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시오한은 가만히 누워 늘 그렇듯 은근한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이도하는 미끄러지듯 스르륵 내려왔다가, 그의 옆으로 풀썩 저도 함께 누워 버렸다. 시오한이 웃음을 흘렸다. 몇 가닥 풀이 떠올랐다 금세 바람에 휘날려 사라졌다. 차갑고 푹신한 풀밭에 등을 대니 순식간에 온몸이 시원해졌다. 풀과 꽃 냄새가 가득한 바람이 선선하다.
“왜 여기 있어?”
화원이었다. 사방으로 커다란 덤불에 무더기씩 핀 푸르고 붉은, 또는 흰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저녁노을이 짙게 가라앉은 하늘은 다채로운 붉은 빛이었고, 빛이 닿은 모든 곳이 붉었다. 아주 짙은 노을이었다. 바다가 뒤집어진 것처럼 흐르는 구름 너머로는 푸른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가라앉은 해의 반대편으로 이제 떠오르는 달이 마주 보고 있다. 이도하는 선선한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짙은 꽃 내음조차도 푸르렀다. 시오한은 답이 없었고, 이도하도 그냥 말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나 보지. 꼭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 집 노을 잘하네.”
이도하가 실없이 말했다.
“잘하지.”
시오한이 또 그걸 받았다.
“쿠션이 아니라 술을 가져올걸.”
마천루 같은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하늘뿐이었다. 그 밑으로 옹기종기 도토리 같은 건물들이 들쑥날쑥 선을 만드니 꼭 손으로 그려놓은 것 같다. 옆으로 붉게 물든 새하얗고 거대한 성이 웅장하게 서 있으니 명소가 따로 없었다. 하기야, 어느 나라든 궁은 원래 명소다. 이도하가 아쉽게 혀를 찼다.
시오한이 손을 까딱였다. 어디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궁인이 다가왔다. 궁이 보통 큰 것도 아닌데 언제 술을 가져오려나 싶어 말리려던 이도하는 아무래도 술이 생각나 내버려 두었다. 누운 시오한의 명을 듣기 위해 궁인은 거의 엎드리다시피 엉거주춤 허리를 접어야 했다. 언제 어느 때든 평정을 지켜야 하는 머리와 어쩔 줄을 모르는 몸이 부조화를 일으켜 궁인의 얼굴이 우스꽝스러워졌다.
아니, 그래도 사람이 일을 하는데 웃으면 안 되지. 이도하는 웃지 않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입술을 꽉 물고 있는 동안 궁인이 몸을 일으켜 사라졌고, 이도하가 뒤늦게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 궁인도 극한 직업.
이도하는 손을 더듬어 흐트러진 시오한의 머리칼을 감아올렸다. 손끝에 잡고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없어졌다. 오늘은 생각도 좀 그만하고 싶었다. 멍하니 하늘만 보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도하가 돌아보았다. 당연한 듯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면 이도하는 다른 곳을 보는 시오한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언제든 그는 이렇게 시선을 마주해 왔다.
“……”
붉은빛이 스며든 시오한의 얼굴은 영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더 지켜보게 되었다. 그냥 기다려보고 싶었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까지. 이도하는 시오한이 절 기다린다는 걸 알았다. 서로가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우스운 것 같아 이도하는 웃음을 흘렸다. 시오한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가 눈을 깜빡였다.
“됐다.”
무엇이? 시오한이 눈으로 물었다. 이도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두 번째 전봇대까지 숨 참아보기. 시오한이 눈 감을 때까지 기다려 보기…. 초등학생 때나 하던 그런 유치한 혼자놀이였다.
“시오한.”
“응.”
“당신은 하고 싶었던 거 없어?”
이도하가 대뜸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황제 말고 말이야.”
이도하로 말하자면 그는 아무것도 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도하는 계약자가 되든 안 되든 한 끗이 있는 셈이었다. 하고자 하면 뭐든 할 수 있을 테니 딱히 간절한 적도 없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뭐 그런 마음이었다. 그의 부모님도 제 자식이 배를 곯을 일은 없으리란 걸 알아 그런 이도하를 내버려 두었다.
이도하는 시오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제가 아니었더라도 그 역시 하고자 하면 뭐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흠. 시오한은 흥미로워 보이는 낯이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대가 보기엔 어때. 내가 황실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뭘 하고 있었을까?”
“아, 이걸 질문으로 받네.”
그러면서도 이도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저를 보는 시오한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뭔가 참신한 걸 떠올리려고 해도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내 세상이었으면 연예인이지. 말해 뭐 해. 의사를 해도 연예인, 노래를 했어도 연예인, 변기를 뜯고 있었어도 당신은 연예인으로 끝났을걸. 티브이 나와서 숨만 쉬고 있어도 얼굴 잘한다고 한다는 데 손목을 건다. 장담하는데 당신 보겠다고 죽겠다는 사람도 있었을 것.”
음. 그건 별로 좋지 않다. 그냥 한 말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럴 가능성이 꽤 크다. 그래도 연예인 시오한을 상상하는 건 퍽 재미있었다. 화장품을 들고 나오거나, 수십억씩 하는 차를 멋있게 운전한다거나, 커피를 들고 나오는 시오한. 백화점에 크게 걸린 시오한의 사진, 시오한 등신대. 그럴듯하다. 외국 모델들이 많이 등장하는 향수 광고도 찰떡일 것 같다. 셔츠를 반쯤 푼 시오한이 여자와 함께…. 이건 재미없다.
