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연구원들 모두?”
“발라리온과 관계된 연구원들이었습니다. 정보국에서 협조해 주지 않아 이부까지 공문을 보낸 것 같은데….”
발라리온은 아칼테케 황제의 정복활동 당시 이리스티리움에 복속된 왕국 중 하나였다. 이부상서가 꺼림칙한 낯으로 말했다.
“신상 자체는 특수기밀에 속해도 이부는 정보 공개 여부를 기록해야 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특정 지역 출신 관계자들만 공개된 게 알려지면 잡음이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한데 치안대에서는 폐하께서 직접 조사를 명하신 일이라 하더군요.”
황제가 직접 명령한 일이라면 아무리 이부상서라도 반려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또 문제는, 현자의 탑이 황제 직속 연구기관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현자의 탑이 타국의 간자가 운영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지하 도박장과 연결되어 있다면 이건 어, 그렇구나, 하고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제국의 어디까지 파고들었는지 모르니 아예 통째로 무언가를 다 들어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뭔가를 드러내면 피를 보고 만다.
시오한이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그것뿐은 아닐 텐데… 치안대에서 일을 쉽게 하려 하는군. 반려하게.”
“예, 폐하.”
행 사이에 무슨 말이 통했는지, 이부상서가 군말 없이 대답했다.
“허면… 물러가 보겠습니다.”
이도하에게도 정중히 고개를 숙인 그가 뒷걸음쳐 나갔다. 집무실 안에는 이제 침묵만 가득했다. 내리쬐는 햇볕은 여전히 따뜻했으나, 아까처럼 꾸벅꾸벅 졸음이 올 분위기는 아니었다.
과자 바구니라는 게 그다지 크지도 않아 골라낼 것도 이미 없었다. 진작에 병아리 콩 같은 것을 다 골라낸 시오한은 오목한 손바닥에 모인 것들을 말없이 보기만 했다. 겉보기에만 작고 귀여운 연 노란빛 콩알 과자들이 그의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렀다. 내리깐 속눈썹이 가지런하기만 하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던 이도하는 이제 마음이 불편했다.
“…미안해.”
마침내 시오한이 먼저 말했다. 이도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는데,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시종들이 내 입맛에 맞춰 놓은 거라… 그대가 매운 걸 먹지 못한다는 걸 깜빡했어.”
“당신, 지금….”
이도하는 어이가 없어 말을 차마 끝맺지도 못했다. 시오한으로 인해 어이가 없었던 적이야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은 정말 손에 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화이람. 나는 그대를 소환한 걸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 없어. 그날 그 순간에조차 그랬지. 그러니 앞으로도 후회할 일은 없어. 그대가 뭐라고 해도….”
햇볕이 들이치는 황금색 눈동자로 이도하를 보며, 시오한이 말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왜?”
이도하가 물었다. 왜? 그것밖에는 그가 물어볼 게 없었다.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도하는 좀 망연한 기분이었다.
“시오한. 당신이 날 소환해서 한 일이라고는 밥 같이 먹고 놀러 다닌 일밖에 없어. 고작 그게 다야. 누가 고작 그러자고 확신도 없이 목숨을 걸어. 이게 수지가 맞는 장사야? 어디 그것뿐인가. 내가 번번이 마력을 쓰-”
이도하가 질끈 입술을 물었다. 오늘 대전에서의 일로 이도하는 그동안 제가 얼마나 자각 없이 마력을 마구잡이로 끌어다 썼는지 알았다. 대전에서 불꽃과 얼음으로 용을 수놓고, 연달아 소환을 거듭했는데도 시오한은 이렇듯 무사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섬뜩한 일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몰라서 태연할 수 있었다.
“마력을 개 거지같이 갖다 쓰는데도 당신은 말 한마디를 안 했지. 하마터면 내가 당신을 죽일 뻔했다고. 당신이 그렇게 목숨을 걸어서 소환한 내가,”
“그렇지 않아.”
시오한이 대답했다.
“화이람. 목숨을 건 건 내 선택이었어. 그대는 그 일에 어떤 책임도 없어. 날 두고 그대로 돌아가 버렸대도 그대의 잘못은 아니야.”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그게 정말 잘못이 아니었을지.”
이도하는 이제야 그날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 이 세계는 그의 세계가 아니고, 이 나라도 그의 나라가 아니지만 한낮 영화나 활자 따위도 아니었다. 명백히 실존하는 세상이었다. 그가 말했듯 이리스티리움의 황실에는 시오한뿐이므로, 그날 이도하가 그를 외면했더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하늘도 모르는 일이다.
융성한 제국의 왕좌가 하루아침에 비어버렸을 때 그 뒤에 펼쳐질 게 꽃길이 아니란 것만은 확실했다. 시오한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가장 잘 알 사람이 바로 그였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쯤 되면 그가 이 모든 걸 알고서 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 의심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이도하가 오즈와 관련된 일에는 관심을 끊은 탓에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오히려 변수였다. 알고 있었을까…. 이도하는 혼란스러워졌다.
시오한이 손을 내밀었다. 이도하는 그가 조심스레 제 손위에 손을 얹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은 손은 이도하의 것보다 컸다. 긴 손가락 끝이 그의 맥박 위에 닿았다.
“하지만 그것도 그대의 선택이었잖아.”
