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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43화 (43/250)

43화

이도하도 알 수 있었다. 느껴졌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동시에, 또 한 편으로는 아주 저릿했다. 그는 생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고, 그래서 그게 시오한의 것이라는 걸 더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이도하가 입을 달싹였다. 시오한의 말은 완전히 모순되어 있었다. 확신이 있었다면 기적 같은 건 바랄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미처 입술을 떼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선수를 쳤다.

“폐하- 이부상서 들었습니다.”

시종의 목소리였다. 이도하는 지그시 천장을 노려보다가, 시오한을 밀어냈다.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서 좀 진정해야 할 것 같았다.

“화이람.”

“일이나 해.”

이도하는 다시 여태 앉아 있던 창가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나 화났소- 하고 시위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그렇게 되었다. 유치하게 발이나 쾅쾅 구르는 어린애 같아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정말 별수 없었다. 시오한의 시선이 끝까지 그를 따라왔다. 이도하는 돌아보지도 않고 과자 바구니를 낚아챘다.

“들여라.”

시오한이 말했다. 곧 문이 열리고, 짙푸른 도포를 입은 남자가 들어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짧은 머리칼이 잘 정리된 이 이부상서는 한눈에 봐도 젊어 보였다. 많이 잡아봐야 40대도 안 되어 보였고, 쾌활한 인상이라 어디 가서도 제법 준수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뭐, 폐하의 영광이 드높고 어쩌고 하는 거창한 인사치레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서류를 내밀었다.

“이부시랑 임명서와 이번 인사 개편안, 노이렌슈에드 학칙 개정 명령서입니다, 폐하.”

“명령서를 왜 그대가 들고 왔지?”

서류를 받아 살펴보던 시오한이 눈을 들어 물었다. 흘긋, 동시에 그의 눈이 이도하를 살폈다.

“예부상서를 아시지 않습니까.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은 편인데 대전에서 그 대단한 장관을 봤으니 심약한 가슴에 감격이 너무 벅찬 것 같더군요. 소신도 재가 받아야 할 것들이 있으니 기꺼이 대신 발품을 팔겠다고 했습니다.”

이부상서가 씩 웃었다. 절대 불꽃이, 용이 어쩌고 하는 말은 안 한다. 이도하와 눈을 마주치고는 아주 즐거운 낯으로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그는 빈말로도 표정이 좋다고 할 수도 없었는데도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시원해 보이기만 했다. 대전에서는 말끝마다 망극하니, 황송하니, 하더니 그건 대전 회의라 그랬는지 그만큼 엄하지는 않은 분위기였다.

“폐하, 스타인 학장은 고루하기가 예부상서를 업고 다닐 수준입니다. 그러니 예부상서와 죽이 맞아 수차례 권고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 결국 명령서를 내리게 하지 않습니까? 제국을 위해서다, 정통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정말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모를까, 말만 번드레하지 사실 제 비리를 포장하느라 그러는데, 학자라고 또 얼마나 말은 잘하는지 소신 같은 행정가는 이길 재간도 없습니다.”

이부상서가 한탄을 쏟아냈다.

“그대가 재간이 없다 하면, 에트레제에 인재가 없는 거겠지.”

이부상서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분골쇄신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대의 말처럼 스타인 학장은 고루한 인사이고, 저질러놓은 일들이 많긴 하나 또 저명한 학자임은 분명해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가지 않았나. 처벌을 받아야 파면을 할 텐데 증거는 없고, 노이렌슈에드는 에트레제에서 인사권을 휘두를 수도 없는 곳이지. 예부상서가 이번에 뜻을 꺾었기에 더더욱 절치부심하고 있을 텐데, 이부상서인 그대가 이 일에 관여해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나?”

노이렌슈에드는 이리스티리움의 유일한 공립학교였다. 오랜 옛날부터 자치권이 보장되어 있었으니, 하다못해 예부도 아니고 이부상서가 학장 인사에 관여한다면 이는 명백한 월권에 직권남용인 셈이었다.

“폐하, 소신이 그 인사를 감당할 재간은 없으나 워낙 성격이 좋아 학창시절을 잘 보내 친구들이 또 많습니다. 이부상서가 아니라 리크마노 백작이 동창들과 밥을 먹을 뿐이지요.”

에트레제에서 일하는 관료들 중 노이렌슈에드 출신이 아닌 이를 꼽는 게 더 빠르다. 흔히들 노이드라고 줄여서 부르는 이 학교는 비단 이리스티리움 뿐만이 아니라 전 대륙을 놓고 보아도 최고로 꼽힌다.

그리고 에트레제의 관료 시험은 너무 어려워 인생의 회의를 느끼게 하는 시험이었다. 노이렌슈에드의 졸업장이 필수는 아니지만, 문제를 보는 순간 한탄부터 나오게 한다는 시험과 대륙 최고 교육 기관의 상관관계는 간단했다.

그런 사정이니 이름이 있다는 학자들 역시 어지간해서는 이 학교 출신이라, 모이면 전부 동창이었다. 이부상서쯤 되는 고위관료라면 마주치는 이들마다 죄다 동창이니 단어가 의미를 잃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저런 말을 뻔뻔하게 한다.

시오한이 픽 웃었다. 그가 담담히 말했다.

“지금 짐 앞에서 감히 노이렌슈에드의 학장 인사를 두고 부정청탁을 하겠다....”

“무엄한 언사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하지만 폐하께서 노이렌슈에드를 개혁하고자 하심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이 최고 교육 기관은 최고라는 이름답게 뭐든 최고였다. 시오한이 가끔 손수 강의를 갈 정도로 교수진도 최고였고, 시설도 최고이며, 등록금도 최고며, 입학 요건마저 최고로 까다로웠다.

