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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52화 (52/250)

52화

현자의 탑이라고 하면 아이라의 협력 기관인데…. 이도하는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알기로 현자의 탑은 이리스티리움뿐만이 아니라 오즈 전 대륙에 걸쳐 각 나라에 하나씩 있었다. 처음에야 어떤 기관이었는지 모르지만 오즈와 그의 세계가 계약자를 통해 교류를 시작한 이후로는 아이라와 가장 긴밀하게 연대해, 지금은 이름이 남아있을 뿐 오즈의 아이라라고 봐도 좋았다. 정치로부터는 동떨어진 연구 기관이 타국에서 만든 지하 도박장의 자금을 끌어다 쓴다는 건 이도하가 봐도 한참 이상했다.

“시오한, 이리스티리움에 있는 현자의 탑이 본 탑 아니야?”

“맞아.”

“여기 연구 자금은 황실에서 지원해 주지?”

“귀족 가문에서도 받지만 황실의 지원금이 가장 크지.”

“귀족들은 왜?”

“현자의 탑에 소속된 계약주들이 많으니까. 지원금을 받는 대신 필요할 때 계약주들을 파견해 줘.”

시오한이 허공을 콕 찍더니 콕콕콕 밑으로 내려갔다. 지원금을 많이 낼수록 파견 순위가 높아진다는 뜻이렷다. 자본주의 맛 짜릿하지, 그럼. 이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유한 이리스티리움의 귀족 나으리들이니 손도 클 테고, 이건 자존심 싸움으로도 볼 수 있으니 씀씀이가 아주 헤펐을 것이다.

“고기 먹으면서 연구할 수는 있겠네.”

“객관적으로는 그래야겠지?”

시오한이 비스듬히 웃었다. 의관을 모두 갖춰 입은 시오한은 왕관을 씌워주려는 궁인을 물렸다. 궁인은 공손하게 시오한에게 왕관을 건네고는 침의를 챙겨 나갔다. 이도하에게도 깊이 허리를 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인사를 받은 이도하도 어색하게나마 고개를 숙였다. 시오한이 작게 웃으며 다가와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오늘은 옅은 푸른빛을 띠는 정복이 길게 늘어졌다.

“근데 고기를 사 먹는 게 아니라 삥땅을 쳤다…? 아니지.”

시오한에게 몸을 기대며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법 실험?”

“아마도. 연구 기록을 남기면 안 되는 일을 하는 모양이야.”

“그럴 게 뭐가 있다고?”

이도하의 세계에서야 마력이 곧 에너지가 되니 마력 불법 착취라든가 불법 유통 등 온갖 범죄가 일어난다. 공식적, 합법적으로 마력 취급이 가능한 건 에너젠뿐이지만 불법 사설 업체가 끝도 없었고, 그 에너젠과 아이라마저 사건 사고가 일상이다. 아이라는 세계에서 연구비가 가장 많은 기관으로 꼽힌다는데도 그랬다.

제3세계 아이라의 연구비 횡령은 분기별로 일어나는 행사고 마력 불법 추출은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기념일이다.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감찰부가 바로 아이라의 감찰 부서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득도할 때가 되면 아리아의 감찰부서로 등선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마력을 대가로 계약자의 특기를 쓸 뿐이다. 종류에 따라 물건을 만들고 특기로 특기를 저장하기도 하지만 이도하의 세계처럼 본격적이고 만성적인 불법적 시도가 일어나기는 힘든 구조였다.

“그러게 말이야. 호기심이 참….”

시오한이 느릿느릿 말했다. 잡으면 저렇게 차분하고 느른하게 뼈를 다 발라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직접 지휘해?”

“그곳에서 소란이 있었고, 부상자도 나오는 바람에 치안대에서 맡게 되었지. 공식적으로는 그렇고…. 방첩대는 내 휘하의 암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저는 그 부상자가 나온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도하의 눈초리에 시오한이 어깨만 으쓱 추켜올렸다. 어쨌든 시오한이 직접 지휘하기는 한다는 말이다. 이도하가 다시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현자의 탑. 우르슬라. 우연인가.