“……”
“화이람, 어차피 나는 그날 죽었을 몸인데, 그대가 날 살렸지. 지금 이 몸에 흐르는 피는 그대의 것이니… 나 역시 그대의 것이야.”
시오한이 실낱같이 웃었다.
“그대가 이미 말했듯이.”
‘어차피 내 건데.’
그건 그냥 홧김에 한 말이었다. 갑작스레 소환되어 이도하는 정신이 없었고, 거기다가 웬 칼을 들이대며 협박하니 신경질이 나 있었다. 그런데 시오한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한울의 일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여러 번 따지고 들었지만 이도하는 이제 알고 있었다. 시오한은 제게 아무런 목적이 없었다. 그건 이도하를 불안하게도, 또 안심하게도 만들었다.
“그러니 날 어떻게 하든, 나는 다 괜찮아, 화이람.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내 힘, 내 마력, 이 몸도… 다 그대가 해.”
맥박 위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이도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디, 돌려주지 마.”
“…다정도.”
목이 메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도하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다정도 병이랬다.”
“어차피 난 그대 앞에서 늘 골골대는걸.”
시오한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이도하가 물었다.
“시오한.”
“……”
“왜 나는 당신에게 예외야?”
시오한은 시종들의 자잘한 실수를 탓하지는 않는다. 몸이 앞선 기사의 혈기를 벌하지는 않으나 덮고 넘어가지도 않았고, 신하가 편하게 의견을 펼치며 농을 하는 것 정도는 받아주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부상서 정도 되는 고위관료라면 황제를 매일 볼 텐데도 그는 시오한을 어려워했다.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시오한의 앞에서 긴장했다. 굳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사소하게 반박을 해 시오한을 두 번 말하게 하는 신하도 없었다.
시오한은 분명 너그러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황제로서의 그가 베푸는 ‘자비’였다. 그는 뼛속까지 이 거대한 제국에서 적자로 태어난 황제였다.
평등을 표방하는 사회에서 자란 이도하가 황제라고 해 봐야 느낌이 피부로 닿을 리가 없었다. 제 세상이 아니니 더욱 그랬다. 이런 대제국에서 절대 권력을 쥔 황제의 권위가 얼마나 무거운지 몰랐다. 그러니 시종이고 기사고 그의 옷자락조차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모습을 두고 유난이라 했더랬다. 유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알았더라도 이도하가 눈치를 보지는 않았겠으나… 시오한이 어떻게 그를 대하는지 좀 더 빨리 깨달았을 거라는 점에서 달랐다. 늘 웃고, 능청을 부리고, 엄살을 피워대며 머리칼을 만지던 뺨을 만지던 개의치도 않고 말을 무시해도 웃기만 하는, 원래 그런 사람인 게 아니라- 이도하에게만 그랬다.
계약주와 계약자의 관계라서?
시오한은 애초에 그 계약을 하기 위해 추측 하나만으로 목숨을 걸었다.
이도하는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계산기를 두드려 합리성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이유 없는 호의도 없다고 믿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내가 간절하지?”
이도하를 보는 시오한의 시선이 흔들렸다. 찰나였다. 곧 시오한은 조금 난처해 보였다. 답지 않게 꺼리는 것처럼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대답했다.
“화이람. 그건…. 내게는 무의미한 질문이야. 그대가 무엇으로든 왜냐고 물으면, 나는 같은 대답 말고는 줄 게 없어.”
“…….”
“그대니까.”
이도하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후는 긴 숨을 내뱉었다. 이도하는 창턱에 턱, 뒷머리를 기대었다. 마주 앉은 둘 사이로 여전히 선선한 바람이 달래듯 스쳤다. 창밖으로는 성도의 전경이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새파란 하늘에는 그려놓은 것처럼 새하얀 구름들이 떠다녔다. 평화로운 정오가 지나고 있었다.
이도하가 시선을 내렸다. 그는 제 손목을 잡은 시오한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빼내었다.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은 시오한의 손끝이 이도하의 손을 스쳤다. 손끝이 잠시 걸려 있다가 떨어졌다. 이도하가 일어섰다. 따라오는 시선을 피해 그가 시오한을 스쳤다. 시오한이 그의 손을 잡았다.
“화이람.”
“…책, 그 고서라는 책, 나도 한 번 보자. 어디 있어?”
고서라고 했지만, 계약주인 시오한이 읽을 수 있는 글이라면 이도하도 읽을 수 있었다.
“…가져다 놓으라고 할게.”
“당신 침실, 거기 가 있는다. 우리 처음 만났던 곳.”
문득 시오한이 옅게 웃었다. 이도하를 붙잡은 손은 미약했다. 못내 그가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막지는 못하는 것처럼. 이도하가 그를 보았다. 마음에 걸렸다. 이도하는 절 잡은 시오한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시오한이 돌아보기 전에 그의 머리를 당겼다. 내내 해를 쬐어 따뜻한 금발 위로 이도하가 입술을 눌렀다.
“이따 술이나 한잔하자.”
시오한이 대답이라도 할까 두려운 사람처럼 이도하가 재빨리 집무실을 나섰다. 바쁜 걸음걸이였다. 혼자 남은 시오한은 눈만 깜빡이다, 물감이 번지듯 스르륵 웃었다. 그가 삐뚤어진 왕관을 잡아 내렸다. 화려하게 조각된 왕관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열린 창가에 머리를 기대었다. 찬란한 성도의 전경이 평화롭게 펼쳐진 광경을 두고 시오한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