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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45화 (45/250)

45화

이도하가 이제 의식적으로 조절한다고는 하지만, 인소더블인 그의 존재감 자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낭비되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소환을 유지하는 데도 일반적이지는 않은 마력이 들었다. 어떻게 해도 이 이상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계약자는 위협이든 아니든 이 세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너무 컸고, 이 세계는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를 이곳에 오래 두고 싶지 않아 한다. 거기에 정면으로 거스르는데 드는 힘이 적을 리 없었다.

단 한 순간도 끊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마력이 소모되었고…. 그건 시오한의 마력이 자연적으로 차오르는 속도보다 빨랐다. 그러다 결국 어느 순간에 한계에 다다르고야 마는 것이다.

하지만 화이람. 그대는 모르지.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모래시계 아래로 모래가 빨려 나가듯 천천히 마력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끝에 선 존재가 선연하게 느껴졌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새까만 시야 속에 빛 한줄기가 깜빡 켜지고, 하나둘 씩 늘어나 모래 알갱이처럼 모여들어 형상을 이루었다.

바닥을 딛는 발자국, 나아가며 스치는 공기, 약동하는 심장… 그 모든 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대는 몰라, 화이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오직 나로 인해서라는 사실이 내게 얼마나 희열을 주는지.

시오한이 눈을 떴다. 가느다랗게 뜬 선명한 황금색 눈동자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일렁였다.

***

이도하는 미간을 구긴 채로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대리석으로 되었을 바닥에는 얇은 홈이 파여 있었다.

얇게 베어낸 흔적은 수백 개에 걸쳐져 거대한 원을 그렸다. 문자인지 그림인지도 모를 것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그 원은 이도하의 소환진이었다.

무릎을 굽힌 이도하가 소환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파인 홈이 손끝에 거칠게 만져졌다. 이 가는 홈을 피로 채워 시오한은 저를 부른 것이다. 피를 다 쏟아내야 했을 테지만, 그렇게 손목을 베어버리면 소환진을 그릴 수 없으니 미리 이렇게 소환진을 그려놓고 그 위로….

현기증처럼 도는 아찔함에 이도하가 얼른 손을 뗐다. 그 이후로 이 침실에는 처음이었다. 새삼 소환진을 다시 보고 있으니, 소환진을 그렸을 시오한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가로막는 건 뭐든 베어버릴 능력을 가진 사람이니 이렇게 단단한 바닥을 파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환진을 그리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때 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돌이켜보면, 아마 시오한이 제 손목을 베어내고 있을 시간에 쓰레기봉투를 묶고 있었던 것 같다. 이도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더니.

“아.”

쭈그리고 앉은 이도하가 거칠게 제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같은 대답 말고는 줄 게 없어. 그대니까.’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고 하냐. 어? 내가 어떡해야 하냐고. 이도하는 이마를 짚은 채로 바닥에 그려진 소환진만 노려보다, 또 뒤통수를 때리듯 차오르는 착잡함에 마른세수를 했다. 그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폐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하고 고하는 걸 보니 시종이었다. 이도하가 일어나 벌컥 문을 열었다.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놀라 이도하를 보았다. 고풍스러운 받침대에 아주 낡은 책을 조심스레 들고 있었다. 흰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이도하는 당황한 시종에게서 받침대를 받아들고, 잠깐 책과 시종을 번갈아 보았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장갑 좀 빌려줄래요.”

“예?”

“장갑이요. 그거.”

이도하가 시종의 손을 가리켰다. 시종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얼른 장갑을 빼 공손하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송구합니다. 저,”

문을 닫으려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장서관장께서 감히 부탁하시기를, 천 년이 된 고서이니 부디 다루는 데 신중을 기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천… 네.”

천? 천 년이라고? 이도하는 대충 옆구리에 끼고 있던 받침대를 좀 더 조심스럽게 안았다. 시종은 깊이 고개를 조아리고 나갔다. 이도하는 소환진을 빙 둘러 돌아가 책상 위에 받침대를 내려놓고 장갑부터 꼈다. 부드러운 비단 위에 놓인 책은 과연 한눈에 봐도 매우 낡아 보이기는 했지만, 천년은 정말 상상도 못할 숫자였다.

“뭐 한다고 이런 책을 읽었어….”

중얼거리며 이도하는 책을 뒤집어 보았다. 천년이라는 시간동안 소중하게 보관될 정도라면 대단한 연구 기관의 일지나 황실의 기록쯤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수첩이나 일기장 같았다. 이도하가 책장을 넘겼다. 종이가 낡은데다가 얇기까지 해 잘못 만지면 그대로 바스라질 것 같았다. 물건을 대하는 데 있어 조심성이라고는 별로 없는 이도하도 한껏 손끝을 세워 책장을 넘겨야 했다.

조용한 침실에 한동안 책장이 팔락이는 소리만 났다. 책장을 넘길수록 이도하의 미간이 점점 더 구겨졌다.

“이거, 진짜 일기잖아.”

