 재기로 봐도 좋을 정도예요. 하지만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은 어때요? 우리는 전 세계를 날아다니고, 손에 든 이 작은 기계 하나로 거의 모든 걸 다 할 수 있어요. 차는 스스로 굴러가고 수준에 다다르고 있고 우주 너머를 꿈꾸죠. 반면에 저 건너편의 세상, 오즈는 거의 그대로예요. 100여 년 전 우리가 처음 맞닥트렸던 그때처럼 여전히 말을 타고 다니고, 전제 군주인 황제가 다스리고, 무기는 여전히 칼과 활이란 말이에요.”
교수가 강의실을 훑어보았다. 이즈음에서 학생들이 뭔가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이주연이 조금 허리를 세우기는 했다.
“예로부터 더 발전된 문명과 그보다 좀 덜 발전된 문명이 만나면 어떻게 되었는지는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어요. 둘 중 하나인데…. 그중에 본래의 문명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특색을 잘 존중하고 보존해 온전히 발전만을 도왔던 사례는 별로 없죠. 나는 이게 사람이 가진 폭력을 굉장히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뭐, 제 의견은 차치하고서. 문제는 이거예요. 제한적이긴 하지만 무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교류했는데 어째서 오즈는 조금도 발전- 아니. 발전이라는 단어 말고 우리 변했다라는 말을 쓰죠. 어째서 오즈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발전이라는 단어 위에 빨간색으로 엑스자를 친다. 왕정. 종교. 사상. 과학. 교수가 조랭이떡 같은 두 개의 동그라미 위로는 그런 것들을 적었다.
“오즈과 이곳의 물리 법칙이 같지 않은 이유도 물론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이곳에서의 상식이 그곳에서는 상식이 아닌 경우가 태반이죠. 그러면서도 세상은 또 꽤 비슷하게 돌아간단 말이에요. 내리막길에서 공이 거꾸로 올라간다든가, 무거운 것보다 가벼운 것이 더 빨리 떨어진다든가, 얼음이 밑에서부터 언다든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참 희한하죠? 우리가 사는 세계가 왜 이런 모양인지는 우리가 발전시킨 과학으로 알아냈는데, 도대체 저 세계는 어떻게 저렇게 생겨 먹은 걸까? 미지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한데, 과학자들이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하지 않은가요?”
그러게. 도대체 왜 그럴까. 이도하는 펜을 돌리며 동조했다. 그러니까 질문은 그만하고 이제 답을 좀 말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대체 왜 그런가요, 교수님. 그러나 대학생들이 가진 특유의 촉으로 이도하는 이 연이은 질문들이 별로 좋지 않은 징조라는 것을 느꼈다. 옆에서 이주연이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이주연에게는 악어의 미소처럼 보였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한 번 답을 생각해 보세요. 다른 문명과 문명이 접촉했을 때 어땠는지를 예시로 들어도 좋고, 비교를 해 봐도 좋아요. 형식은 자율이에요. 최소 3인 1조로 해서 발표로 기말고사를 대체할게요.”
“안 돼…!”
이주연이 절규했다.
“이도하군은 어때요. 도강이래도 친구들이랑 같이 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당당한 도강생 이도하는 교수가 직접 입에 올리는 도강이라는 단어에 양심이 찔렸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교수님.”
이도하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교수는 폭탄과 함께 15분의 쉬는 시간을 선고했고, 이주연은 절규했다. 비슷한 절규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도강생 이도하만 깊이 안도했다. 수업은 빨리 끝나지만, 수업 중에는 손가락도 뇌도 쉴 수 없는 숨 막히는 밀도. 과제는 없지만 그보다 더한 조 과제, 그러나 어쨌든 기말고사는 대체함.
교수는 밀당의 고수였다. 장점과 단점으로 플러스 마이너스 영을 기록한다. 온탕과 냉탕을 체험하고 혼미해진 학생들이 남긴 애매모호한 수강 후기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강의명이 MSG처럼 첨가되니 대형 강의실이 아주 한가득이다. 태반이 신입생들이었다.
‘기초 오즈관계론.’
학점이 소중한 재학생들은 재미있어 보이는 교양 따위에 도박을 하지 않는다. ‘오즈’와 연관된 교양들이 인기가 많다는 걸 이도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새삼 이도하는 제가 얼마나 오즈와 관계된 일에 신경을 끄고 살았는지 실감했다. 이제 와 보니 뭘 그렇게까지 했나 싶을 정도였다.
“이모 형… 이번 학기는 아무래도 망했어…. 신입생들과 조 과제라니…. 콜록. 이상하다…. 눈앞이 왜 이렇게 캄캄하지…? 콜록콜록.”
학점을 소중히 하지 않았던 재학생 윤윤형은 이도하의 어깨에 늘어졌다. 이도하가 머리를 밀어냈다. 뼈가 없는 것처럼 흐물거리며 윤윤형이 달라붙었다. 비극적으로 손을 떤다.
“아…. 이스라엘산 레몬으로 만든 레모네이드를 먹으면 나을지도…. 콜록콜록. 교수가 돌아오면 나는 죽고 말 거야….”
이도하는 무시했다. 찰칵- 작게 들리는 핸드폰 셔터 소리도 무시했다. 야- ! 들리잖아, 멍충아! 와 씨- 진짜 이도하다, 이모 형이다 이모 형, 개대박적- 한껏 소리를 죽였지만 그래도 들려오는 소리도 무시했다. 학교에 오는 동안, 이주연과 윤윤형을 기다리느라고 경영대 건물 앞에 서 있는 동안, 그리고 교수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동안 내내 듣다 보니 이제 얼추 새소리와 비슷하게 취급할 수 있었다.