“…필요하면 써먹어.”

이도하가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손끝을 떠난 종이가 가볍게 허공을 유영하여 책상 위로 안착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걸, 화이람.”

“조용히 해, 조용히.”

이도하가 시오한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도하는 지난밤의 일이 부끄럽지 않았지만 시오한의 입으로 제가 한 말을 다시 듣는 건 몹시 부끄러웠다. 귀 끝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입이 막힌 채로 시오한이 눈웃음 지었다.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쏟아지는 가운데 그 따뜻한 눈동자를 노려보던 이도하가 짧게 혀를 찼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이도하가 시오한을 당겼다. 시오한이 기꺼이 몸을 숙였다. 햇볕에 반짝거리는 머리칼이 이도하에게로 쏟아졌다.

조용한 침실에 젖은 소리가 적나라하게 퍼졌다. 한참 후에야 비벼지고 뭉개지던 입술이 떨어졌다. 시오한이 잔 입맞춤을 퍼부었다. 눈을 감은 이도하는 온 자제력을 다 동원해야 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이도하가 다시금 되뇌었다. 이도하는 눈꺼풀을 가볍게 스친 온기와 함께 눈을 떴다. 시오한이 손에 무언가 쥐여 주었다. 내려다보니, 왕관이었다.

“씌워줘.”

“…머리, 안 묶어?”

이도하는 길게 쏟아져 내린 머리칼을 정리해 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여동생도 없는 이도하는 생전 이렇게 긴 머리칼을 건드려 본 것도 처음이었다. 머리칼은 매끄러웠지만, 어찌저찌 하다 죄 손가락에 걸려 엉켜 버릴까봐 주저하게 되었다. 이도하는 엉거주춤 머리칼을 그러모아 한쪽으로 넘겨보았다.

“그대가 묶어줘.”

“나 할 줄 몰라.”

“그냥 묶으면 돼.”

“말이 쉽지.”

시오한이 하하 웃었다. 그 머리위에 왕관을 씌워주며 이도하가 얼굴을 찡그렸다. 조금 떨어져서 보니 헝클어진 곳도 없고, 왕관도 삐뚤어진 곳 없이 잘 안착한 것 같다. 그대로 가면 되겠네, 하는 순간에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오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락이 떨어지고 들어온 것은 키가 훤칠한 아주 젊은 남자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경쾌하게 시오한에게 인사를 올린 남자는 곧 이도하와 눈이 마주쳤다. 옅은 회색 눈동자에 호기심과 호의가 반짝였다.

“참 시기적절하군.”

“송구합니다, 폐하. 그래도 신이 힘 닿는 만큼은 애를 써보았는데 아무래도 모시러 와야 할 것 같지 뭡니까.”

“일리온 시타 백작. 시종장이야.”

시오한이 남자를 소개했다. 시오한이 누군가를 소개해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은은하게 웃는 상이던 시타 백작이 방긋 웃었다. 효과음이 들릴 것처럼 세상 반가운 미소라 이도하는 얼떨떨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리온 시타입니다.”

“아, 예. 어…. 음.”

이도하가 뜻하지 않게 버벅거렸다. 이도하, 본연의 이름으로 소개를 하려니 그는 이곳에서는 이도하가 아니다. 그 이름은 오즈에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계약주가 준 이름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들어도 들은 적이 없는 것처럼 지워졌다. 그러나 화이람이라고 소개를 하자니…. 그냥 내키지가 않는다.

“오르페노스 공이 어떠십니까.”

이도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시타 백작이 먼저 말했다. 아무렴 상관없는 이도하는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시오한을 보니, 그는 매우 흡족해 보였다. 이도하는 여전히 반가운 미소를 한가득 띠우고 있는 시타 백작과 시오한을 잠깐 번갈아 본 뒤 두 사람의 거리를 대충 짐작해냈다.

