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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41화 (41/250)

41화

“정복이야.”

그 말 그대로, 그건 정말 제대로 갖춰 입은 황제의 정복이었다. 여태 이도하가 보던 시오한은 잠옷을 입고 있던 것과 다름없었다. 수십 개의 거대한 나무가 떠받치고 있는 듯한 새하얀 대전, 은실로 수놓은 용무늬가 은은한 하얀 정복을 입고서 반짝이는 왕관을 쓴 황제. 꼭 명화의 한 장면 같다. 햇볕 줄기가 그를 향해 쫙 쏟아지니 경외감이 절로 들 정도였다.

좀 과한데…. 이도하는 가슴을 문지르면서도 어쨌든 인정했다. 밥벌이가 아무리 거지 같아도 이만하면 할 맛 나겠다. 이게 복지다- 하던 주접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제가 넋을 놓은 줄도 모르고 있던 이도하에게 시오한이 훌쩍 왕관을 씌웠다. 이도하가 놀라 그를 보았다. 아까부터 즐거워 보이던 시오한은 지금 더 즐거워 보였다. 꼭 신난 어린애처럼 웃으며 그가 두어 발자국 물러서 이도하를 보았다.

“잘 어울리네. 계속 쓰고 있어, 화이람. 예쁘다.”

화려한 금빛의 왕관은 과연 이도하의 검은색 머리칼 위에서도 잘 어울리기는 했다. 그는 키가 크고 머리도 작았다. 팔다리가 길어 흔히 말하는 모델 비율이었고, 그래서 아무 옷이나 대충 걸쳐도 잘 어울렸다. 서늘한 기운이 도는 냉한 얼굴에 왕관을 걸치고 있으니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던 시오한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야상 바람에 왕관이 웬 말이야. 당신이나 해. 뭘 이런 걸 훌쩍훌쩍 주고 있어.”

“난 이제 목이 아파서 못 쓰겠어.”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왕관이 과연 보기보다 묵직한 편이기는 했지만 목이 아플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아주 잘 맞기까지 해서 처음에나 머리에 뭐가 올라갔구나, 하지 곧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 쓰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황제의 목을 아프게 만들었다가 목이 날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애초에 황제가 쓸 왕관을 그리 무겁게 만들 리도 없다.

그러나 시오한이 왕관을 건네주려는 이도하의 손길을 피해 훌쩍 도망갔다. 바닥까지 끌리는 옷이 치렁치렁한데도 밟지도 않고 잘 도망갔다. 오히려 이도하가 옷자락을 밟을까 엉거주춤하게 되었다.

“아, 왜 이래 진짜?”

“그대가 하고 있었으면 좋겠어. 잘 어울린다니까.”

“한 번 했으면 됐지, 뭘 계속하고 있어. 내가 황제야?”

“나와 계약했으니 아주 틀리지는 않은걸.”

“개소리 말고. 갖다 버린다?”

“아이고, 허리야.”

옥신각신 피하고 도망가며 왕좌 위를 두어 바퀴쯤 뺑뺑 돈 끝에 시오한이 허리를 부여잡았다. 칼질 한 번에 문도 두 쪽 내고 사람 팔도 썰어버리는 인간이 엄살을 피워댄다. 기가 찬 이도하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시오한이 슥 그를 보며 보란 듯이 허리를 콩콩 두드렸다. 긴 머리칼이 하얀 옷자락을 따라 흘러내린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이도하는 웃기기만 했다.

“그대가 깔고 앉은 허리가….”

“아, 써. 써. 쓴다. 쓰면 되지, 쓴다고.”

결국 이도하가 제 머리 위로 왕관을 쑤셔 박았다. 왕관 하나 쓰는 게 뭐라고 저렇게 고집을 피우나 싶었다. 씩 웃은 시오한이 그제야 다가왔다. 이도하가 대충 눌러놓은 왕관 주변으로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한 그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예쁘다.”

“시오한.”

“응.”

“당신, 황제 하기 싫어? 들고 날라줘?”

“응?”

뚱한 얼굴의 이도하가 제 머리 위의 왕관을 눈짓했다. 손으로는 호로록 날아가는 시늉을 하니 시오한이 하하- 웃고는 대답했다.

“끌리지만, 이제는 괜찮아. 나이 들면 그때 들고 도망가 줘.”