“콜록콜록.”
“윤형 선배 금연한대요. 담배 말고 이제 레모네이드에 중독된 듯. 당뇨로 죽고 말 거예요.”
책상 위로 늘어진 이주연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손을 떠는 게 정말 연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손에 힘이 없어 숟가락도 버거운 사람이 있었으니 멀쩡히 펜을 들고 있던 윤윤형은 무사하다. 이도하는 턱을 괸 채로 노트에 낙서를 끄적였다. 우르슬라, 맹약, 현자의 탑, 불법 실험. 대충 생각나는 대로 적고 나니 그 정도였다.
이도하는 비읍 위로 수십 개의 비읍을 더 썼다. 종이가 울 정도가 되어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현자의 탑. 불법 실험…. 이도하는 이제 동그라미를 그리고 또 그리기 시작했다.
“레몬…. 이스라엘산 레몬으로 만든 레모네이드….”
시오한. 펜이 멈추었다.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정신 차려 보니 시오한의 이름을 몇 개씩이나 써 놓았다. 파란색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들을 이도하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오한. 반듯한 작대기들이 모여 만든 그 이름이 갑자기 낯설었다. 이도하는 분해한 13개의 획을 소리 없이 혀끝에 굴려보았다. 시오한의 언어로 발음하던 것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그래서 낯선가.
“이모 형…. 레모-”
탁, 노트를 덮은 이도하가 일어섰다. 이도하를 덮치다시피 하고 있던 윤윤형이 휘청 균형을 잃고 의자 위로 엎어졌다. 쓰러진 채로도 그는 흑흑 따위의 가련한 울음소리를 냈다. 금연이란. 고개를 저으며 강의실을 나서는 이도하의 뒤로 우르르 시선들이 따라갔다.
잠시 뒤 돌아온 이도하가 탁, 책상 위로 캔을 내려놓았다. 뽀얀 바탕에 상큼한 레몬이 그려진 레모네이드였다. 자꾸 웬 이스라엘 타령인가 했더니 캔 아래에 정말 이스라엘산 레몬이라고 적혀 있었다. 윤윤형이 발딱 고개를 들었다. 물론 이도하는 먹고 좀 닥치라는 뜻이었다. 윤윤형은 어쨌든 감격스러운 듯했다.
“이모 형, 멋있어! 사랑해! 응원해!”
“마셔, 좀. 조용히 좀 해.”
“오, 선배 감사. 사랑해요.”
책상에 퍼진 이주연에게는 아메리카노 캔을 밀어주고서 이도하도 제 커피를 땄다. 시원한 커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레모네이드를 물려주니 과연 윤윤형은 희희낙락해져 핸드폰을 탐독하느라고 조용해졌다. 좋긴 한데 가만히 있으려니 또 멍하니 넋이 나가기 시작했다. 요즘의 이도하는 계속 그 모양이었다. 이도하가 차가운 커피 캔을 이마에 댔다.
시오한을 본 지가 오늘로 또 닷새쯤 되었다. 첫 소환으로 둘 다 몸져누웠던 때를 제외하면 가장 긴 텀이 일주일쯤이었으니 슬슬 소환을 할 때가 됐다. 이러다가 또 제멋대로 홀랑 가버릴까 봐 이도하는 뇌에 힘을 줬다. 아주 단단히 줘야 했다.
“선배, 영화 보러 가요.”
이주연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검은 배경에 푸른 소환진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여자가 손을 마주 대고 있는 포스터였다. ‘비하인드 더 게이트.’ 오백 미터 밖에서 봐도 특기자와 오즈를 배경으로 한 영화 중 하나였다. 그런 영화들은 꾸준히,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오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한결같았다. 소재가 반은 다 해 주니 아주 똥을 쑤지 않는 이상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박스오피스 영화 순위를 꼽으면 다섯 손가락 안에 계약자 관련 영화가 세 개나 있다. 물론 이도하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윤윤형이 관심을 보였다.
“개봉했네, 이거?”
“뭔데?”
“샬롯 하퍼 사건 있잖아요. 그거 영화로 만든 거요. 광고 엄청 때렸는데 못 보셨어요?”
못 봤다. 다른 세상에 가 있느라고. 그리고 지난 닷새 동안은 넋이 빠져 있느라고. 이도하는 닷새가 어느새 어떻게 지났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냥 숨 쉬다 보니 어느새 닷새나 지나있었다. 이도하가 학교에 나온 건 다 위기감 때문이었다. 저도 생활이 있는데 닷새가 그렇게 산 듯 만 듯 보내버리는 건 정말 옳지 않았다.
“2003년, 전 세계인을 눈물 흘리게 만들었던 미국의 계약자 샬롯 하퍼 사건. 거장 크리스토퍼 맥켈런의 손으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다. 네가 있는 곳이 내 세상이야. 우린 답을 찾을 거야. 두 개의 세계, 단 하나의 운명. 영원히 기억될 세기의 사랑. 웩.”
“와, 남의 사랑에 구역질하는 이주연 인성!”
“캐치프레이즈에 한 거거든요. 세기의 사랑이 오조오억 개는 될 듯.”
“이주연아, 이 찌르면 피 대신 동전이 나올 후배야. 원래 내 사랑은 다 세기의 사랑이거든요.”
“여친 없어 왔던 선배님은 조용히.”
“혼내줘요, 이모 형!”
이도하는 누군지 처음 그를 이모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람을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