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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49화 (49/250)

49화

“대단한 사람이었던 건 틀림없지.”

“그런데 왜.”

“자진했어.”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다.”

잠깐 사이에 벌써 두 명이 자살로 명을 달리했다. 한 명은 제 계약주의 아버지고 또 다른 한 명은 그 아버지가 사랑한 사람이란다. 몰아치는 서사에 이도하가 앓는 소리를 했다.

“왜?”

“글쎄… 무슨 생각이었을까. ‘신을 곁에 둠으로서 감히 이리스티리움의 앞날에 흠을 만들지 마십시오. 폐하와 제국의 앞길에 영원한 홍복만이 있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그랬다지.”

“유서로?”

“편지가 아니었을까?”

유서나 편지나. 그게 그 말이지만 또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다.

“내궁의 주인인 황후는 견고했고, 적통의 태자까지 두고 있었으니 황제가 총애하는 여인을 후궁으로 들이는 것쯤은 별일 아니었지. 평민 출신이라는 게 기사 서임에는 장애물이지만 후궁이 되기에는 오히려 이점이기도 하고. 하지만 부황은 그녀를 후궁으로 들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부황은 그녀를 두고 한낱 ‘총애’라는 단어조차 쓰고 싶지 않아 했고… 무엇보다 후궁이 되면 검을 놓아야 하니까.”

그건 인간 승리라고 할 만한 과정을 거쳐 기사가 된 여인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을 테였다. 하지만 후궁이 아닌 기사와 황제의 관계는 명백한 부정이었다. 그건 명백한 스캔들이고, 황실에 ‘흠’이 될 일이었다. 오랜 정복 전쟁 끝에 제위를 이어받아 내실을 다져야 하는 황제에게,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정통성을 갖추고 있던 태자에게.

“그때 나는 고작 9살이었어. 부황이 모후에게 선위와 수렴청정 이야기를 꺼낼 즈음이었을 거야.”

서임식에서 수여받았던 검으로 그녀는 심장을 찌르고 자진했다.

‘신을 곁에 둠으로서 감히 이리스티리움의 앞날에 흠을 만들지 마십시오.’

과연 선황의 아들인 시오한이 대단하다고 할 만하다.

“…그래. 진짜 대단한 사람이네.”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는 거의 저문 노을이 그 웃음에 아롱졌다. 붉은빛이 씁쓰레하다. 시오한이 그녀에게 인간적으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만한 미소였다. 시오한이 이처럼 타인에게 다분히 인간적으로 감정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부황은 꼬박 3일 동안 홀로 장례를 치르고 다시 정무를 보았지.”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이야긴가 했더니, 이제 이해가 갔다. 선황은 제 아들에게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도하는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설마 당신 결혼도?”

“맞아. 부황의 은혜야. 동생을 낳아줬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황후 소생의 적자가 하나만 더 있었더라도 한결 쉬웠을 것이라며 시오한이 가볍게 웃었다. ‘동생을 낳아줬더라면’ 이라는 건 동생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둔 말이었다. 그러나 후궁 소생의 왕자들은 아예 형제로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말을 하는 시오한은 산뜻하기만 했다.

어쨌든 다 실없는 소리였다. 후궁 소생의 왕자들은 시오한과 나이 차이가 고만고만했다. 황실에 시오한과 왕자들뿐인 데다가 시오한이 당시 9살이었다는 얘기는 그 이후로 황제가 자식을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도하가 혀를 내둘렀다. 이쯤 되니 이도하는 선황이 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 어머니는?”

하하. 시오한이 웃었다.

“부황과 모후의 혼인은 대체로 국혼이 그러하듯 정략혼이었어. 두 분 사이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신뢰에 더 가까워. 황제와 황후의 관계로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였지. 모후에게 사랑이라고 하면 당신이 기르셨던 화초를 더 사랑하셨을걸. 부황을 보며 나약하다 혀를 차셨던 분이야. 성정이 칼과 비슷했지.”