나이 들면.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이도하는 원래 멀리 내다보는 성격은 아니라, 그렇게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정말 그랬다. 아마 앞으로 그는 시오한과 어떤 식으로든 평생을 볼 테였다. 나이가 들고, 언젠가 시오한이 결혼을… 시발. 다시 확 짜증이 치솟은 이도하가 얼굴을 구겼다. 이건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어야겠다.

“화이람?”

시오한이 별안간 기분이 나빠진 이도하를 불렀다.

“시오한, 잠시 와 봐.”

이도하가 시오한을 당기더니 끌어안았다. 난데없는 포옹에 시오한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를 마주 안았다. 당연하게 저를 받아 안는 손길에 이도하는 조금 마음이 풀어졌다. 시오한의 품에서는 시원한 향이 났다. 가슴이 맞닿게 꽉 안고 있으니 쿵쿵 심장 소리가 들렸다. 산뜻하게 기뻐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분명 시오한의 것이었다. 아니, 제 것인가. 이도하가 픽 웃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잡았다.”

이도하가 제 머리 위의 왕관을 다시 시오한의 머리 위로 옮겨놓았다. 그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더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이건 반칙이야, 화이람.”

“왜 다들 나더러 반칙이래.”

“절대 피할 없는 수를 썼잖아. 그대가 이렇게 부르면 내가 어떻게 가지 않을 수 있어?”

“반칙이 아니라 전략이지.”

“전략엔 감정을 수반하지 않지.”

시오한이 말했다. 귓가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스쳤다. 가벼운 숨결이 스쳤고, 이도하는 그게 입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솜털이 하나둘 오소소 솟는 것 같다. 이도하가 움찔했다. 몸이 부르르 떨릴 것 같아 목에 꽉 힘이 들어갔다. 이도하가 고개를 빼며 슬그머니 시오한을 돌아보았다. 눈을 내리깐 그가 매끄럽게 웃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뺨 언저리에 시오한이 입술을 눌렀다. 이도하의 눈이 커졌다.

“가자, 화이람.”

속삭인 시오한이 깨끗하게 웃으며 그대로 손을 잡았다. 이도하가 고장 난 채로 순순히 딸려갔다. 그런 이도하를 돌아본 시오한이 또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한 웃음소리가 대전에 파도 소리처럼 퍼졌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반칙… 그렇지. 이게 반칙이지…. 시오한의 입술이 닿았던 제 뺨을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이도하가 손끝만 움찔거렸다.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아서 숨마저 짧게 쉬었다. 그런다고 열이 오르지 않을 리도 없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이도하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제 얼굴을 쓸어내리고 말았다. 김윤혜가 이곳에 없어 다행이었다. 바보가 따로 없다며 죽을 때까지 놀려댔을 것이고, 그는 반박할 수도 없었을 테니.

***

시오한의 집무실은 대전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에트레제는 백색 궁이라고도 불릴 만큼 전체적으로 흰빛을 띠었는데, 꽃이 만발한 긴 회랑을 지나 도착한 집무실은 아주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였다.

벽 두 면에 걸친 책장에는 책이 가득했다. 책상과 바닥에 놓인 책들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고, 넓은 책상을 채운 서류들은 조금 흐트러진 채 선선하게 지나는 바람에 이따금 흔들렸다.

대충 올려놓은 펜, 물이 반쯤 남은 컵, 소파 위에 눌린 모양으로 구겨진 방석, 뚜껑이 덜 닫힌 잉크병, 그 앞의 탁자 위에도 놓인 서류와 편지 등 생활감이 가득하다. 곳곳에 놓인 화병에는 오는 길에도 보았던 꽃들이 소담하게 담겨 있어 산뜻했다. 어떻게 한 건지 책장과 벽을 타고 자란 조그만 나무들도 싱그럽게 잎을 반짝이고 있었다.

영락없는 유럽 양식인 줄 알았더니, 뜯어볼수록 에트레제는 자연물, 특히 나무의 이미지를 많이 담고 있었다. 대전은 숲과도 같았고, 이 집무실은 거대한 나무 안에 파놓은 예쁜 다람쥐 굴 같다. 이도하의 취향과는 아주 잘 맞았다.

