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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47화 (47/250)

47화

“오즈에 남은 천 년 전의 기록이 우르슬라의 글인가?”

김윤혜가 이도하를 보았다. 무슨 수를 써도, 계약 없이 특기자들은 오즈에 머무를 수 없다. 오즈에 남은 기록이 우르슬라의 글이라면 순서가 맞지 않았다. 계약을 한 뒤에 우르슬라가 무슨 이유에서건 계약과는 달리 맹약을 생각해 냈다면 우르슬라는 맹약을 하지 않은 셈이고, 맹약을 한 뒤에 기록을 남겼다면 맹약의 의미가 사라진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계약주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약속’을 지키지 못한 셈이었다.

왜 막지 못했을까.

“알아볼 수 있겠어요?”

“…알아봐야지.”

“그래요. 무임승차 없기.”

“조 과제냐.”

“원래 대학이 사회의 축소판이랬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이도하씨. 갑자기 왜 이렇게 열정적이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별로 안 알고 싶어 하더니.”

이도하가 놀라 되물었다.

“어제?”

“체육관. 어제였잖아요.”

“벌써 하루가 지났어?”

해가 저물고 있기에 이도하는 고작 몇 시간 쯤 지난줄 알았다. 설마하니 하루가 지났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도하는 좀 낭패스러운 기분이었다. 말도 안 하고 외박을 한 셈이었다. 물론 이도하의 부모님은 오히려 이도하보다도 계약에 대해 상식적인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아들이 말없이 하루쯤 들어오지 않더라도 소환되었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니 이도하는 묘한 찝찝함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초조해졌다. 제 딴에는 잠깐이라도, 시차가 이렇게 뒤죽박죽이니 오즈에서는 지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지 모른다. 이도하가 돌아간 걸 시오한이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이도하씨 소환됐었어요? 진짜 자주 부르네. 불러서 대체 뭐해요?”

“…소환은 안 했는데, 내가 갔어.”

“네?”

“나 혼자 갔다고. 시오한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무슨 말이에요? 그게 돼요?”

“되더라.”

“헐.”

해 봤는데 되더라. 김윤혜는 6년 동안이나 이도하를 봐 온 만큼 이도하의 이 터무니없는 말에 익숙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 놀란 것 같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김윤혜가 제 입을 막았다. 김윤혜가 또 재수없네, 쯤으로 반응할 줄 알았던 이도하도 놀랐다. 물론 셀프 소환, 이도하가 그렇게 부르기로 한 이 ‘알아서 찾아가기’는 이도하도 당황스러울 정도였지만 연구원인 김윤혜가 이렇게 놀라는 걸 보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김윤혜씨도 들어본 적 없지?”

“없죠! 뭐야, 여기서 먼저 간섭해 들어간다고요? 어떻게 그게 돼요? 맹약이라서 되는 거예요?”

김윤혜가 속사포처럼 다다다 물었다.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음, 조금 물러선 이도하가 대답했다. 이렇게 말하기 정말 민망했다.

“몰라.”

“뭐요?”

“모른다고.”

익숙한 대화였다. 이쯤에서 벌떡 일어난 김윤혜가 제 멱살을 잡는다고 해도 이도하는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이 타이밍에 제가 시오한에게 그렇게 했으니.

“몰라.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 시오한도 모른대.”

“나 지금 뭐 듣고 있는 거예요? 맹약을 한 사람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아 모른대. 아까 말한 그 고서 그거 하나 보고 소환했단다.”

김윤혜가 입을 벌렸다. 그리고 가감 없는 감상을 툭 내뱉었다.

“와. 미친놈.”

이도하는 이해했다. 오늘따라 자꾸만 기시감이 드는 게 제 착각은 아닐 테였다. 이해했지만 이도하가 입술을 물었다.

“씁.”

“이도하씨가 먼저 미친놈이랬잖아요.”

“내 미친놈이다.”

김윤혜는 그저 어이가 없는지 참 나, 하고 헛웃음만 내뱉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바로 심각해진 김윤혜가 말했다.

“아니, 그럼 그게 맹약 때문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소리가 지금….”

김윤혜가 경고했다.

“조심해요.”

이도하와 김윤혜는 원래 늘 장난이건 진심이건 한껏 담아 옥신각신하는 사이였지만 이번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없었다. 김윤혜는 심각해 보였고, 걱정까지 담고 있었다. 이도하가 바로 대답이 없자 김윤혜가 한 번 더 말했다.

“확실하지 않으면, 적어도 확실해질 때까지는 하지 마요. 경고했잖아요, 이도하씨 특기요.”

‘그러니 내게 와, 화이람.’

이도하가 미간을 눌렀다.

“이도하씨.”

“…알아.”

대답에 한숨이 얹힌 건지, 한숨에 대답이 흘러나온 건지 모를 목소리였다.

“한 번만 더 하고.”

김윤혜가 인상을 썼다.

“술 약속 있어.”

“이도하씨.”

“왜.”

“믿어요? 모른다고 했다는 그 말이요.”

책상을 돌아 나와 바닥에 나동그라진 쿠션 하나를 집어 들던 이도하가 픽 웃었다.

“김윤혜씨는 못 믿겠어?”

“합리적인 의심은 가네요. 만난 적도 없고 아마 평생 만나볼 수도 없을 사람이지만, 그 오르페노스 황제에요. 이리스티리움의 황제. 확신도 없는 일에 무모하게 모든 걸 걸 사람은 아니에요.”

