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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46화 (46/250)

46화

“김윤혜씨!”

이도하가 벌컥 문을 열었다. 김윤혜는 긴 의자에 누워 안대를 쓴 채 쿠션을 끌어안고 있었다. 기울어가는 선홍색 해가 그 위로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날씨는 좋다.

이도하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5시도 안 되었다. 김윤혜는 대놓고 근무시간에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일하는 것도 아니고 낮잠이니 방해하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이도하가 성큼성큼 걸어가 김윤혜의 어깨를 두드렸다.

“김윤혜씨, 좀 일어나 봐.”

“왜요.”

안대도 끄르지 않은 김윤혜가 성의 없이 대꾸했다. 이도하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당신, 그 기록 어디서 봤어? 맹약 기록, 몇 줄 봤다며.”

김윤혜가 안대를 올린다. 연구에만 진심인 사람다웠다.

“아이라 기록소에서요. 왜요? 뭐 나온 거 있어요?”

“아이라가 언제 세워졌지?”

딴소리에 김윤혜는 인상을 쓰면서도 일단 대답해 주었다.

“한 70년 됐죠. 왜 이러는지 말 안 해줄 거예요?”

“천 년 됐더라.”

“뭐가요?”

“오즈에. 시오한이 봤다는 맹약에 대한 기록이 천 년 전 기록이었다고.”

드물게도 김윤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윤혜가 안대를 벗어 던지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천 년이요? 뭐라고 써 있었는데요?”

“기록이랄 것도 아니야. 메모해 놓은 것처럼 대충 휘갈겨 놨는데 뭐 거울, 마주 볼 수 없는 세상, 헤어지지 않을 약속, 반드시 지킬 맹세, 그런 식이었다고. 당신이 본 기록은 어디 있어. 나도 좀 보자.”

“이도하씨는 못 읽어요.”

“왜?”

“독일어로 돼 있거든요.”

“독일어?”

잠깐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마주한 김윤혜나 이도하는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천 년의 간극. 독일어로 된 기록. 시간에 간섭하는 능력.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우르슬라?”

‘되돌아가는 태엽’, 인소더블 중에서는 최초로 계약자가 되었다는 독일의 우르슬라 발터.

“무슨 소리야, 이게. 그럼 그 여자가 천 년이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단 말이야?”

이도하가 사소하게 놀랐다.

“그러니까 인소더블이죠. 본인도 인소더블이면서 뭘 새삼 놀라요.”

“김윤혜씨, 몰랐어?”

“알았으면 놀랐게요?”

“아이라 기록소에 있었다면서, 왜 몰라? 오늘 왜 다 뭘 모른대?”

속이 터진 이도하가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도하에게 뭘 모른다는 소리를 들은 김윤혜는 까딱 눈썹을 들어 올렸다.

사소한 호기심과 잠깐의 번뜩임에서 위대한 발견이 온다. 아이라의 모토는 그랬고, 그래서 연구원들의 사소한 낙서까지도 변태처럼 모두 다 기록해 데이터화 했다.

아이라의 연구원들은 심심하거나 도저히 머리가 안 돌아갈 때, 그냥 일하기 싫을 때, 하여간 시시때때로 그런 낙서들을 구경하거나 낙서를 하는 하찮은 취미가 있었다. 김윤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낙서라는 특성 탓에, 그런 기록들은 누가 남긴 건지 누락될 때가 많았다.

“이도하씨가 제일 모를 텐데요. 누가 또 모른대요?”

“…그런 게 있어. 그래서 뭐라고 돼 있었는데?”

“오즈에 남은 기록이 메모에 가까웠다고 했잖아요. 여기도 별로 다르진 않아요.”

쿠션을 집어던진 김윤혜가 컴퓨터 앞으로 가 앉았다. 몇 번 키보드를 두드리니 금세 화면에 자료가 떴다. 김윤혜의 의자 등받이를 짚고 선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노트에 적어놓은 것을 스캔한 것 같았다. 오래된 느낌은 있지만 오즈에 있던 고서처럼 천 단위의 세월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라고 써 있는 거야.”

