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내가 국혼을 하는 게 싫어?”
시오한이 물었다. 대전에서 불꽃 쇼를 뻔히 방관해 놓고 그렇게 물으니, 짓궂은 질문이었다. 이건 또 웬 답정너야. 이도하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다람쥐의 집 같은 동그란 집무실에는 햇볕이 가득 쬐고 있었고, 바람은 선선해 마음이 말랑말랑하게 풀어졌다. 그래서 대체로 이런 상황에서 코웃음이나 쳤을 이도하도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싫어.”
“왜?”
글쎄. 그건 나도 알고 싶다.
“…그냥 싫어.”
저가 아는 이도하가 이곳에서는 그 이도하가 아닌 것 같아서, 잘 모르겠다.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맞는지.
이도하는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앞에 둔 그를 바라보았다. 의자 위로 긴 옷자락이 우아하게 늘어져 있었고, 머리 위의 왕관은 햇볕을 받아 반짝 빛났다.
“어차피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길 수가 없잖아.”
이도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남들이 인소더블이다, 뭐다 하며 떠들어 대는 힘을 크게 의식해 본 적도, 내세운 적도 없었다. 손가락을 열 개 다 접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도하에게는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염력의 한 종류로 알려진 이도하의 힘을 두고 사람들은 어디까지 가능한지 한계를 추측하며 설전을 벌이고는 했는데, 역설적으로 이도하도 그걸 보며 제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한계라는 게, 이도하가 스스로 짐작하는 한계와 너무 차이가 나는 탓이었다.
이도하는 알았다. 마음만 먹으면, 온 세상이 다 뒤집어져도 제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거기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놈의 국혼 소리 좀 하지 말고 닥… 아무 말 말라고 해.”
그놈의 국혼 소리를 해댔던 사람이 시오한의 할아버지라는 걸 떠올린 이도하가 급히 말을 순화했다.
“안 그러면 내가 확 당신 들고 날라 버릴라니까.”
국혼, 국혼, 무슨 설 명절도 아니고. 의식조차 못 하고 있던 게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니 보란 듯이 자꾸만 튀어나온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물론 이 경우는 흔한 결혼 잔소리와 스케일이 나라 급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어느 영화의 캐치프레이즈가 그랬다. 늘 그랬듯이 답을 찾을 거라고. 언제나 대책이란 있는 법이다.
이도하가 보기에 시오한은 김윤혜와 비슷했다. 성격이 아니라 능력 면에서 그랬다. 20살에 제위를 이어받았으니 소년 황제라고 해도 될 법한데, 그때부터 이 거대한 제국을 웃어른, 황후, 후사 하나 없이 여기까지 이끌어 왔으니 그도 이미 범재의 수준은 아득하게 벗어날 만큼 비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시오한이 아무 생각 없이 지금까지 국혼을 하지 않고 버텼을 리도 없다. 의뭉스럽게 굴어도 다 방법이 있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겉으로 보기에 이도하는 막무가내로 어깃장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대전에서 그랬듯 타박 한 마디 없이, 시오한은 늘 이도하를 보는 것과 같은 얼굴로 말했다. 느른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그러려면 그대가 늘 내 곁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이도하가 까딱 눈썹을 들었다. 물론 그를 지킬 자신이 있는 건 맞는데… 진실은, 사실 시오한이 그런 24시간 밀착 호위가 필요한 약골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사람을 싹둑싹둑 썰어놓고 양심적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말자.”
“내가?”
저가 언제 그랬냐는 얼굴로 시오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 팔이 툭 떨어지는 걸 봤는데 시치미를 뗀다. 굳이 말하기도 입 아프다. 이도하가 지그시 시오한을 쳐다보았다. 시오한이 사뭇 순진한 얼굴로 뻔뻔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이 안 나는걸. 누가 그런 무서운 일을 했지?”
“그래, 생각났다. 당신, 양심 없지 원래.”
이도하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숟가락도 무겁고 왕관도 무거운 양반이 어떻게 검을 들겠어. 내가 잘못 봤다. 왜, 펜은 안 무거워?”
이도하는 그냥 한 말이었는데, 시오한이 냉큼 팔을 들었다.
“사실 무거워. 힘들어 죽겠어, 화이람.”
“아유,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우리 주인님. 팔이라도 받쳐드려?”
“아까처럼 안아주면 힘이 좀 날 것 같아.”
“아까처럼 불꽃 쇼를 보여줄까. 여기는 책도 많으니까 활활 잘 타겠다.”
“안 돼, 화이람. 무서워.”
넉살을 떨던 이도하가 결국 푸핫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용이 그 거대한 대전을 꽉 채우며 으르렁대는 동안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기다가 손을 대보라는 말에도 그럴까, 하던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도무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최소한의 무서운 시늉도 하지 않는 뻔뻔함이 이제는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이도하가 입술을 꽉 물었다. 큰일 났다. 누가 그랬는데. 귀여우면 끝이라고.
“당신, 좀 전에는 멀쩡했잖아.”
