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이도하는 아주 평온하게 눈을 떴다. 채워야 할 잠을 다 충족해서 그만 일어날 때가 된 것처럼 스르륵 눈을 떴다. 그는 원래도 잠을 잘 자는 편이었으므로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다만 상황파악이 좀 필요하기는 했다.
“……”
이도하는 베개 대신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붙이고 있었다. 반쯤 엎드려 걸쳐져 있다시피 했다. 이도하가 흘긋 눈을 들었다. 햇살이 쫙 쏟아지는 아침이었다. 그는 가만히 생각했다. 지난번에도 이와 비슷하게 아침을 맞이한 적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건 그러니까 어제 소환된 제가 오즈에서 무려 하룻밤을 잤다는 말인가….
이야.
헛바람처럼 웃은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베고 누워있던 가슴팍에 턱을 기대고서 이도하는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도 안 잔 것처럼 절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는데. 이건 또 의외다. 새삼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빤히 시오한을 보던 이도하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손을 들어 가지런한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열은 없었다.
다행이네, 생각하며 이도하는 다시 편안하게 턱을 기대고 시오한을 관찰했다. 보통 이 각도에서 보면 좀 못나 보이고 그래야 하는데… 이 인간은 붓지도 않는 건가. 이도하는 햇살이 쏟아지는 제 계약주의 얼굴을 마음껏 구경했다.
잠든 시오한은 신기하고 새로웠다. 일어난다거나 비켜줄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도하는 술에 취해 잠이 들면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이 잤다. 제가 이러고 있다는 것은 시오한이 이렇게 안았다는 얘기였다. 이도하가 입술에 힘을 주었다. 꾸물거리던 입술은 결국 조금 웃고 말았다.
과연 어제 마신 술이 좋은 술이긴 했던 모양이다. 병째 들이키긴 했지만 고작 한 잔 정도였을 텐데 순식간에 취한 걸 보면. 그런데도 숙취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아주 상쾌하기까지 하다. 취한 이도하는 제가 취한 줄 몰랐지만 멀쩡한 이도하는 제가 취했었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니 어젯밤의 기록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도하는 필름도 잘 안 끊기는 편이었다.
“…오….”
주님. 적나라하게 떠오르는 감각에 이도하는 잠시간 믿어본 적도 없는 신을 찾았다.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건 일종의 부끄러움이었고, 근래에 들어 한층 더 뻔뻔해진 이도하는 금세 괜찮아졌다. 충동이긴 했지만 그러고 싶어서 했는데 뭘. 돌이키지 못할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키스 좀 했을 뿐이다. 심지어 아주 좋았다.
좋았지, 기분이 좋았는데… 이도하의 시선이 시오한의 입술에 꽂혔다. 음. 그는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상황이 좀 우스웠다. 술주정 부려놓고 아침에 일어나니 낯선 침대에 남자와. 이런 제목쯤 붙여도 될 것 같았다. 와, 내가 이걸 해 보네, 하고 생각하는 이도하의 시선은 여전히 시오한의 입술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
까딱 눈썹을 들었던 이도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니야, 아니야. 이도하는 다시 다른 생각을 해보려 머리에 힘을 주었다. 어젯밤의 일이 노트를 넘기듯 팔락팔락 떠올랐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순간 등이 팍 터졌다. 이도하도 반짝 머리에 불이 들어왔다.
특기가 튀는 건 흔한 일이었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튀어봤자 별로 티가 나지 않는데, 이도하는 특기가 유별난 만큼 튀는 것도 유별나게 티가 날 뿐이었다. 책상다리를 부순다든가, 들고 있던 숟가락이 찌그러진다든가, 가까운 곳에 있던 종이가 찢어진다든가.
사람들이 열 받거나 순간적으로 울컥하면 손이나 다리로 할 법한 그런 일들이 이도하는 특기로 튀었다. 손보다 생각이 빠른 법이니까. 심각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제는 좀 달랐다. 그렇게 특기가 들끓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런 키스도 처음이기는 했다.
“씁.”
기승전키스로 이어지는 사고의 흐름에 이도하는 그냥 포기해버렸다. 어차피 이건 불가항력이다. 눈앞에 시오한이 이렇게 잘 차려진 밥상처럼 누워있으니 이건 제 탓이 아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이도하가 합리화했다.
몸을 일으킨 이도하가 시오한을 내려다보았다. 늘 봐도 현실감이 없는 건 여전했다. 뚜렷하게 음영을 드리우는 빛이 그의 얼굴을 이루는 여러 가지 선을 타고 미끄러졌다. 이도하는 잠깐 홀린 듯 그를 구경하다가, 어떤 뿌듯함에 차올랐다. 그냥 기다리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고, 그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에 해가 비추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런 기회가 또 얼마나 있을지 모른다.
…둘 다 하면 되지. 이도하는 꽤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모양 좋은 입술 위로 입술을 겹쳤다. 따뜻하고 매끄러운 입술이 닿자 작은 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도하는 정말 거기까지만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렇게 하면 시오한도 깨어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오한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도하도 좀 더 욕심이 생겼다. 아니 그래도 사람이 자는데 이건 좀… 하는 자제심이 아주 조금 고개를 들고 그를 말렸다.