시오한은 제 어머니와 사랑이라는 단어를 같이 두는 것만 해도 재미있는 듯했다. 선황후의 아버지일 상서령을 떠올리면 이도하도 좀 알 것 같았다. 딸을 무밭에서 쑥 뽑아내지는 않았을 테니 칼 같았다는 그 성정은 아버지에게서 온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일이 아무렇지 않았을 리는 없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처럼 선황의 죽음은 선황후와 시오한에게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시오한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인생 최대의 고비와 역경이 수능이었던 이도하는 헤아려 보기 어려웠다.

그 사이에 궁인이 술을 가지고 돌아왔다. 술과 술잔, 마른안주까지 예쁘게 들고 온 궁인이 여전히 풀밭에 드러누워 있는 황제와 그의 계약자를 보고 잠시 주춤거렸다. 이도하는 마침 술이 간절했다. 읏샤- 일어난 그가 궁인에게서 술을 받아들었다. 시오한이 당연하다는 듯 이도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 달라는 뜻이다.

거의 반사적으로 재깍 그 손을 잡을 뻔한 이도하가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대전에서도 그랬다. 아무리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이건 옳지 않다. 이도하는 제 고분고분함에 좀 반발심이 들었다. 고작 콩나물 같은 자존심임을 알지만 그래도 이도하는 챙기고 싶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복근으로 따지면 저보다는 문도 썰고 사람도 써는 시오한이 더 단단할 텐데.

사뭇 해맑게 내밀고 있는 손을 지나쳐 이도하가 시오한의 배를 꾹 눌렀다.

“?!”

꽤 힘을 주어 눌렀고, 느닷없이 누운 채로 배를 눌린 시오한은 생리적으로 숨을 들이키며 재깍 몸을 일으켰다. 허억- 인간적인 소리에 이도하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화이람….”

“오….”

배를 부여잡은 시오한이 아기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그러나 웃음도 잠깐이고, 이도하는 제 손을 보며 충격과 감탄에 휩싸여 있었다. 옷이 못해도 세 겹을 될 텐데 이게… 예상은 했지만, 저 보기만 해도 결벽증이 생길 것 같은 정복 너머로는 정말 상상도 못할 감촉이었다. 이도하의 손이 움찔했다.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이도하는 슬그머니 제 배도 한 번 만져보았다.

“…술 먹자.”

혼자 기분이 상하고 만 이도하가 술병을 땄다. 배를 부여잡고 있던 시오한이 황당해하다가 입술을 꾹 물더니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왕관과 화려한 정복의 효과로 제법 엄숙해 보였지만 어깨가 떨리고 있어 별 보람은 없었다. 그사이 이도하가 병째로 술을 꼴꼴 들이켰다. 들이부을 생각까지는 아니었고, 그냥 병째로 마시고 싶은 기분에 그랬다.

서늘한 생김새와 매사에 무심한 태도 탓에 이도하는 양주 꽤나 마셔봤을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인소더블이라는 이름도 한 몫을 했다. 사람들은 그를 꽤 대단하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도하도 떡이 되어 집에 들어가면 등짝이나 맞는 대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마셔본 술이라고는 소주와 맥주와 둘을 합한 소맥, 그리고 종류별 막걸리뿐이다.

이도하의 술 상식은 고작 ‘술이 예쁜 갈색일수록 좋은 술이다’ 정도였다. 황제인 시오한이 마시는 술이니 뒤끝도 없을 것이다. 해서 이도하는 용감할 수 있었다.

“화이람!”

웃다가 깜짝 놀란 시오한이 술병을 낚아챘다. 이도하가 눈만 꿈뻑거리더니 물었다.

“…이거 뭔데 달아?”