그리고 독일어로 적혀 있었다. 독일어를 모르는 이도하는 소리나 간신히 흉내 내 볼 정도였다. 그러나 잔뜩 휘갈겨 놓았던 고서에서의 글과 달리 이건 보기만 해도 힘이 쭉 빠져 있었다.

“목숨에는 목숨으로, 가교를 만들기 위한 매개는 피로 한다. 한 생으로 다른 생으로 부르고, 죽음을 수반하여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맹세와 반드시 지킬 약속을 성립시킨다. 이름의 교환으로 시작과 끝이 한 점에 있는 계약과 같지 않으니 맹약이라 해야겠다.”

“…무슨 말이 이렇게 거창해?”

“독일인이잖아요. 철학의 나라.”

좀 더 기록다운 기록이기는 하지만 정말 딱 두 줄이 전부였다. 오즈의 고서에 있는 메모에 비하면 티끌만큼의 설명이 더해졌을 뿐이었다. 대충 이해해 봐도 결국 요는 시오한이 한 것처럼 피를 매개로 소환진을 그려 계약자를 소환한다는 뜻이었다. 이도하가 했듯 소환된 계약자가 제 목숨까지 걸어 그런 계약주를 살리면 맹약이 성립된다는 뜻이고.

“우르슬르가 한 게 맹약이었나?”

김윤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걸요. 왜냐하면 우르슬라의 계약주는….”

김윤혜가 말끝을 흐렸다. 이도하는 순식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속에 찬바람이 든 것처럼 서늘했다.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다가오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래. 죽었잖아.”

우르슬라의 계약주는 죽었다. 한날한시에 죽는다- 꽤 그럴듯했던 김윤혜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우르슬라도 그때 죽었어야 했다.

이도하는 뉴스에서 한동안 떠들어대던 것을 아직도 기억했다. 인소더블, 그것도 시간에 간섭하는 특기자를 계약자로 둔 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독일은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죽었다는 것조차 숨기려 했기 때문에 언제 죽었는지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오즈에서 활동하는 다른 계약자들의 눈과 입까지 막을 수는 없어 결국 계약주의 죽음 자체는 밝혀졌지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은 일이었다. 허황되고 그럴듯한 온갖 추측이 나돌았다. 결국 추측에 지나지 않았고, 우르슬라는 입을 다물고 은퇴했다.

이도하가 기억하기로 우르슬라의 계약자는 고작 18살에 불과했다.

“모르는 일이죠. 맹약이 맞을 수도 있어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가서 물어보면 안 돼?”

“누구요, 우르슬라요?”

“살아 있잖아.”

김윤혜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이도하를 보았다.

“우르슬라가 옆집 친구예요? 봐야겠다, 하면 가서 보게?”

“아니, 나잖아.”

김윤혜가 입을 벌렸다. 말하고 나니 이도하도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다른 의미가 아니라 저 역시 같은 인소더블이라는 뜻이었는데 모양이 영 이상했다. 언제나 솔직한 김윤혜가 말했다.

“진짜 재수 없다.”

“씁. 방문 의사 밝히고 그러면 안 돼?”

“이도하씨, 출국이 그렇게 쉽게 되겠어요? 우르슬라 만나러 잠깐 갔다 올게요, 독일 간다고 하면 정부에서 아, 예, 그러십쇼 하고 퍽이나 보내주겠어요.”

“아, 난 외국도 못 가?”

“갈 수는 있겠죠. 많이 귀찮겠죠. 되게 많이. 감당할 자신 있으면 가든가요. 이도하씨 독일 간다고 하면 난리 날 텐데, 이거저거 절차 거치면 내년 말쯤엔 독일 땅 밟을 수 있겠다. 파이팅.”

“……”

이도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윤혜가 먼저 선수를 쳤다.

“국가 간 분쟁 일으키고 싶으면 도약으로 가 봐요. 도약으로 국경 넘는 게 범죄라는 건 알죠? 장막 찢으면 다 탐지돼요.”

본래 국가 간에는 과학과 특기의 집합체인 장막이 존재해 도약이 불가능했다. 그깟 장막쯤- 하는 부분까지 생각하고 있던 이도하는 뜨끔했다. 의자를 흔들며 김윤혜가 신랄하게 말했다.

