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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38화 (38/250)

38화

“폐하, 송구합니다, 부디 이 노신의 충언을 곡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자꾸 왕좌를 들먹이자 이 예부상서는 급기야 쿵, 무릎을 꿇은 것 같았다. 아, 내로남불? 알지. 이도하는 이쯤에서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시오한의 생김새도 그렇고, 이리스티리움이라는 이름도 그렇고, 에트레제의 건물 양식까지 여태 이리스티리움을 서양의 어느 제국과 비슷하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주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귀에 익은 관직도 그렇고, 신분이니, 귀천이니… 사극에서 오조오억 번은 본 것 같은 레퍼토리다.

시오한이 무료하다 했던 게 이해가 가는 흐름이었다. 이도하도 흥미를 잃고 따분해졌다. 그는 시오한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킁, 냄새를 맡아보니 푸릇푸릇한 향이 났다. 이도하의 이마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시오한이 소리 없이 웃었다.

“천민 대부분이 아칼테케 황제 때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고, 선황께서는 아예 천민제를 폐지하셨는데 예부상서, 말해 보시오. 내가 잘못 알고 있소? 이 제국에 아직 짐이 알지 못하는 천민이 있었나? 아니면… 그대들이 또 천민을 만들었나?”

“폐하! 누가 감히 그런 불충을 저지르겠나이까!”

또 누군가 비장하게 외쳤다. 이번엔 좀 젊은 목소리였다.

이도하는 이제 시오한의 옷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늘 환자복 비슷한 걸치고 있더니 이번에는 아주 달랐다. 흰빛인 것은 비슷했으나, 화려한 정도가 남달랐다. 머리칼을 헤치고 목 뒤를 슬쩍 까보니 적어도 네 겹은 입은 것 같았다.

가장 겉에 입은 것은 백색 위에 은색 실 은은히 자수가 놓여 있었으며, 그 위로 금색 실이 얇게 엮이며 퍼져 꼭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어떻게 만든 거야. 이도하가 그 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무렴, 짐이 곡해했을 테지. 예부상서는 그런 뜻이 아니었을 텐데. 만에 하나라도 그런 자가 있다면, 충신인 예부상서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 그대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어. 그렇지 않소?”

“예… 예, 폐하. 소신, 절대 좌시하지 않겠나이다.”

아파요, 아파요, 그만 패요. 심심함에 이도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오한의 어깨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의아해서 보니, 시오한이 고개를 돌린다. 어깨에 머리를 댄 와중에 그렇게 하니 얼굴이 코앞이었다. 이도하가 움찔했다. 시오한이 속삭였다.

‘화이람, 많이 심심해?’

‘죽겠어.’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옅은 웃음소리가 대전에 퍼졌다. 어… 이게 지금 이렇게 웃어도 되는 분위긴가. 그는 조금 떨떠름했다. 시오한의 손끝이 달래듯 이도하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도하는 꿈지럭거려 아예 몸을 조금 더 붙여 기대었다. 그렇게 하니 한결 더 안정감이 들었다.

계약주를 닮아 이도하도 좀 더 뻔뻔해져, 처음의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앞에 봐.’

‘손.’

이도하가 반사적으로 뒤에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미간을 구겼다. 왜 그랬지? 너무 즉각적인 반응에 이도하가 어이없어하는 사이에 시오한은 풍성하고 긴 소매 안으로 그의 손을 감아 당겼다. 긴 손가락이 손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더니 손끝으로 미끄러졌다. 시오한의 손끝이 엄지의 뿌리부터 마디를 지나 손톱까지 덧그리듯 쓸었다. 엄지 끝을 비비자 이도하는 숨이 좀 갑갑해졌다.

“고인 물이 썩는다지.”

가는 손끝이 이번에는 엄지를 타고 올라와 검지로 이어지는 얇은 살갗을 매만졌다. 이도하가 눈가를 찡그렸다.

“이부상서, 더 말해야 할 필요가 있소?”

“분부 받잡겠나이다.”

아까의 그 젊은 목소리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마무리가 되어 가는 분위기라 이도하는 이제 끝나려나 싶었다.

“폐하.”

또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시오한이 옅게 한숨을 쉬었다. 손으로는 이제 이도하의 검지를 얽고 있었다. 마디가 긴 손가락이 검지를 감싸고 쭉 미끄러지더니, 곧 손가락 사이사이로 시오한의 손가락이 헤집고 들어왔다. 아래쪽의 연한 살이 스쳐 간지러웠다.

“상서령.”

“감히 아룁니다, 폐하. 국혼을 생각해 주소서.”

시오한에게 얌전히 손을 내어주고 있던 이도하가 돌연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시오한이 놀라 돌아보았다. 거의 얼떨결이었던 이도하도 그를 마주 보았다. 유려한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눈가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시선을 마주한 채로, 시오한이 중얼거리듯 되뇌었다.

“국혼.”