마침내 이도하가 짜증을 냈다. 이 고서는 약 천 년 전쯤에 살았던 어느 계약주가 제 계약에 대해 기록해 두고 있었는데, 일기라기보다는 사실 기록이나 일지에 더 가까웠지만 이도하가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만났다, 뭘 했다, 이런 걸 하자고 했다는 둥. 이도하는 다시 화병이 날 것 같았다.

‘고서’라고 하기에 조선왕조실록쯤 되는 책인 줄 알았더니 일기. 거기에 추측…. 이도하는 잠시 지그시 눈을 감고 마음의 안정을 위해 힘썼다. 느껴지나, 시오한? 어? 이도하가 속으로 씩씩거렸다.

책을 아주 바스러뜨리기 위해 애쓰며 이도하는 어쨌든 책의 가장 마지막까지 넘기는 데 성공했다. 시오한이 미리 언질을 해 두었는지 붉은 책갈피가 삐죽 꼽힌 부분이었다. 그 전까지는 그래도 꽤 동글동글하고 정갈하게 써 있던 글씨가 아주 개발새발 날아가 있었다.

금단현상이라도 일으킨 사람이 쓴 것처럼 획이 달달 떨고 있었고, 졸다가 쓴 것처럼 아래로 축축 처지기까지 했다. 대충 휘갈겨 써버렸는지 마지막 획마다 한껏 늘어져 있었다. 이도하가 보기에 신뢰라고는 정말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기록도 고작 몇 줄에 불과했다. 이건 정말 ‘끄적인’ 것이었다.

[등을 맞댄 거울. 절대로 마주볼 수 없는 세계. 같은 곳, 같은 시간. 목숨에 목숨으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맹세. 반드시 지켜질 약속. 맹약. ]

“…이게 수수께끼야, 뭐야. 이게 다야?”

맹약. 그건 떠오르는 대로 대충 갈겨놓은 것들 아래 좀 더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휘갈겨 놓고 동그라미까지 그려 놨다. 이도하는 기가 찰 따름이었다. 몇 장 더 넘겨보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어떤 기록도 없다. 이건 추측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걸 보고 대체 어떻게 피로 소환진을 그린다는 생각에 다다르는지 이도하는 통 알 수가 없었다. 성공했다는 건 정말로 기적이었다.

이도하는 이미 지난 일을 굳이 돌이켜 보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생각할수록 식은땀이 절로 나는 과정이었다. 이걸 기적이라고 하지 않으면 세상에 기적이 없다.

“그래서 도대체 맹약이 뭘 해주는데….”

목숨에 목숨으로. 김윤혜의 말이 맞았다. 목숨을 걸었으면 그만큼 뭐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목숨에 목숨.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맹세. 반드시 지켜질 약속…. 계약주와 계약자가 서로 틀어진 게 아니라면 굳이 헤어질 일이 있나. 약속이라고 해 봐야… 설마 둘이 약속을 하면 절대 어길 수 없는 건가. 그런 건 아닐 테고.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목숨을 걸고 특기자의 의사를 무시해 강제로 소환하지만 그러는 주제에 계약 자체는 강제성이 없다. 시오한이 말했듯이, 선택은 계약자에게 맡기는 것처럼.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곱씹어 생각해 볼수록 이 맹약이라는 게 볼수록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그렇게 서로 목숨을 걸고 목숨과 목숨을 뒤바꾸면서 맺은 계약인데, 계약주가 강제로 계약자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력 소모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도 없었다. 김윤혜가 의아해하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뭐지? 골몰히 생각에 잠겨 책을 노려보던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바닥에 그려진 소환진에 닿았다가, 다시 책으로 향했다. 팔짱을 낀 손에 손가락만 바쁘게 까딱거렸다.

‘맹약은 기록만 몇 줄 남아있지 사례가 없어서 제대로 연구된 게 없어요.’

맹약…. 기록…. 책을 바라보던 이도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오래된 책이었다. 천 년 전이라면 조선시대이니, 그의 세계라면 박물관에나 고이 모셔져 있을 책이었다.

그런 책을 김윤혜는 왜 찾아봤지?

“…아니지.”

이능이라고 불리던 시절이야 꽤 오래되었다지만, 천 년은 결코 못 되었다. 이능이 특기자로 불리기 시작하며 특기자와 계약자가 공공연해진 게 고작 100여년 전이었다. 천 년 전의 기록이 있을 리가 없고, 김윤혜가 찾아볼 이유도 없었다.

오즈와 그의 세계는 시차가 뒤죽박죽이었다. 그래봐야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이틀이다. 천 년의 간극은 절대로 메울 수 없었다.

이게… 말이 안 되는데. 이도하는 혼란스러워졌다. 바랜 글씨, 낡아 금방이라도 먼지로 바스라질 것 같은 책장을 노려보던 이도하가 벌떡 일어섰다.

가서 얼른 물어보고 오면 되지.

이도하의 신형이 사라졌다. 남은 자리에 푸른 불씨가 잔해처럼 일렁이다 허공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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