“일 년에 장막 찢고 도약하려다 걸리는 좀 모자란 브로커들이 오백 명쯤 된다는데, 지난번에 뉴스 보니 무슨 도떼기시장처럼 경찰서에 옹기종기 모여 있더라고요. 이도하씨도 거기 같이 모여 있으면 볼 만 하겠네요. 와, 국가 망신.”

이도하는 박수를 치려는 김윤혜의 손을 잡아 다시 팔걸이 위에 한쪽씩 곱게 올려놓았다. 조용히 좀 하라는 뜻이었다. 김윤혜는 그런 그를 여지없이 한심하게 바라보다 말했다.

“이도하씨. 독일에도 아이라 있어요. 전화기 있고, 핸드폰 들고 다니고, 컴퓨터도 있고, 인터넷도 되고. 심지어 우르슬라는 아이라 연구원이었거든요.”

“어?”

“아이라 공문으로 연구 협조 서안 보내면 되지, 뭘 직접 가서 물어볼 생각을 해요. 도약을 전 세계 급으로 할 수 있다고 진짜 지구촌이에요?”

“……”

이도하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가 성급했던 나머지 너무 당연한 걸 간과했으며, 힘이 넘쳐 간단한 일을 쓸데없이 크게 생각했다는 걸 겸허히 인정해야 했다.

“…우르슬라 일이잖아. 그쪽에서 제대로 대답해 주겠냐. 구린 게 있는 놈들 같은데.”

“솔직하게 불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죠.”

“자신감 넘치네.”

“그럼요. 나잖아요.”

“…김윤혜씨, 오늘 말 잘한다?”

“암요. 난데.”

“뒤끝이 만리장성 저리 가라 하겠다.”

“나라니까요.”

“미안하다. 근무시간에 잘만 해. 자다 일어나도 똑똑하네. 우리 김윤혜씨는.”

이도하가 약간의 자존심을 챙기며 이 의미 없는 말싸움을 종식시켰다. 김윤혜가 콧방귀를 꼈다.

“어디까지 공유가 된 건데. 내 계약이 맹약이라는 것도 그쪽에서 알아?”

“독일에서 어디까지 아느냐에 따라 다르죠. 우리 쪽에서 먼저 밝힌 건 없어요. 이도하씨의 맹약은 저 포함한 이도하씨 전담 팀이랑 상부에서밖에 몰라요. 이도하씨 계약주가 오르페노스 황제인 게 다행이죠. 황제의 안위와 관련된 문제는 극비라 이리스티리움에도 철저하게 함구했으니까. 다만 처음에 이도하씨가 병원에 이송됐었잖아요. 이도하씨, 그때 과다출혈 상태였어요. 피를 매개한 소환진에 대해서 독일 쪽에서 알고 있다면 맹약을 짐작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같은 아이라인데도 그렇게 견제를 해?”

김윤혜가 어깨를 으쓱했다.

“국가 간 일이니까요. 아는 게 힘이다. 정보는 국력이다. 어쨌든 같은 기관이라 다 그렇지는 않아요. 좀 예민한 부분이 있을 뿐이지. 에너젠까지 해서 인류의 보편적 이익이다 뭐다 마력 공유 협력 사업 얘기가 오고 간 지는 꽤 됐는데, 궁금해요?”

“말하기 입 아프지 않아, 김윤혜씨?”

“흠.”

김윤혜가 소리 없이 긍정했다. 정치적인 일에 머리카락도 뻗지 않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이도하가 컴퓨터 화면에 뜬 사진을 다시 보았다.

“…그래서, 김윤혜씨. 지금 맹약을 고안해 낸 사람이 우르슬라라는 얘기가 됐잖아.”

“그럴 가능성이 크겠죠.”

“왜 그랬을까.”

김윤혜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넓은 창밖으로 기울어가는 해가 쏟아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제각각의 생각에 잠겼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 특기자의 의사를 무시하고서라도 어떻게든 계약을 밀어붙여야만 했을 누군가가 생각해낸 방법. 이도하는 김윤혜가 처음 맹약을 언급했던 것을 기억했다.

‘나는 그대가… 정말로 간절했어.’

너무 간절해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벼랑 끝에 서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만 했기 때문에.

‘그대니까.’

가라앉지 않고 떠오르는 시오한의 목소리에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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