“그대의 세상.”
시오한이 되뇌었다. 그는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한 팔을 접어 베고 누운 모습이 편안해 보이고, 또 조금 생경했다.
“여기서는… 모르겠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고 해도 여기는 내가 잘 모르니까. 내 세계에서는 그랬겠지.”
내 세계. 이도하도 되뇌어 보았다. 정말 시오한이 그의 세계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혹은 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우리가 만날 일은 없지 않았겠어?”
당신은 연예인. 나는 일반인. 이도하는 백화점에 걸린 시오한의 광고판을 보며 와, 겁나 잘생겼네 하고 지나가는 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저가 이곳에 태어났더라면 그는 황제, 저는 신하 내지 백성이었을 테니 연예인보다도 만날 확률이 적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만났기 때문에, 이렇게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시오한을 보고 있던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시오한은 제게 다가오는 손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허공에서 잠깐 멈칫한 손이 시오한의 뺨을 쿡 찔렀다. 우아한 곡선이 일그러지며 뺨이 말캉하게 들어갔다. 뗐다가 한 번 더, 또 뗐다가 다시 한 번 더. 콕콕 찌르는데도 시오한은 말릴 생각도 없이 웃기만 한다. 내친김에 쿡 찌르고 쭉 밀어보기까지 했다. 뽀얀 뺨은 보기에만 말랑거릴 것 같지 살이 없어 별로 밀리는 것도 없었다. 그래도 조금 귀여워진 것 같다. 동상, 그림, 이런 게 아니라 사람 같다. 이도하가 픽 웃었다.
“이런 건 못 했겠지.”
그가 연예인이었다면 가까이 가기도 전에 경호원들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신하거나 백성이었다면 신체가 레고처럼 산산조각으로 오체분시 됐을 죄다. 이도하는 끌려 나가는 절 상상하며 웃었지만 시오한은 좀 싫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라고 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황제의 뺨을 쿡쿡 찌르며 조몰락거리는 건 감히 황후도 하지 못할 죄이기는 했다. 객관화 끝에 시오한이 말했다.
“상상하기 싫은걸.”
“그래서 당신은 하고 싶은 게 있었냐고.”
시오한은 그때까지도 제 뺨에 장난을 치고 있는 이도하의 손을 잡았다. 이도하가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듯 그 손을 만지작거리며 시오한이 대답했다.
“선황도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어.”
“당신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이도하를 따라 아버지-라고 발음해 본 시오한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단어를 처음 말해 보는 사람처럼 신기해 보였다. 이도하는 시오한의 아버지, 이리스티리움의 선황에 대해서는 성군이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오즈의 역사책을 몇 번 뒤집어보고 나니 그냥 역사책에 등장한 황제였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아버지라는 친근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시오한과 선황이 어떤 부자 관계였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황제 말고 달리 하고 싶은 게 있냐니. 잉태되기를 황제가 되기 위해 잉태되어 태어난 아들에게 물을 법한 질문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시오한은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유일한 적장자였다. 어차피 시오한이 아닌 대안은 없었다. 이게 다정한 질문인지 잔인한 질문인지 이도하는 헷갈렸다.
“화이람, 선황이 붕어하셨다는 걸 알아?”
“알지.”
“대외적으로는 병으로 떠나셨다고 알려져 있지만 선황은 자진했어.”
“…뭐?”
이도하가 귀를 의심했다. 그는 지금의 얘기가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다. 공손히 일어나 앉아야만 할 것 같은데 여전히 제 손을 만지작거리는 시오한은 너무도 태연해 보였으므로, 귀를 의심한 다음에는 눈도 좀 의심할 지경이었다.
“독을 마시고 편안하게, 잠든 것처럼 가셨지. 도무지 돌아가신 것 같지가 않아 시종장이 몇 번이나 깨워보았다고. 모후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모든 걸 정리해 차분히 국상을 준비했어. 사실 나도 별로 놀라지는 않았어. 가셨구나, 했을 뿐. 선황은 쭉 내가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날… 그러니까 당신께서 죽을 수 있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거든.”
선황이 쭉 죽고 싶어 했다는 말인가? 왜? 이도하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보았을 시오한이 말했다.
“그만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고 싶었던 거지.”
그런데 그게 선황후나 시오한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별수 없었다. 다른 세계고, 황실이다. 일반적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멀쩡한 자식과 아내를 두고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가 이도하에게 별로 아름답게 비춰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하는 시오한에게는 어떤 감정의 편린도 엿보이지 않았다. 이게 흔한 황실 가족사 감성인지, 그도 아니면 시오한과 선황 사이의 어떤 관계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시오한이 이리 담담하게 말하고 있으니 이도하도 그냥 그렇게 받기로 했다.
“그 사람은 죽었단 말이네.”
“아주 오래전에. 기사였어.”
선황이 사랑했던 사람. 시오한이 말했다.
“평민 출신이었고.”
이리스티리움은 기사 서임에 아주 까다로웠다.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공을 세우는 게 아니라면 노이렌슈에드에서 학부 과정을 수료해야 하는데 평민은 노이렌슈에드 입학 자체가 어려웠다. 특히나 기사 학부에 평민이 입학하는 건 콧구멍에 수박이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언제나 유별나게 특출 난 사람이 있는 법이고, 안 되는 것 같은 걸 해내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녀가 그런 경우였다. 부모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노이렌슈에드의 장학생이 되었고, 과정을 수료해 서임까지 받아 궁정기사단에 입단했다. 인간 승리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