“자주 보죠.”

“반가운 말씀이십니다.”

이도하는 살짝 고개만 숙여보였다. 시타 백작이 즉시 대답했다.

어느새 이도하의 어깨에 놓여있던 시오한의 손이 스쳐 떨어졌다. 이도하는 따라나서지 않았다. 시오한이 돌아보았다. 아주 찰나의 진공이었을 뿐인데 시타 백작이 말했다.

“하면 신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폐하.”

문이 닫혔다. 방 중앙에 선 시오한은 이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또 그렇게 봐.”

위에서 아래로 꾸욱 누군가 심장을 내리누르는 것처럼. 뭘 또 이렇게까지. 이도하는 난처함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섰다. 시오한이 이도하의 눈가를 쓸었다. 문신처럼 생겼으나 절대로 지워지지도 흐려지지도 않을 이름을 확인하는 것처럼 문지른다. 이도하의 주먹이 그의 가슴팍을 툭 쳤다.

“자꾸 사람 어리바리 나쁜 놈 만들지 말자. 나 이미 충분히 부자야.”

“아직은 괜찮아.”

“당신 괜찮아는 쓰러지고 나서야 안 괜찮아가 되잖아.”

“아닌데.”

“아늰뒈.”

이도하가 유치하게 이죽거렸다. 시오한은 옅은 웃음기를 보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묵직하게 눌린 심장은 여전했다. 뭘 또 이렇게까지. 또 생각이 들었다. 계약자와 계약주, 서로의 감정을 느낀다는 게 꼭 맹약이 아니라 계약의 한 부분이라면 맹약은 사실 그보다 더한 것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이도하는 시오한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시오한이 무슨 생각으로 절 이리 보는지 이도하는 그게 알고 싶었다. 유유히 앉아 가만히 절 바라보는 사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

이도하가 제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딸랑딸랑 흔들었다. 종이라도 있었더라면 정말 소리가 났을 자리였다. 이도하가 짓궂게 웃었다.

“부르면 오잖아?”

다른 계약주들과 계약자들은 어떻게 헤어지는지 모르겠지만, 매번 이렇지는 않을 거라고 이도하는 확신했다. 이도하도 그냥 아무렇지 않고 싶었다. 마침내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응.”

“만땅 되고 불러.”

이도하가 당부했다. 어차피 시오한에게 급한 일 같은 건 생기지 않을 테였다. 밥 먹고, 같이 잠행 나가고, 술이나 한 잔 하고, 또 뭐 그럴 것이다.

“그래…. 걱정하지 마, 화이람.”

이도하가 와락 시오한을 끌어안았다. 늘 그렇듯 마주 안아오는 손길이 좋았다. 그래, 뭐 앞으로도 그들은 계속 이럴 테였다. 별스러운 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도하가 몸을 떼는 순간 시오한이 그를 잡아당겼다.

급작스러운 입맞춤은 지난 저녁만큼이나 농밀했다.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라 노골적인 전조였다. 영역표시를 하듯 적나라해 아랫배가 당겨오고 몸이 달아올랐다. 이도하는 이거야말로 시오한이 여태 선보인 수작 중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오한만큼이나 그를 제게로 당기고 있던 이도하가 간신히 입술을 떼어냈다.

“…진짜 못 하는 게 없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숨이 가늘게 섞여 나왔다. 마주한 황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갈게.”

이도하를 구성하고 있는 마력은 쉽게도 흩어졌다. 단단히 뭉쳐있다 쓸려 내리는 모래알들처럼 알알이 흩어지는 푸른 파편이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그와 함께 손끝을 떠나는 온기도. 참 쉽게도 사라진다. 가늘게 떠 있던 미소도 함께 사라졌다. 바람에 뜬 먼지조각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던 조그만 푸른 빛 하나가 시오한의 손끝에 머물다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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