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37화 (37/250)

37화

이도하가 홱 고개를 돌렸다. 잘 정리된 황금색 머리칼이 눈앞에서 반짝였다.

“…시오한?”

이도하에게 등을 깔린 시오한이 한껏 기운 채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를 보는 표정도, 눈도 전에 없이 황망했다. 그의 뒤편으로는 경악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수없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주 꽉 차 있었는데,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넋이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이도하는 완전히 얼이 나가버렸다. 입만 뻐끔거리다 간신히 한마디 했다.

“아, 아니… 이게 왜….”

“화이람?”

어지간히 얼이 나가기로는 시오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시오한은 믿어지지 않는 듯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둘은 한동안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하여 눈만 깜빡였다. 팔꿈치가 찌르르 한 게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이도하가 멍하니 생각했다. 웅장한 기둥들이 위엄 있게 늘어선 넓은 대전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도하가 삐그덕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좌… 왕좌였다. 거대한 용이 똬리를 튼 것 같은 모양새였다. 딱 봐도 다이아를 세공한 것 같은 날카로운 발톱이 오묘한 빛으로 빛나는 여의주를 쥐고 있었으며, 용의 눈을 장식한 푸른 보석은 차가운 빛으로 웅장한 기둥들이 위엄 있게 늘어선 대전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금과 백금으로 섬세하게 솜털까지 세공한 것 같은 이파리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엄청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좌였다. 이도하는 그 왕좌에 팔과 다리를 부딪쳤으며, 용의 품에 안긴 것처럼 위엄 있게 앉아 있던 시오한을 깔고 떨어진 것이다. 좀 꼴사나운 모양으로. 꽥, 하고 들린 비명 소리는 대전에 도열한 대신들이 너무 경악한 나머지 채신도 있고 내지른 소리였다.

이도하는 제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생에 처음으로 눈치를 보며, 이도하가 주춤주춤 왕좌에 삐죽 걸쳐진 다리부터 접었다. 대전은 여전히 끔찍하게 적막해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거의 튀어나올 듯 경악한 눈들만 이도하에게 꽂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 왜 부르지 않느냐고 중얼거리던 이도하는 이제 왜 이런 곳에서 소환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맙소사.

이도하는 그야말로 아득하게 날아가는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질끈 눈을 감고 싶었다. 처음으로 이대로 돌아가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도하는 매번 쫓겨나듯이 오즈에서 튕기기만 하느라 자의로 돌아가 본 적도 없었고, 지금은 정신이 혼미해 그런 방법 같은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도하는 슬금슬금 시오한의 뒤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래 봐야 가려질 리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여기서 벌떡 일어나 대전을 나가는 건 정말 미친 짓 같았다. 그건 대신들을 갤러리로 둔 런웨이를 걸어 나가는 꼴과 다름없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제 계약자의 간절함을 느낀 건지, 그도 아님 엉겁결에 밀린 건지, 어쨌든 시오한도 슬그머니 왕좌 끝에 엉덩이를 걸치며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도하는 시오한과 왕좌 사이로 최대한 몸을 꾸깃 접었다.

“…폐, 폐하.”

용감한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도하는 시오한의 등에 고개를 처박아 누군지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아주 노쇠한 걸로 봐서는 나이가 많은 대신인 듯했다. 시오한이 고개를 돌렸다. 이도하의 머리 위로 그의 황금빛 머리칼이 쏟아졌다.

“아, 그대들은 처음 보오? 짐의 계약자야.”

여태 단 한 번도 다른 누군가가 자리한 곳에서 이도하를 소환한 적이 없으면서 시오한이 능청을 떨었다. 술렁임이 파도처럼 대전을 쓸었다. 그래 봤자 작은 목소리인 탓에 하나도 들리지도 않았으나 이도하는 알 것 같았다. 왕좌에 앉은 황제를 깔아뭉개며 소환된 계약자라니, 정말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과연 시오한은 황제답게 뻔뻔함이 한 수 위라, 당황한 것은 처음뿐이고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아무렇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 좀 기쁜 것 같았다.

“그대들이 워낙에 지지부진한 이야기를 반복하여 짐이 좀 무료했던 모양이지.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시게.”

이도하는 살집이라고는 없었지만, 그래도 키가 컸다. 고작 사람 뒤에 구긴다고 숨겨질 덩치가 아니었다. 게다가 시오한은 품이 풍성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용에게 안기기보다 앞으로 반 뼘쯤 나와 있었다.

왕좌에 엉덩이 끝을 걸치고 앉은 황제를 무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신들은 황망했으나, 황제가 까라고 하면 까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저렇게 말하니 아무리 신경이 쓰여도 더 토를 달 수 없었다.

시오한은 대신들을 돌려 까며 심지어 느긋하게 이도하에게로 몸을 기대었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등을 마구 찔렀다. 그가 꿈틀거리더니 속삭였다.

‘간지러워.’

이도하가 한껏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뭐 하는 거야!’

‘허리 아파. 화이람, 좀 받쳐줘.’

왕좌는 대단히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확실히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용이 똬리를 튼 모양 때문에 울퉁불퉁한 데다가 세심하게 세공된 이파리들은 다소 뾰족하기까지 해서 위엄 있기는 해도 기댈 곳이라고는 없었다. 허리 건강에 좋지 않은 의자임은 분명했다. 당장 시오한과 왕좌 사이에 낀 이도하만 해도 용의 몸통이 어깨며 허리를 밀어댔다.