“예, 폐하. 국모도, 국본도 없는 나라가 어찌 흔들림 없이 튼튼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폐하께서 제국의 미래를 심려하신다면, 국혼을 하시어 국모를 세우심이 옳은 줄로 아룁니다.”

시오한은 여전히 이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꽉 잡힌 손에 엄지가 살살 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꼭 달래는 것 같았다.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절 향해 있는 그 황금색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같은 황금빛이었으나, 맹수의 것과는 달랐다. 홍채의 검은색 테두리가 또렷하다. 새까만 동공 주변으로 화려하게 퍼진 물결무늬가 꼭 일렁이는 것 같다. 방사형으로 뻗은 수십만 갈래가 가닥가닥 모두 빛줄기였으며, 그 위로 금모래를 흩뿌려 놓은 것 같았다. 대전의 거대한 기둥 사이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을 온전히 그가 다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만지면, 꼭 따뜻할 것처럼.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시오한에게 내어주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아 완전히 제게로 당겼다. 시오한은 반항이라고는 없이 종이 인형처럼 이도하의 가슴에 완전히 등을 대며 푹 안겼다. 와중에 이마가 콩, 부딪치자 하하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웃음소리가 대전에 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오한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든 이도하가 대전을 노려보았다.

왕좌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전을 이도하는 그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새하얗게 늘어선 기둥들은 매끈하게 위로 쭉 뻗다 나뭇가지처럼 갈라져 높은 천장을 받치고 있었다. 천장도 꼭 나뭇가지들이 얽히고설켜 둥근 아치를 이룬 것 같은 모양이었다.

양옆의 스테인드글라스로 햇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광경이 거의 성스러워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도하는 그게 아름답다고 감탄할 기분이 아니었다. 이도하는 사나운 눈빛으로, 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절 보는 대신들을 샅샅이 훑었다.

누가 국혼 소리를 냈냐.

상서령이라는 이가 누구인지 이도하가 알 리 없었다. 그가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웃음을 꾹 참는 것처럼 입술을 물고 있던 시오한이 고자질하듯이 슬쩍 눈짓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 선 대신들은 전부 대체로 나이가 많았다. 황제의 가까이에 설수록 높은 관직에 해당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도하는 분명 예의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지만, 제 할아버지뻘 되는 노인들에게 반말을 찍찍 할 수 있을 정도로 망나니도 아니었다. 24년간 뿌리박힌 유교 사상이 솟구친 짜증을 조금 억눌렀다.

반말을 할 수도 없고, 무엄하게도 왕좌에서 황제를 안고 있는 주제에 신하에게 존대를 하는 것도 우스운 꼴이다. 반 존대는 더 못한다. 이도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냥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황제의 계약자는 성질이 더러워 절 두고 제 계약주가 국혼하는 꼴 따위는 못 본다는 걸.

대전 한가운데 조그만 불꽃이 팍, 튀었다. 조그만 촛불에 불과했던 게 곧 이글이글 타오르면서 커지기 시작했다. 새의 알처럼 귀여웠던 게 순식간에 커지자 대전 안에 금세 열기가 차올랐다. 불꽃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르르릉,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전이 울리는 줄 알고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는 중이던 대신들이 화들짝 놀라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그게 잔뜩 화가 난 짐승의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으로 창백해졌다.

이글거리던 불꽃 속에서 용이 머리를 든 것이다. 꿈틀대던 것은 똬리를 튼 몸이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용은 천천히 똬리를 풀어 높고 거대한 대전을 꽉 채웠다. 고개를 꺾어 올리던 대신들이 망연하게 입을 벌렸다. 한눈에 봐도 왕좌와 완전히 똑같은 용이었다! 천장을 가든 채운 용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거대한 머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위압적인 광경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바짝 몸도 굳은 것 같았다. 위협적으로 대신들과 눈을 마주치며 용은 천천히 왕좌를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와서는 특히 노신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그들 하나하나를 살폈고, 노신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일렁대는 열기도 진짜였지만, 불꽃으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이빨도 섬세해 당장이라도 그들을 찢어발길 것 같았다.

피부에 윤이 흐르고 허리도 빳빳해 정정해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이든 이들이 주마등이라도 보는 듯 사색이 되니 이도하는 마음이 약해졌다. 제 안의 유교가 양심을 찔렀다. 이도하는 겁만 좀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환경 차이인지, 그들은 정말로 이 용이 그들을 해칠 수도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당연히, 설마 제가 진짜 저들을 해치기야 하겠나 싶은 것은 이도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는 생전 목숨의 위협이라고는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제 어머니가 아이고, 오금이 저려 죽겠다며 발발 떨었던 그랜드 캐니언의 절벽에서도 화장실 가고 싶다는 생각 따위나 하고 있었던 이도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느낄 만한 위협을 너무 상향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슬슬 그만할까, 하는 차에 시오한이 이도하의 뺨을 콕콕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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