“사실 엄청 무서웠어. 그대가 안아줘서 괜찮았던 거야.”
“아, 그래. 또 무서운 건 없고? 알아야 내가 다음부터는 조심을 좀 하지.”
“많지.”
한술 더 떠서, 시오한은 급기야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벌레도 무섭고, 불도 무섭고, 물도 무섭고, 뾰족한 것도 무섭고, 커다란 것도 무섭고, 어두운 것도 무섭고….”
“미치겠다, 당신 개복치야?”
세상 사람들, 여기 칼 든 개복치가 있어요. 이도하가 낄낄 웃었다.
“혼자 있는 것도 무섭고.”
“……”
선선하게 바람이 들이쳐 둥그런 집무실을 한 바퀴 맴돌아 나갔다. 흘러내린 시오한의 긴 금발을 흔들고 이도하를 스쳐 갔다.
“나는 다 무서워, 화이람. 사실 엄청 겁쟁이인데, 그렇지 않은 척하고 있는 것뿐이야.”
“…거짓말쟁이겠지.”
이도하가 말했다. 시오한이 가느다랗게 웃었다. 고양이의 웃음처럼 의뭉스러웠다.
“걱정하지 마. 그대가 보는 난 늘 진짜이니.”
이도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별게 다 무섭네, 겁쟁이네, 하는 말들은 다 농담이고 장난이었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그의 세상은 우스갯소리와 말장난으로 진심을 감추는 게 너무 익숙해진 곳이어서 이도하는 이런 진심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늘 웃음기를 담고 절 보는 눈이 너무 다정해서 이도하는 이렇게 가끔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반칙이지, 이건.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아무렴. 당신과 나 사이에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냐.”
간질간질한 이 기분이 이렇게 그대로 느껴지는데. 이도하는 또 괜히 가슴을 긁적거리며 과자 바구니를 뒤적였다. 시오한이 나직이 웃었다.
“그래. 그대와 나니까.”
문득 이도하가 미간을 모았다.
“맞아, 그거. 맹약. 아까 그거, 정말 맹약이라 되는 거야?”
“그대가 온 일?”
“그래. 계약주의 소환 없이 넘어올 수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마력도 그대로잖아. 그게 무슨 특혜야?”
“몰라.”
상큼한 대답에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
“뭐?”
“나도 몰라.”
“이게 말이야 방구야…. 왜 몰라?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아?”
“정말 몰라, 화이람. 맹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걸. 그대와 내가 최초일 수도 있어.”
벌떡 일어난 이도하가 달려들어 시오한을 붙잡았다. 양 뺨이 잡힌 그는 눈만 깜빡거렸다. 그 와중에도 평소처럼 느릿하다. 이도하는 늘 그 부드러운 움직임을 좋아했지만, 그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라 지금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그럼 당신은 어떻게 알고 한 건데?”
“책에서 봤지.”
이도하는 시오한의 이 태연한 대답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저승길에 반 발짝쯤 찍고 돌아온 인간이 지금, 뭐? 덕분에 같이 발끝 쯤 대고 돌아왔던 이도하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책?”
기가 막힌 이도하가 되물었다. 눈치를 본 시오한이 조금 더 덧붙였다.
“현자의 탑에 있던 고서야.”
“어쨌든 책이란 말이잖아.”
“…그렇지.”
“우리가 최초라고? 그 염병할 책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누가 해 봤다더라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될지도 모른다 뭐 이렇게 적혀 있었다는 얘기야 지금?”
시오한은 대답 대신 슬그머니 눈을 굴렸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이도하는 환장했다.
“당신, 미쳤어? 추측 하나 보고 그 일을 벌였단 말이야?”
이도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때도 눈앞이 아찔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정말 온몸의 털이 주뼛 섰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그는 이대로 시오한의 주리라도 틀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오한이 했던 첫 마디가 ‘안녕’이었다.
안녕? 이도하가 지금 명백히 안녕하지 못했다. 구역질이 절로 나던 진득한 피비린내가 떠오르면서, ‘안녕’ 하고 태연히 인사하던 시오한이 생각하니 더 화가 치밀었다.
“‘이제 곧 죽을 것 같다’. 시오한. 그날 당신, 그렇게 말했다고.”
“…화이람.”
“죽을 짓을 했다고! 이-”
이도하는 차마 내뱉지 못한 욕설을 짓씹으며 시오한을 놓았다. 그러나 이번엔 시오한이 그를 잡았다. 이도하가 제 계약주를 노려보았다.
“말해 봐. 확신이 있었어, 없었어.”
“있었어.”
“……”
“간절함은 늘 기적을 부르니까.”
시오한이 손을 뻗었다. 다가온 손은 이도하의 뺨을 감쌀 것 같았으나, 조심스레 그의 눈 밑을 쓸었다. ‘화이람’. 그의 계약명을.
“화내지 마, 화이람.”
시오한이 고개를 숙였다. 허락을 구하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가 이도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난 그대가 정말로 간절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