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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50화 (50/250)

50화

“다 가지라며.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하라며. 돌려주지도 말라며. 내가 뭐라고 그런 말을 하냐. 뭘 믿고.”

이도하가 좀 뚱한 얼굴로 말했다. 황제 말고 달리 되고 싶었던 게 있었냐는 질문에 시오한은 뭐라고 대답했는지 끝내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이도하는 그냥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시오한은 이미 대답을 한 셈이었다. 시오한도 이도하가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님은 알고 있어 그냥 웃기만 했다.

이도하가 그 얼굴을 빤히 보더니, 갑자기 달려들었다. 술잔이 풀밭 위로 엎질러졌다. 거의 반쯤 시오한을 덮친 이도하는 그의 양 뺨을 부여잡았다.

뺨이 눌려봤자 시오한은 시오한이었다. 아씨, 이래도 잘생겼네. 이도하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속마음을 속으로 못 하게 되고. 시오한이 제 안에 하나하나 기록을 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이도하가 말했다.

“그래. 당신은 늘 이렇게 웃기만 하니까.”

“어떡하겠어.”

“내가 귀엽냐?”

“……”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시오한은 잠시 대답하지 못 했다. 그의 계약자는 분명 낯부끄러운 걸 아주 싫어하는 듯 했지만, 또 생각보다 꽤 솔직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도하라도 제정신이었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아무 표정이 없어 냉랭해 보이기까지 하던 이도하가 픽 웃었다.

“난 당신이 귀엽거든.”

말문을 잃었던 시오한이 곧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화원에 퍼진 웃음은 이도하의 얼굴에도 번졌다. 평소보다 조금 더 풀린 얼굴이 부드러웠다. 시오한이 제 뺨을 잡은 이도하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

“그럼 망한 거랬는데….”

이건 속마음이다. 속마음에 대답을 해서는 안 되니 시오한은 못 들은 척했다.

“시오한. 내가 말이야.”

“응, 화이람.”

“원래는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 왜 그러냐, 왜 그랬냐. 아, 그건 진짜 귀찮잖아.”

모든 행동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이 그렇게까지 논리적인 생물이었다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도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은 대체로 거지같고, 가끔 아름답다. 이도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 편하다. 이도하는 남들한테 큰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궁금증도 별로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시오한에게는 자꾸 이유를 묻게 되었다.

그리고 시오한은 단 하나로 그 모든 질문에 답했다.

‘그대니까.’

그건 대답을 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다.

“모르겠어. 알기 싫어졌으니까 말하지 마.”

“응.”

“별로 이해는 안 가는데… 그냥 그걸로 하자.”

그냥.

“그냥 그걸로 하자….”

중얼거린 이도하가 푹, 고개를 떨어트렸다. 시오한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른 이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뺨에서 떨어진 팔이 시오한의 어깨 위로 걸쳐졌다가, 그를 끌어안았다. 시오한이 이도하의 머리 위에 턱을 얹었다.

본인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시오한이 지켜본 이도하는 포옹을 좋아한다. 덤덤한 태도가 차가워 보여도 조금이나마 마음을 주면 끌어안는 것을 개의치 않아 했다. 이도하는 분명 포옹 장벽이 낮았다. 그리고 취해서 자제력이 사라진 이도하는 거칠 것이 없었다.

“나는 그냥 고양이처럼 당신 옆에 비비고 앉으려고. 그러니까 내가 숨만 쉬어도 당신은 날 귀여워 해.”

“그럴게.”

술 취한 이도하에게 시오한은 토를 달지 않고 고분고분 답했다. 그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 따지면 사실 이도하 본인보다 계약주인 시오한이었다. 이도하가 특기를 쓰는데 직접적인 마력을 제공하니 그보다 더 잘 알 사람이 없었다. 그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빤히 아는데, 그런 사람이 술에 취해서 거침없어지고는 하는 게 고작 포옹이다. 거기다 자기를 귀여워하란다.

시오한이 이도하를 마주 안았다. 두 사람을 지탱하고 있던 팔이 다른 일을 하니 속절없이 풀밭에 나동그라졌다. 이도하는 몸에 힘이라고는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건전지 빠진 인형처럼 풀어져 있었고, 그렇게 되니 그는 완전히 시오한을 덮게 되었다. 두 사람은 키도 반 뼘 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긴 다리가 엉켰고, 배가 밀착되었다. 깊게 이도하를 끌어안은 시오한이 그의 검은 머리칼 위로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선 절대로 놓지 않을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오한은 이도하를 꼭 안은 채 미동도 없었는데, 정작 안긴 이도하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새 이도하의 손은 시오한의 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꾹꾹 누르기도 하고, 문질러 보기도 했다. 감탄과 미련이 섞여 있었다. 이게 배야 뭐야… 이도하가 또 다시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시오한은 인내심을 다 해 그가 만지는 대로 내버려두었으나, 이도하의 손이 옆구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시오한은 진심으로 이도하가 절 가지고 무엇을 해도 괜찮았지만 이건 정말 곤란했다. 결국 시오한이 말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갈라졌다.

