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좀 비켜봐. 다리 저려 죽겠네.”
물끄러미 시오한을 보던 이도하가 툭, 내뱉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 몸을 기대었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힘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피곤한데….”
“그럼 침대 가서 주무시고요, 폐하. 아, 등 배겨.”
별안간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부터 쭉 전에 없이 즐거운 기색이기는 했지만, 이건 정말 웃겨 죽겠다는 웃음이었다.
“화이람, 어쩌다 거기에 들어갈 생각을 했어.”
으. 이도하가 꾹 입술을 물었다. 달관한 줄 알았던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꾸깃꾸깃 어떻게든 시오한의 뒤로 숨어보겠다고 몸을 접어 넣던 저를 보는 대신들의 황망함을 생각하니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얼굴에 뜨뜻하게 열이 몰렸다.
아오. 이도하가 훌쩍 왕좌를 뛰어넘어 탈출했다. 그에게 완전히 기대어 있던 시오한이 맥없이 왕좌 위로 널브러졌다. 그러고도 웃고 있었다.
“웃냐? 웃어?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오해야, 화이람. 내가 그대를 부른 게 아니야.”
“뭐?”
“난 그대를 소환하지 않았어.”
이도하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그대가 내게 온 거야, 화이람.”
몸을 바로 세우며, 시오한이 말했다. 허리를 곧추세우는 대신 무릎에 턱을 괸 그는 기쁘게 눈을 휘며 웃었다. 바닥까지 늘어질 정도로 긴 소매가 흘러내려 팔꿈치까지 드러난 팔이 새하얗다. 왕좌에 앉아 대신들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온데간데없고, 그는 편안하게 앉아 어린아이처럼 숨김없이 기뻐하고 있었다. 황금빛 머리칼이 양어깨 옆으로 쏟아져 햇볕에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온 거라고?”
이도하가 되물었다.
“그대가 온 거야.”
시오한이 친절하게 다시 한 번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어떻게? 소환의 의지가 온전히 계약주의 몫인 것은 가장 기본적인 상식 중 하나였다. 그게 가능한가? 이도하는 시오한을 깔고 뭉개며 떨어지기 전까지 제가 뭘 하고 있었는지 상기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왜 시오한이 절 부르지 않는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와.
눈을 둥그렇게 뜬 이도하가 주먹을 입에 댔다.
‘맹약의 이점이 뭔지 모르겠어요.’
김윤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설마 맹약의 힘인가? 아니면… 아니, 그래도 이렇게까지 된다고? 진짜?
“…개쩐다.”
마침내 이도하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게 진짜 되는 일이라면 개쩐다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시오한이 소환하지 않아도 제 의지로 넘어올 수 있다면, 앞으로 시오한이 언제 저를 소환할까 마냥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미친, 대박. 기다려 봐, 다시 해 보자.”
이도하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시오한이 움찔 굳었다. 그가 다급히 일어섰다.
“잠깐, 화이람…!”
그러나 막을 새도 없었다. 소환의 의지가 온전히 계약주의 몫이라면 귀환의 의지는 온전히 계약자의 것이었다. 계약자 본인이 다시 본인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면 제아무리 계약주라도 막을 힘은 없었다. 불러들이는 것은 계약주의 마력을 필요로 하지만, 귀환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눈 깜짝할 새에 반짝이는 마력의 흔적만 남기고 이도하는 사라졌다. 그리고 늘 그렇듯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하고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텅 빈 대전에 남은 것은 시오한뿐이었다. 언제 말소리가 오고 갔나 싶게 조용했다. 긴 스테인드글라스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만 바닷물처럼 일렁였다. 시오한은 그 형체 없는 바닷물에 잠식된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미동도 없었다. 가만히 서서, 그는 기다렸다.
찰나인지 영원인지 모를 시간 끝에 허공에 파직- 푸른 불꽃이 튀었다. 허공을 찢듯 갈라놓으며 새파란 소환진이 펼쳐졌다. 환한 푸른빛이 시오한의 얼굴을 물들였다. 그의 머리 위였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소환진을 응시하던 시오한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당겨진 입꼬리는 꼭 웃는 듯 했으나, 곧 울 것도 같았다. 그가 팔을 뻗었다. 그리고 이도하가 떨어져 내렸다.
“조심-!”
속수무책으로 추락한 이도하가 팔을 벌린 시오한의 품으로 떨어져 내렸다. 휘청-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아찔함에 이도하가 다급하게 시오한의 머리를 감쌌다. 그는 키가 꽤 큰 성인 남자였고, 아무리 검 한 자루로 문을 두 쪽 내는 시오한이라도 허공에서 떨어지는 남자를 받는 건 불가능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휘청인 건 잠시뿐이었다. 시오한은 두 발자국 정도 물러서긴 했으나 단단히 서서 이도하를 품에 가득 안았다.
