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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39화 (39/250)

39화

“화이람, 더워.”

“어?”

용의 시선은 이도하의 시선과 같았다. 양손 동기화와 같은 이치였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보았고,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주춤주춤 물러선 노신을 노려보던 용도 고개를 돌려 시오한을 보았다. 언제 이를 드러냈었나 싶게 유순한 시선이었다. 시오한이 이도하의 어깨에 뒷머리를 기대더니 여태 잡고 있던 손을 제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정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 미안.”

옷 네 겹. 그런 마당에 껴안고 불까지 피웠으니 덥지 않은 게 이상할 수준이었다.

“예쁘네.”

시오한이 조금 고개를 틀어 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에 닿은 그의 조그만 머리통이 뜨뜻했다. 이도하는 조금 긴장해 시오한의 뺨도 만져보았다. 힘 조절 제대로 했는데…. 다행히 열이 아니라 정말 더워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도하가 물었다.

“만져봐.”

“그럴까?”

시오한이 태연하게 맞장구를 쳤다. 불인데? 하고 되묻기라도 할 줄 알았더니. 용의 눈길만으로도 무서워 사색이 되었던 대신들과 비교하면 아주 대담했다. 하여간 능청은. 이도하가 픽 웃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계약주라고 죽이 이렇게 잘 맞는다.

용이 허공을 미끄러지며 다가왔다. 시오한이 몸을 바로 했다. 용이 얌전히 머리를 낮추었다.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가져다 대는 게 꼭 개와 비슷했다. 그러나 투명하게 넘실거리는 것은 분명 불꽃이었다. 시오한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자, 대전 여기저기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시오한의 손끝이 닿는 순간, 용이 눈을 감았다.

분명 불꽃이었으나, 손끝에 단단하게 닿았다. 시오한이 흥미롭게 고개를 기울였다. 손끝이 닿은 부분이 새하얗게 굳어 있었다. 불꽃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처럼. 그가 둥근 주둥이 끝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부분마다 불꽃이 새하얗게 굳었다. 쩌저적- 소리가 먼저 났다. 얼어붙은 것은 그다음이었다.

시오한의 손길이 닿은 부분부터 내달리듯 순식간에 뻗어 나간 얼음이 순식간에 불꽃을 잠식했다.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불꽃의 용은 사라지고 새하얗게 얼어버린 용이 냉기를 뿜고 있었다. 넘실대던 불꽃이 그대로 싸늘한 얼음이 되어 있었다. 비늘 하나하나가 섬세했으며, 너울거리던 갈기 역시 당장이라도 다시 움직일 것 같았다. 이 또한 장관이라, 겁에 질려 있던 대신들이 또 한 번 넋을 놓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쨍그랑! 유리 수천 개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 용은 터져버렸다. 깜짝 놀란 대신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얼음이 폭발하며 깨져버렸으니 뾰족한 얼음 알갱이들이 쇄도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잔뜩 달아올랐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이 뻗었던 손을 뒤집었다. 그의 손끝으로 반짝이는 눈의 결정이 천천히 내려앉았다가, 녹아 사라졌다. 새하얀 눈이 아니라, 정말 섬세하게 조각된 조그만 얼음이었다. 거대하고 새하얀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것 같은 대전 안이 그 얼음 조각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도하는 시오한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대전이 워낙에 아름다운 탓에 동화의 한 장면처럼 예뻤다. 눈도 한 번 내려 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여기까지는 퍼포먼스였다 쳐도 그건 과하다. 마력 낭비였다.

“이게 수백만 원짜린데.”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시오한이 짝짝 점잖게 박수를 쳤다. 황제의 주접에 얼떨떨해 있던 대신들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잠깐 사이에 많은 걸 겪은 대신들이 반쯤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박수를 쳤다. 대전에서 황제의 계약자가 대신들을 위협했던 일은 아름다운 눈꽃 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도하는 웃지 않기 위에 이를 꽉 물어야 했다. 급작스러운 상황 전환에 멍하니 박수를 치는 모습이 회식 자리에서 상사를 따라 영혼 없는 박수를 치는 회사원들과 다르지 않았다. 밥벌이는 어디든 같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슬픈 생각을 하는 데 실패한 이도하가 결국 시오한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었다. 끅끅거리는 웃음소리는 다행히 시오한에게만 닿았다.

“돈을 벌었어?”

시오한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역력했다.

“청룡 영화제 이벤트로.”

물론 그때는 불꽃이 아니라 물로 만들어낸 청룡이었다. 청룡만이 아니라 파도도 만들고 별걸 다 했다. 전설은 아닌 레전드급으로 아직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벤트였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내 아이디어는 아니야. 구성이 너무 드라마틱하잖아. 근데 너무 잘했더니 오만 데서 다 부르더라고. 돈은 이미 충분해서 안 갔지.”

“뭘 사고 싶었기에?”

“…자전거.”

이백오십만 원짜리 자전거는 이도하가 처음으로 한껏 욕심을 내 사치를 부려본 물건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꽂혀서 사고 싶었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한동안 등하교로 알차게 쓰다가 이도하가 대학을 가면서 잊혀졌다. 창고에 정성스럽게 방치된 자전거는 이따금 그의 어머니가 장을 보러 갈 때나 세상 빛을 보았다.