아니 그래도 저가 무슨 쿠션도 아니고… 쿠션으로 쓰려고 소환했나? 소환해 놓고는 밥 먹자, 한 적도 있으니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제 계약주가 때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은 게 한두 번도 아니었다. 이도하는 이미 더 없을 어이도 없었다.

짧은 저항 후에 달관의 순간은 빠르게 찾아왔다. 첫 소환에 사방을 피바다로 만들어 놔 있는 정신없는 정신에 혼까지 다 빼놓은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지, 싶어 마음의 평화까지 찾을 수 있었다.

이왕 구겨진 거 좀 편하게라도 앉자. 이도하는 혀를 차면서도 일단 꿈지럭 자세를 바꾸었다. 용의 몸통이 자꾸만 거치적거렸다. 엄청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건 잠깐뿐이고 곧 뭐 이따위로 의자를 만들어 놓았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좁은 공간에서 자세를 바꾸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도하는 한껏 집중했다. 그러다 바닥에 미끄러진 다리가 한쪽으로 쭉 튀어 나갔다.

“……”

이도하는 잠깐 진땀이 났으나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왕좌 위에 늘어진 시오한의 긴 옷자락을 끌어당겨 슬그머니 제 다리를 덮었다. 실수였지만 차라리 그렇게 하니 훨씬 편했다. 나머지 한쪽은 무릎을 세우고 나니 반쯤 시오한을 안은 자세가 되었다. 숨어도 숨지 않은 척 그는 고개를 숙여 시오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이제는 그냥 뭐 어떡하겠나 싶었다. 이도하가 속삭였다.

‘이게 뭐야.’

‘대전 회의지?’

시오한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 답했다.

‘누가 지금 그걸 몰라? 깜빡이 좀 키자 했더니 이런 곳에서 소환을 하냐.’

시오한이 조금 더 돌아보았다. 장난기 서린 눈동자가 좀 의아해 보였다. 그렇게 보니 이도하도 의아해졌다. 누군가 멋쩍게 어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대전은 또다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시오한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송구하오나 폐하…. 어… 음, 폐하의… 계약자께서는 편히 자리를 잡으시는 게 어떠한지….”

난데없이 허공에서 소환되어 황제 위로 뚝 떨어진 황제의 계약자가 어지간히 당혹스러운 건 모두 한마음이었다. 대전 회의에 참석할 정도면 이 대제국인 이리스티리움에서도 난다 긴다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관료일 텐데 어정쩡하게 말을 저는 걸 보면. 시오한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이도하가 나무젓가락도 아닌데 그 뒤에 구겨진 모습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도하는 둘째 치고, 시오한은 전혀 그렇게 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그는 차갑게 대전을 내려다보는 용의 머리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기대었다. 기대는 척하며, 제 어깨에 기댄 이도하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짐도, 화이람도 개의치 않으니 그대들도 개의치 마시게. 한 몸이나 다름없어서 그런가 아주 편해. 허니… 예부상서, 계속 하시겠소?”

“…황공합니다, 폐하. 더 이상 아뢸 것이 없나이다.”

아뢸 것이 없다기보다는 난데없는 사태에 모든 의욕을 잃은 것 같았지만, 이도하는 무시하기로 했다. 우리 언제 한 몸 됐어. 그가 중얼거렸고, 시오한의 몸이 옅게 흔들렸다. 웃는 것 같았다.

“그래야겠지. 예부상서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어찌 아직도 그렇게 몸 생각을 안 하는지 모르겠소. 그대가 나라를 걱정하여 그토록 마음을 쓰니 과연 충신이라 할 만한데… 짐이 걱정이 되어서. 내내 그리 서 있었으니 다리도 아플 텐데 이 대전에 의자라고는 짐이 앉은 이것밖에 없군.”

시오한이 물었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괜찮다면 앉겠소?”

맥이네. 잠자코 듣고 있던 이도하는 생각했다. 시오한은 웃고 있는 듯 했고, 목소리도 부드러웠으며 여전히 한가하게 이도하의 머리칼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제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황제가 제 왕좌에 앉겠느냐고 물었으니, 이건 웃으며 죽을래? 하는 것과 같았다. 아주 고상하게 돌려 말한 것뿐이다. 이도하는 이 예부상서라는 이가 뭘 잘못했기에 시오한이 이렇게 묻는지 궁금해졌다.

“폐하, 당치 않으십니다. 하늘 같은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신하된 자로서 감히 바라볼 수도 없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비장하게 외치려나 했더니 예부상서라는 이는 의외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비록 목 졸린 것처럼 꽉 조인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는 했지만.

“그래, 당치 않지.”

시오한이 여전히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부상서, 그대는 하는 말이 논리가 그래. 신분이 미천했던 자가 감히 귀한 자리에 올라서면 안 되며, 가진 바 재주가 훌륭하다 하면 그 재주를 귀하게 부리되 미천한 일신까지 귀히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 한 번 제 주제를 벗어나면 무릇 범해서는 안 될 자리까지 탐하게 되는 게 별수 없는 사람의 욕심이기 때문에, 이는 귀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그 말이오?”

“폐하.”

“그대는 재주가 출중한 사람이지 않소. 내가 예부상서를 귀이 여겨 태보의 자리에 앉히면 상서는 이 왕좌까지 넘볼 텐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