아무리 한미해도 작위가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이어야 입학이 가능했고, 장학생은 가물에 콩 나듯 뽑았다. 위로 3대까지 이리스티리움 국적이 아니어도 입학 자격 미달이다. 외국인이 교육받으려면 교환 학생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아칼테케 선황폐하께서 정복 전쟁을 펼치신 후 제국이 이전과 같지 않은데, 여전한 제도가 아직 많아 젊은 인사들 중에 뜻을 펼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인재 발굴은 말할 것도 없죠. 그들이 폐하와 뜻을 함께하고자 하는 열망이 큽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신은 뛰어난 학자들을 상대할 말재간도 없습니다. 어찌 감히 청탁이라 하겠습니까? 다만 폐하의 뜻을 상기시킬 뿐이지요.”

이부상서가 고개를 숙였다. 정중하게 예를 차리는 그는 조금 긴장한 듯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시오한이 까딱, 서류 위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곧 그가 명령서에 인장을 찍었다. 이부상서의 눈이 반짝였다.

한편 이도하는 황제나 신하나 죄다 거짓말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게 말재간이 없는 거면 이도하는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더 울분이 이는 것은, 저렇게 신하를 앞에 두고 정무를 보는 시오한에게 자꾸만 눈이 간다는 사실이었다. 흰 정복을 늘어트리고 앉아 왕관을 쓰고서 고아한 자세로 눈을 내리깐 그는 이도하가 아는 시오한이 아니었다.

무서워, 안아줘. 그런 거 못해. 뻔뻔하게 엄살을 부리고, 늘 웃음을 담아 그를 보면서…. 그는 또 이렇듯 대제국 이리스티리움의 황제 시오한 오르페노스였다.

‘걱정하지 마. 그대가 보는 난 늘 진짜이니.’

울컥 뭔가가 북받쳐 목구멍을 탁 때렸다. 이도하는 소리 없이 씩씩거리다 과자 바구니를 헤집어 아무거나 입에 넣었다. 이부상서를 대하면서도 계속해서 이도하를 살피고 있던 시오한의 손끝이 움찔했다. 그는 이도하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바라보았다가, 다시 이부상서를 보았다.

“예부상서가 짐과 뜻이 맞지 않는 것도, 융통성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원칙을 따르는 일까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어디까지가 선인지 잘 봐야 할 것이오, 이부상서.”

이부상서의 말마따나 ‘동창들과 밥을 먹는 것’ 쯤은 눈 감아주겠지만 ‘부정청탁’까지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냥 설득을 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신하의 능력을 과하게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나, 정말 자신이 있는지 이부상서는 두말없이 대답했다.

“감히 성심을 흐트러트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이부상서가 다시 한 번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시오한이 서명된 서류들을 내밀었다. 이제 가려나 하던 이도하가 움칠 굳었다. 푹신하고 바삭하고 말캉한 것들이 마구잡이로 입 안에서 뭉개지며 달고 시고 맛이랄 것도 없는 희한한 맛이 나는 중이었는데, 기습처럼 그 안에서 매운맛이 확 퍼진 것이다. 혀가 얼얼하고 눈물이 찔끔 났다.

순간적으로 입에 든 것을 다 뱉을 뻔한 이도하가 꾹 입술을 물었다. 나라의 일을 논하고 있는데 에퉤퉤 과자나 뱉어낼 수는 없었다. 뭐가 안 풀리려니 망할 과자까지- 이도하는 정말 성질이 솟구쳤다. 약이라도 먹는 것처럼 입에 든 것은 전부 꿀꺽 삼켜버렸지만 이제는 목구멍에서 매운맛이 올라오는 것 같다. 그런데 가는 줄 알았던 이부상서가 또 입을 열었다.

“폐하, 혹 성도의 그 지하 도박장 사건과 관련해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도박장. 이대로는 생리적인 눈물이 쭉 흐를 것 같아 눈가를 내리누르고 이도하가 순간 숨을 멈추었다. 도박장. 이도하가 다시 한 번 되뇌었다. 입 안이 따끔따끔하고 얼얼한 게 그 단어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궁금했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시오한에 제게 그 일을 물어볼지.

사실 그가 물어본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았으면 했다. 이도하는 속으로 저를 비웃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더니.

툭, 무언가 이도하의 소매를 건드렸다. 화들짝 놀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내리깐 시오한이 서 있었다. 그가 물 잔을 내밀었다. 뒤편으로, 이부상서가 신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관료답게 이 산만한 광경에도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치안대에서 협조 공문이 들어왔는데, 현자의 탑 소속 연구원들의 신상 열람 청구였습니다. 현자의 탑 연구원들 신상은 특수기밀에 속해서 제게까지 보고가 올라왔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지하 도박장의 자금이 현자의 탑으로 흘러 들어간 흔적이 있어 공문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이도하가 시오한이 내민 물 잔을 받아들었다. 투명한 물에 새파란 하늘이 그대로 비춰 보였다. 차가운 물을 입 안에 머금으니, 불이 나는 것처럼 화끈하던 게 그나마 사그라든다. 시오한은 아예 이도하의 발치에 걸터앉았다. 그는 과자 바구니에서 하나를 집어 포장을 풀더니 이도하에게 내밀었다.

씩씩거렸던 것도 잊고, 심지어 제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 채 이도하가 이부상서의 눈치를 봤다. 몹시 민망했다. 그러는 사이 시오한이 아예 과자를 입에 대 주었다.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 아주 푹신했고, 안에서 새콤달콤한 크림이 한가득 흘러나왔다. 알싸하게 남아 있는 매운 기를 달큼하게 덮어버린다.

시오한은 이제 바구니에 손을 뻗어 조그만 병아리 콩 같은 것을 하나하나 골라내기 시작했다. 이도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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