그런 ‘좋은 술’은 대체로 도수가 높기도 하니 이도하는 목구멍이 불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술에 물 탄 듯 목구멍 너머로 쑥쑥 들어갔다. 술이 꼭 제 발로 목구멍을 헤쳐 들어가는 것처럼 부드럽기만 했다. 심지어 끝 맛은 은근히 달달하기까지 했다. 병나발은 문제도 아니고 두 병도 너끈할 것 같았다.

“꼬, 꽃술이야. 화이람. 여기 봐. 괜찮은 거야?”

시오한은 놀라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후, 이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이도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시오한 답지 않게 갑자기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나 싶을 뿐이었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손에 들린 술병을 잡았다. 시오한은 조금 버텨보았지만, 이도하가 빤히 쳐다보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는 도무지 이도하에게는 저항할 수 없었다. 시오한이 조심스레 이도하를 지켜보았다. 또 병째로 꼴깍꼴깍 들이키면 재빨리 막을 생각이었다.

이도하는 술병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꽃술이라더니 정말 달달한 냄새가 올라왔다. 꼭 시오한 같네. 혼자서, 그러나 또 다 들리게 중얼거린 이도하가 다시 술병을 내밀었다. 아무렴 황제인데 풀밭에서 병나발을 불게 하면 안 되지, 하며. 당당하게 술잔을 내민다.

“화이람, 내가 누구야?”

“장난 치냐.”

“…….”

시오한이 보기에도 이도하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는 했다. 눈도 풀리지 않았고, 손가락이 풀린 것도 아니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멀쩡해 보였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도하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황실의 술 중에 저렇게 병째로 꼴꼴 들이붓고도 멀쩡할 수 있는 술은 없었다.

이도하를 유심히 지켜보며 시오한은 아주 조금만 술을 따라 주었다. 술잔에는 이미 커다란 얼음이 들어앉아 있었다. 동그란 얼음을 타고 조르륵 흘러내린 술은 밑바닥만 간신히 채웠다. 이도하가 제 눈높이까지 술잔을 들어 올렸다. 꼭 얼음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관찰하는 양 한참을 지켜보더니 이내 달각달각 술잔을 흔들기 시작했다.

“…화이람, 그건 왜 그러는 거지?”

이도하는 시오한을 빤히 보며 손으로는 연신 술잔을 흔들고 있었다.

“왜긴. 이만큼밖에 없으니까… 술이 늘어나야 하잖아.”

이도하가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 대꾸했다. 버젓이 술병이 눈앞에 있는데 술을 더 따를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간신히 웃음을 삼킨 시오한이 맞장구를 쳤다.

“…응. 물론 그렇지.”

“이리 줘. 자작하면 앞사람 재수 없다고 했다.”

술병을 가져간 이도하가 시오한의 잔에도 술을 따라주었다. 시오한이 내내 신기하게 저를 지켜보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 술을 따르는 데만 아주 열중해 있었다. 술에 취해도 전혀 취한 티가 나지 않고,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못 하게 되고. 시오한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쨘.”

이도하가 술잔을 내밀었다. 시오한은 술이 아주 꽉 들어찬 제 잔을 내밀면서도 이도하를 보고 있었다. 그가 조금만 덜 취했더라면 그 눈빛이 꼭 감회에 젖은 것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주 찰나였고, 혼자 취한 줄 모르는 이도하는 술잔만 쳐다보고 있었다.

쨘, 두 사람은 술잔을 부딪쳤다. 노을은 이미 한참 전에 다 저물었고 하늘은 새까맣게 밤이 되었다. 별이 총총 뜬 하늘에는 가는 달이 걸려 있고, 어느새 화원에도 예쁘게 조명이 켜져 있었다. 꽃 내음은 한층 더 진해졌다. 낮보다는 조금 더 서늘했다. 어디선가 밤벌레가 찌륵찌륵 울었다.

“당신은 당신 아버지를 닮았나보다.”

이도하가 말했다. 술에 거의 입술만 적신 시오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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