“…화이람. 만지지 마.”

“왜.”

이도하가 당당하게 반문했다.

“내 거잖아.”

“……”

훌륭한 반박에 시오한은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부질없는 저항에 불과했다.

거침없어진 이도하의 손은 세 겹의 정복이 거추장스러운 듯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만지작대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도의심으로 옷을 들추지는 않았다. 갈라진 근육 사이를 만지고 싶었는지 이도하는 유독 손에 더 힘을 줄 뿐이었다. 꾹 누르며 움푹 파인 곳을 따라 훑자 시오한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꼬우면 당신도 만지던가.”

팔꿈치로 몸을 받치고 일어난 이도하가 빤히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눈 떠. 이도하가 말했다. 그 사이에도 손가락으로는 우뚝 솟은 시오한의 울대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정말 쉬지도 않고 빈틈없었다.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시오한이 눈을 떴다. 조명이 번진 밤 속에 황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도하가 만족스레 시오한의 눈가를 쓸었다.

“화이람. 그러면… 참을 수 없을지도 몰라.”

“안 참으면 되지.”

뭐가 대수냐는 듯한 대꾸였다. 아주 시원시원했고, 그래서 오히려 좀 허탈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절 내려다보는 이도하의 새까만 눈을 마주하고 있던 시오한이 이미 지나간 바람처럼 옅게 웃었다. 시오한이 손을 들었다. 손끝은 닿을 듯 말 듯 이도하의 이마를 스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눈썹 뼈 위를 훑고, 이도하의 뺨을 감싸 안았다. 이도하가 나른히 웃으며 그 손에 기대었다.

“…잊으면 안 돼, 화이람.”

시오한이 그를 당겼다. 부드러워 저항하려고 하면 충분히 저항할 힘이었다. 그러나 이도하는 순순히 고개를 내렸다. 코끝이 스쳤다. 홍채의 기이한 무늬까지 눈에 들어올 거리였다. 이도하는 태양을 보고, 시오한은 밤을 보고 있었다. 둘 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대가 허락한 거야.”

입술이 닿았다. 깃털이 간질이는 것처럼 스쳤다. 숨이 섞여 들었다. 조금 더 깊게 맞닿았다가 이내 머금고 만다. 감질 나는 입맞춤이었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입술을 깨물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휘었다.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방금 전의 입맞춤과는 비할 바도 없었다. 성급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깊었다. 시오한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모든 것을 다 맛보려는 사람 같았다. 아주 조그만 틈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집요하고 신중했다. 완벽하게 입술을 탐한 뒤에야 혀를 섞었다. 이도하가 숨을 헐떡였다. 시오한은 고개를 비틀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멱살을 그러쥐며 더 몸을 붙였다. 달뜬 심장소리가 한데 겹쳤다. 황금색 머리칼 사이로 그의 손이 엉켜들었다. 조금 더 입 맞추고 싶은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영원히 이대로 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완전히 그를 삼켜버리고 싶었다. 마음은 초조해지는데 마음처럼 멋대로 굴 수 없으니 몸이 달아올랐다. 이도하가 얇은 신음을 흘렸다. 시오한이 달래듯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쨍그랑-! 가장 가까이에 있던 등이 요란하게 터졌다. 이도하가 번쩍 눈을 떴다. 겹쳐진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이도하의 눈에는 형형한 섬광이 돌고 있었다.

이도하는 숨을 몰아쉬다 시오한의 이마에 제 것을 맞대었다. 이도하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특기를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이도하의 또 다른 특기라고 할 만 했으나, 지금은 끓는 물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괜찮아, 화이람.”

시오한이 입맞춤을 쏟았다. 파랗게 빛나던 이도하의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한 번 깜빡였을 때는, 다시 완전한 까만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신… 지금. 당신이….”

이도하가 작게 신음했다. 혼란에 찬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시오한이 다정하게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제 제법 익숙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감정이 물감처럼 섞여들며 이도하를 차분하게 다독였다.

“괜찮아.”

이도하가 시오한의 얼굴을 감쌌다. 지그시 입술을 내리눌렀다가, 또 몇 번에 걸쳐서 수차례 입을 맞추었다. 어느새 웃음이 그 사이사이로 잘게 쪼개졌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웃음소리가 빈자리를 채웠다. 방금 전에만 해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던 것이 거짓말처럼 마냥 기분이 좋아졌고, 그래서 그냥 웃고 싶었다.

“미치겠다, 진짜…….”

입술을 미끄러트린 채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이도하가 나른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오한의 뺨에 비비듯, 살을 맞대며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

시오한은 굳이 그를 불러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를 더 보듬어 안으며, 이도하의 새까만 머리칼 위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춘 시오한은 입술을 떼지 못한 채 나지막한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Chapter 3. 시쁜나무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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