이도하는 그냥 욕심껏 다시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을 때마다 흡족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결국은 흡족하고 아쉬워서 한 번 더, 조금 더. 그렇게 하다 보니 이도하는 어느새 수십 번이 넘는 입맞춤 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만족하자 그는 이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도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는 왕자가 아니고 시오한도 공주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사람이 일어날 만도 한데.
“…시오한.”
이도하가 시오한을 불렀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현실감 없는 얼굴이 마냥 새하얗기만 해서 모르는 사람이었더라면 죽은 게 아닌가 코 밑에 손을 대어봤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도하는 그의 계약자였고, 계약주의 생사 정도는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오한.”
그래도 한국인이 예의가 있지. 이도하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여전히 그는 미동도 없었다. 이도하도 슬슬 좀 웃기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시오한.”
이도하가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입술이 거의 닿을 듯 지척이었다. 이쯤 하면 움찔이라도 할 줄 알았던 시오한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이건 진짜 죽었다고 해도 믿겠는데. 감탄하는 지경에 이른 이도하가 슬쩍 몸을 떼어냈다. 짓궂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도하도 혈기왕성한 24살이었다. 괜한 장난을 쳤다가 감당할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리면 탓할 사람도 없다. 이도하는 아직 거기까지는 확신이 없었다.
“잘 있어, 시오한. 깨면 부르고.”
이도하가 시원스레 말했다. 그리고 내려서려는데,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시오한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쳐다보자, 보란 듯이 조금 뒤척인다. 난 아직 다 깨지 못했지만 이제 일어나려고 한다. 그치만 졸리고 잠기운이 남아 있다. 뭐 그런 것들을 단번에 표현하는 수준급의 연기였다.
이도하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으려 단단히 얼굴에 힘을 주어야 했다. 시선을 돌리며 슬픈 생각을 해보려는 사이 시오한이 한 번 더 뒤척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큰 동작이었다. 은근슬쩍 팔을 벌리면서도 고개는 아주 바르다. 입 맞추기에는 딱 좋은 자세였다. 기가 차면서도 웃기다. 이도하는 결국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하찮을 수가!
“진짜 이제 아주 작정을 했네.”
서슴없이 하찮아지는 황제의 작태에 이도하는 그냥 져주기로 했다. 대제국의 황제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쯤은 해 줘도 될 것 같았다.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이도하가 얌전히 대기 중인 시오한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음, 잠자는 시오한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마침내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속눈썹이 길어서인지 누구에게든 당연한 그 별거 아닌 움직임이 유독 시선을 끌었다. 꼭 펼쳐지는 것 같았다. 완전히 드러난 황금색 눈동자는 쨍하게 비추는 해에 찡그려지면서도 이도하를 담는 순간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러면 안 돼, 화이람.”
시오한이 말했다.
“뭘.”
“잠자는 황제를 희롱했잖아.”
“희롱….”
흥미로운 단어선택에 이도하가 까딱 눈썹을 들었다.
“어쩔 건데.”
“책임을 져야지.”
시오한이 사뭇 점잖게 말했다. 이도하가 코웃음을 쳤다.
“울든가.”
“……”
이런 반박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시오한은 허를 찔린 얼굴이었다. 잠시 후에 그가 물었다.
“울면 돼?”
“……”
이번에는 이도하가 말을 잃었다. 장난으로라도 해봐, 하면 시오한은 정말 그럴 것 같았다.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당장에 주르륵 울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면 그림이 정말로 이상해졌다. 이도하는 인정했다. 시오한은 아직 저보다 한 수 위다. 언제나 예측 가능한 범위를 훌륭하게 넘나들었다.
“계약주가 자기 계약자를 협박하네.”
“협박이라니. 애원이지.”
태연한 대답에 이도하가 픽 웃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될 일이야?”
“그럼.”
“어쩌라고?”
시오한이 팔을 벌렸다. 수줍게 눈을 내리깔며 그가 턱을 들었다. 나 참. 이도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을 일인가. 날 때부터 태손으로 태어난 남자가 어디서 이런 걸 배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도하가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시오한이 그를 감싸 안았다. 부러 도장을 찍듯 콱 누르자 시오한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그렇게 아침부터 미적거렸으니 시오한은 당연히 일반적인 기침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간단한 아침을 들고 들어오는 궁인들의 표정이 몹시도 미묘했다. 그러나 프로답게 그들은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처럼 시오한과 이도하의 유치한 말장난들을 무시했다.
시오한이 씻고 의관을 다 정리하는 동안 이도하는 정말 할 일 없는 고양이처럼 빈둥대며 침전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한가득 꽂힌 책도 여러 권 들춰보았지만 읽을 만한 흥밋거리가 생기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국제 정세, 외교, 정치, 전부 그런 책들로 한가득이었다.
그럴 만하긴 하지만 참 따분한 책장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도하는 책상을 훑었다. 현자의 탑. 낯이 익은 단어에 이도하가 겹쳐진 문서를 펼쳤다. 지하 도박장과 연관 지은 관련 보고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