“말은 좋아하지 않아?”

“안 타봤어.”

“알려줄게. 그대라면 좋아할 거야.”

어느새 박수도 사그라들었다. 시오한이 말했다.

“상서령, 이만하면 그대에게 대답이 된 듯한데.”

“…허나, 폐하.”

이도하가 눈을 들었다. 시오한에게 대답한 것은 마지막까지 용…의 시선을 빌려 이도하가 노려보던 대신이었다. 관복으로 보이는 푸른색 장포를 입고 있었으며 잘 빗어 넘긴 머리는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방금 전의 일로 안색이 창백하긴 했으나, 그냥 봐도 융통성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시오한을 바라보았으나, 이도하가 시선을 받았다. 차가운 시선에 상서령의 눈빛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짐의 계약자가 싫다는 걸.”

시오한이 말했다. 그러니 자기는 방법이 없다는 것처럼 어깨까지 으쓱 들어 보였다. 아주 산뜻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도하는 내심 당황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느냐마는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시오한이 제 계약자를 통제하지 못해 휘둘리는 황제처럼 보이는 건 이도하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괜한 짓을 했나 싶은데 시오한이 말을 더했다.

“화이람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상서령이 모르지는 않을 테고….”

오즈에서 행사하는 계약자의 힘은 모두 계약자의 마력을 기반으로 한다. 오즈에서나 이도하의 세계에서나 모르면 머저리 소리를 들을 상식이었다. 이도하가 불꽃 쇼를 펼치는 내내 시오한은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건 그가 그 모든 걸 용인했다는 아주 간단한 이치였다. 박수를 치면 쳤지, 막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도.

상서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이 대전에 들 만한 자리까지 올라왔다면 누구도 모를 리 없었다.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낸 건 똑똑히 들으라는 뜻이었다.

상서령에게 꽂혀 있던 이도하의 시선이 시오한에게 향했다.

“짐은 화이람이 원하지 않는 일은 굳이 하고픈 맘이 없어.”

“…폐하, 계약자는,”

“그러니.”

시오한이 상서령의 말을 끊었다.

“계약자가 바라는 일조차 해주지 못하는 무능한 황제로 만들지 말아주게. 상서령. 그대가 염려하는 바를 모르지 않지만, 짐이 이렇게 젊고 튼튼한데 염려가 너무 이르지 않은가?”

부드러운 말에, 상서령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더 할 말이 없으면 이쯤 하지.”

시오한의 말에 대전에 도열한 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정말 하려던 대로 대전 회의가 끝난 건지, 아니면 잠깐 사이에 열탕과 냉탕을 오고 가느라고 녹초가 된 대신들이 의욕을 잃어 그저 집에 가고 싶어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한바탕 쇼를 보기도 했고 이제는 황제의 뒤에 이도하가 대놓고 앉아 있으니 진지하게 나라의 일을 논할 분위기가 아니기는 했다.

이도하는 살짝 긴장했다. 보통 가장 윗사람이 먼저 자리를 나서니 이대로 시오한이 먼저 일어서면 저도 그를 쭐레쭐레 따라가야 했다. 이미 크게 한탕 하긴 했지만 그건 정말 못 할 것 같았다.

이도하는 만약 그렇게 되면 시오한을 버리고라도 먼저 도약으로 도망가 버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허리를 숙인 대신들은 그대로 종종걸음쳐 쭉 대전을 빠져나갔다. 썰물처럼 깔끔했다. 쿵- 대전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금세 남은 건 시오한과 이도하밖에 없었다.

“노인들 고집이 무섭다더니…. 벽창호 할아버지가 여기 있네.”

“내 외조부야.

“뭐?”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던 이도하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여기서 할아버지가 왜 나와. 방금 그 노인이? 이도하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고, 시오한이 즐거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할아버지라고? 안 닮았는데?”

아버지도 아니고 조손지간이 눈에 띄게 닮는 경우가 흔치는 않다. 나이 차이 때문에 더 그렇기도 했다. 알면서도 이도하가 헛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그는 방금 전까지 시오한의 할아버지에게 불길이 이글거리는 용을 들이대며 눈을 부라린 셈이었다.

“황가는 피가 짙어. 나도 모후보다는 선황을 닮은 편이지.”

그러나 그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지, 시오한이 이도하의 손을 만지작대며 즐겁게 말했다. 하기야, 황가의 조손 관계가 일반적이지는 않을 테였다. 바늘 틈도 안 들어갈 것 같던 방금 전의 그 노인이 우리 똥강아지, 하며 시오한에게 먹을 걸 쥐여 주는 광경을 생각하면 속이 좀 안 좋아질 정도였다. 그래도 할아버지라니. 이도하는 새삼스러웠다.

시오한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에게도 가족관계가 존재하는 거야 당연할 텐데 몹시 어색했다. 시오한은 날 때부터 이렇게 태어났을 것 같았다. 이 남자가 응애, 하며 태어나서 걸음마를 하고 남들처럼 어린 시절을 거쳤을 걸 상상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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