꼼짝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줄 알았던 이도하가 헉, 숨을 들이켰다. 다시 해 보니, 이건 시오한이 직접 그를 소환하는 것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그가 소환하는 건 갑니다, 하고 안전벨트까지 한 채로 나서는 느낌이라면 본인의 의지로 오는 건 예고고 뭐고 간에 그냥 총으로 탕 쏘아 보내는 것 같았다.
스스로가 장전된 총알이 된 기분이었고, 당연히 유쾌하지 않았다. 롤러코스터도 무리 없이 타는 이도하였으나 이건 정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이거… 대박이긴 한데 좀 위험하다. 잘못하면 당신 허리를 부러트리겠어.”
위치가 무조건 계약주인 시오한의 머리 위로 잡히는 모양이었다. 왕좌 위에 떨어져 내린 것도 이해가 간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도하가 시오한의 등을 토닥였다. 어떻게 그리 딱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땅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질 뻔한 것을 잡아줬으니 고맙다는 의미였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화이람.”
“그래, 뭐. 하다 보면 요령은 생기겠지.”
이도하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갑자기 바닥이 사라진 것처럼 불시에 아래로 쑥 꺼지는 느낌은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았지만, 그래도 대책 없이 그냥 떨어지지 않을 방법이라면 많았다. 타이밍을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받아줄게.”
시오한이 말했다.
“늘 이렇게 받아줄게. 그러니 내게 와, 화이람.”
“……”
이도하가 머뭇댔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시오한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몸을 조금 빼려고 해도, 시오한이 그를 꽉 안고 있어 밀어낼 수가 없었다. 시오한의 어깨에 턱을 얹은 채 이도하는 잠시 눈만 굴렸다. 조금 후에야 그가 어색하게 답했다.
“…어. 그래. 당신이 받아주면 되지.”
그럼 타이밍 걱정 안 해도 되고… 그래, 좋지 뭐. 이도하가 괜스레 중얼거렸다. 가끔 골골대긴 하지만 이제 저도 연습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 같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남자를 받아낼 힘 정도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 큼, 이도하가 헛기침을 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이렇게 안고 있으니 기분이… 기분이 좋았으나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나직이 웃으며 이도하를 놓아주었다.
“근데 셀프 소환은 진짜 듣도 보도 못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무슨 원리야…. 맹약이라 그런 건가?”
“내가 그대를 늘 보고 싶어 하는 탓이지.”
제 머리 위를 노려보는 이도하에게 시오한이 답했다. 이도하는 코웃음을 쳤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영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법칙이라는 게 괜히 법칙이 아니었다. 소환의 의지가 계약주에게 달려 있는 건 계약주의 마력을 사용하기 때문인데, 계약주의 의지를 완전히 벗어난 셀프 소환이라는 건 아무래도 말이 안 됐다.
“마력도 그대로잖아…. 이게 특혜가 맞나.”
이도하가 손을 까딱까딱 움직여 보았다. 소환 짬밥이라고, 이도하도 이제 슬슬 마력을 사용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깨우치고 있었다. 시오한은 그저 웃으며 미심쩍어 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도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가, 괜히 시선을 돌렸다.
하기야, 계약주가 바라지도 않는데 계약자가 넘어오고 싶다고 홀랑홀랑 넘어오는 일이 생겼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계약주가 마력이 간당간당한데 혼자 넘어왔다가는 계약주를 그대로 골로 보내는 격이 될 테니 큰일이었고, 계약주가 엄한 일이라도 하고 있다가는 엄한 일… 미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도하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요령 없던 이도하가 소환진에 족족 빨려 들어갔던 것과 달리 소환에 응하는 것 역시 계약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 계약자와 계약주는 어디까지나 상호 동등한 관계였다. 어느 쪽도 다른 한쪽의 의사를 덮어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번 셀프 소환은 시오한의 말마따나 ‘늘 그대를 보고 싶어’ 한 시오한과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도하의 생각이 타이밍을 맞춘 결과였다.
늘 보고 싶다, 라…. 음.
“…뭘 입고 있는 거야?”
이도하가 말을 돌렸다.
“음?”
고개를 기울인 채 생각에 빠진 이도하를 지켜보고 있던 시오한이 팔을 들어 보였다. 긴 옷자락이 길게 늘어졌다. 색은 수수하지만, 색만 수수했다. 세세하게 들어간 무늬나 자수 같은 것들로 볼수록 화려한 옷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돌려보려고 했던 이도하는 단숨에 시선을 빼앗겼다. 뒤에서 깨작거리다가 제대로 보니 엄청났다.
윤기가 흐르는 흰 비단 위에 은실로 용이 수놓아진 옷은 시오한에게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소매도, 길이도 전부 바닥에 길게 쓸릴 정도로 아주 길었는데 키가 큰 시오한이 입으니 늘씬하게 태가 나며 위엄 있었다. 한복 같기도, 중국 옷 같기도 했다.
어쨌든 예뻤다. 게다가 이제 보니 시오한은 왕관까지 쓰고 있었다. 수백 개의 작은 보석과 섬세한 얇은 선으로 이루어진 왕관이 햇볕을 여러 방향으로 난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