김윤혜는 쿠션을 탁탁 털어내는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늘 뭘 모른다고 타박하긴 하지만 이도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관심 없는 일에는 정말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무지하다. 그리고 그걸 딱히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건 이도하가 눈치도 없고 머릿속이 꽃밭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김윤혜가 하는 의심은 분명 그의 머릿속 역시 스쳤을 것이다. 이도하가 말했다.

“믿어.”

이도하는 가슴 앞으로 쿠션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이도하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옅은 푸른빛만 환영처럼 잠시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그 모습을 꼼꼼히 지켜보느라고 미간을 모으고 있던 김윤혜는 잠시 후에야 뚱하게 팔걸이에 턱을 괬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특기자. 계약자. 계약주. 계약. 태어난 후 줄곧 연구해 왔다고 해도 좋을 텐데 여전히 어렵다. 김윤혜가 한숨을 내쉬었다.

***

이도하는 심장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은 추락감을 느끼며 쑥 떨어졌다. 싱그러운 풀냄새가 꽃잎 사이로 한껏 섞인 것 같은 싱그러운 향이 확 풍겼다. 예상대로 아프지는 않았다. 푹신한 것이 아래에 깔렸고, 단단한 팔이 그를 감싸 안았다.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던 이도하가 눈을 떴다. 황금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빛의 머리칼이 연약하게 돋은 풀밭 위로 펼쳐져 불그스레 물들어 있었다.

시오한의 바로 위에 떨어지리란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철퍼덕 그의 위로 엎어질 줄은 몰랐다. 또 엄살이라도 부릴 줄 알았는데, 이도하를 받쳐 안은 시오한은 아무 말이 없었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시오한이 그렇게 보니, 이도하도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

절 보는 그 눈을 마주 응시하던 이도하가 인사했다. 시오한이 눈을 크게 떴다. 황금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무척 놀란 것 같았다. 눈꺼풀이 떨려 속눈썹이 반짝였다. 갑자기 벅차오른 것처럼 가슴이 시큰거렸다.

고작 인사 하나에 예상하지는 못할 격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건 이도하가 시오한에게 배운 것이었다. 저는 늘 시도 때도 없이 안녕, 해대면서 놀랄 건 또 뭐람. 그동안 저가 그렇게 인사에 인색했었나. 머쓱함을 느낀 이도하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안녕, 시오한.”

“…응. 화이람. 안녕.”

대답하며, 시오한이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시오한이 이도하를 깊숙이 당겨 안았다.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도하의 고개가 떨어졌다. 코앞으로 다가온 키가 작은 풀들이 코끝을 간질이며 푸른 향을 퍼트렸다.

이도하는 눈을 깜빡이다, 둘 사이에 낀 쿠션을 잡아 빼 던져버렸다. 가슴이 맞닿았다.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시오한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이거지 역시. 나른하게 기분이 풀어진다.

“기다렸어?”

“늘.”

시오한이 대답했다. 손끝이 이도하의 짧은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도하가 자각도 없이 틈만 나면 시오한의 긴 머리끝을 잡고 만지작거리는 게 버릇이 된 것처럼 시오한 역시 그런 것 같았다. 손끝으로 문질거리다, 곧게 뻗은 뒷목을 따라 내려간다. 우뚝 솟은 뒷목 뼈에 다다라서는 손바닥으로 감쌌다. 따뜻한 손이 그렇게 지그시 감싸 안으면, 꼭 심장을 감싸 안는 것 같다. 두근- 맥박 소리가 들렸다. 손끝이 귀 뒤의 연한 살에 닿았다.

“화이람, 잠은 여기서도 잘 수 있는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시오한이 말했다. 웬 얼어 죽을 잠인가, 했던 이도하는 방금 전 제가 던져버린 쿠션을 상기해냈다.

“잠은 무슨 잠이야. 당신 찌그러트릴까봐 들고 왔지. 또 허리가 어쩌니 하는 소리 해.”

이도하가 투덜거렸다. 시오한이 낮게 웃으며 되뇌었다.

“허리.”

뒷목을 감싸 안은 손끝이 살갗 위로 미끄러지자 이도하는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

“내 허리를 걱정해 주는 거야?”

이도하는 잠시 대답을 보류했다. 이게… 이게 지금. 눈을 뜬 이도하가 몸을 일으켰다. 시오한의 손이 목을 스치며 떨어져 나갔다. 따뜻하게 감싸 안았던 손이 사라지자 일순 허전함이 들며 선선한 바람도 몹시 서늘하게 느껴졌다.

허리가… 이도하는 갑자기 손에 땀이 날 것 같았다. 이도하는 시오한의 허리를 타고 올라앉아 있었다. 시오한의 풍성한 옷자락이 풀 위로 화려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넓은 소매는 말려 올라가 손에 비해 얇은 손목이 드러났고, 허리에 맞게 둘러진 넓은 허리띠도 눈에 들어왔다.

가장 바깥에 걸쳐 입은 것과 달리 매무새가 딱 맞는 안쪽의 옷은 아주 단정했다. 깔끔하게 교차된 세 겹의 옷깃에 자꾸 눈이 갔다. 붉은 빛에 물든 새하얀 옷은 시오한과 아주 잘 어울렸고… 그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이 금실처럼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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