이도하는 둥근 벽면을 따라 넓게 난 창가 자리에 앉아 성도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쓰는 것답게 쿠션이 부드럽고 아늑했다. 열린 창으로 햇볕이 따뜻하게 쏟아졌으며, 높은 위치라 바람이 제법 부는데도 차갑지 않고 선선해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 오 분만 눈 감고 있으면 딱 잠이 올 것 같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좋네.”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이대로 있으면 정말 깜빡 잠이 들 것 같아, 이도하는 시오한이 주전부리라도 하라며 쥐여 준 과자 바구니를 뒤적거렸다. 다른 세상의 과자는 어떤가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마음에 들어?”

시오한이 물었다. 과자를 두고 말하는 건지 집무실을 두고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도하는 동글동글하고 약간 노란 빛을 띠는 것이 귀여운 과자를 살피는 중이었다. 이게 진짜 견과인가 아니면 과자인가. 어쨌든 둘 다 썩 마음에 들었고, 해서 이도하는 마음도 풀어져 있었다.

“응.”

이도하도 주어 없이 답했다. 서류를 살펴보던 시오한이 낮게 웃었다.

“그대 마음에 든다 하니 자주 와야겠네.”

“무슨 과자에서 매운 냄새가 나냐. 집무실이 또 있어?”

냄새를 맡아보던 이도하가 물었다. 그야 뭐든 잘 먹었지만, 매운 것에는 약했다. 그는 혀가 알싸한 통증을 느끼면 눈물이 절로 나왔다. 어느새 서류는 뒷전으로 둔 시오한이 턱을 괸 채 이도하를 구경했다.

“요즘은 앉는 곳이 집무실이 되는 격이긴 하지만 정식으로 집무실이라고 하면 서너 곳이 더 있지. 나도 이곳을 가장 좋아하는 편이야. 위험하니까 당겨 앉아, 화이람.”

“우주에서 떨어져도 안 죽어. 별걱정을 다 한다.”

별로 예감이 안 좋다. 이도하는 약간 미간을 구기며 과자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가 시오한을 돌아보았다.

“뭐 그렇게 산만해. 서류 들고 여기저기 다니다 잃어버리기 딱 좋은 거 아니야?”

“황제가 한곳에 머무르면 암살 위험이 높아지니까.”

“암살?”

이도하가 와락 인상을 썼다. 막 집어 들었던 폭신한 과자가 그의 손에서 뚝 떨어졌다. 역사란 돌고 돈다고, 그들의 세계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오즈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많았다. 이도하의 학교에만 해도 오즈의 역사 과목이 따로 있었다. 국사나 세계사를 공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누가 누구를 침략했다, 어느 황제가 어느 정책을 펼쳤다, 뭐 그런 것들이었다.

제 계약주라서가 아니라, 그런 그들의 시선으로 봐도 시오한은 훌륭한 성군이었다. 아직 재위 중임에도 명확하게 ‘성군’이라는 칭호로 불렸고, 백성들은 그를 사랑하고 칭송했다. 들은 말이 그랬고, 잠깐이지만 보았던 게 그랬다.

황제와 암살은 제법 사이가 가까운 단어였지만 이도하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유였다. 시국이 어지러운 때도 아니고 이리스티리움은 이미 선황들이 황권을 단단히 다져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암살? 감히? 이도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시오한이 대답했다.

“이리스티리움을 무너트리고 싶은 적국, 복속된 위성국, 황실에 눌려 권력을 부리지 못하는 게 못마땅한 귀족 인사, 꼽자면 셀 수 없이 많지. 좋은 황제를 바라는 건 힘없는 백성들이고, 가진 자들은 성군을 원하지 않아. 지금 제국은 황실에 나 하나뿐이니, 기회를 노려볼 법하지 않겠어?”

이도하도 알고 있었다. 선황은 시오한이 태자일 적에 붕어했고, 선황후는 먼 지방으로 내려가 칩거하길 택했다.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시오한과 감히 황위 다툼을 할 수 없었건만, 둘뿐이었던 후궁 소생의 왕자들도 선황이 붕어하기 전 작위를 주어 지방으로 내려보냈고 시오한의 외가인 아무르 후작가는 손이 귀했다. 선황후의 오라버니인 자작도 아직 자식이 없어 시오한은 친척이라고는 없었다.

웃어른도 없다. 내궁의 주인인 황후도 없으며 후궁도 없고, 후사도 없다. 시오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 큰일 나는 것이다.

“그러니 국혼을 하라고 상서령이 매일 같이 읍을 해댈 수밖에.”

“…….”

“화이람.”

“왜.”

“내가 국혼을 하는 게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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