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또 무슨 어이없는 소릴 하고 싶은 겁니까?”
오한울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끝은 갈라졌다.
“왜 거기 있었지?”
“더 이상 말 섞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그가 문을 열었다.
“윤혜한테 물어보면 알겠지.”
그러나 나가지 못하고, 또다시 멈춰 선다. 등 돌린 어깨가 아래위로 들썩였다. 이도하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당신 계약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말을 내뱉은 순간에 이도하도 깨달았다. 왜 처음부터 오한울이 그렇게 적대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는지, 왜 먼저 이도하를 쫓아내려고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이 하등 쓸모라고는 없는 것 같은 짓을 하러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쾅!! 꼭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요란한 폭발음이 터졌다. 건물이 흔들리는 것 같았고, 귀신이 쥐어짜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도 들렸다. 끼이익- 고막을 긁어내는 듯한 날카로운 쇳소리에 이도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눈앞으로 불꽃이 그를 잡아먹을 듯 넘실거리며 타올랐다.
이도하는 오한울의 환영이 어린애들 놀아주기에나 딱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작정하면 어지간한 사람은 심장마비로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꽃 속에서 손이 튀어나와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어느새 다가온 오한울이었다. 눈동자는 섬광으로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닥쳐요.”
그러나 닥치란다고 닥칠 이도하가 아니었다. 설사 이 불꽃이 진짜였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 했을 이도하였다. 생각하던 것보다 대단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당신 계약주가 그 불법 도박장의 간자지?”
이것이었다. 계약주. 이도하의 신경이 제 계약자에게 쏠릴까 봐. 그래서-황제의 계약자인 이도하가 제 계약주의 신분을 알아차리게 될까 봐. 그래서 부러 이도하의 성미를 돋궈가며 이게 모두 오한울 제 문제인 것처럼만 보이게 하려 한 것이다.
“누가 간자야!”
오한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체육관이 웅웅 울릴 정도였다. 이도하는 조금 놀라 그를 보았다.
“당신 계약주가 제 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내 계약주도 그럴 뿐이야.”
오한울이 쏘아붙였다.
“…당신 계약주는 사람들 등쳐먹어서 나라를 위하는가 봐?”
“……”
오한울이 코웃음을 치며 이도하를 놓았다. 그는 묘한 기분으로 그런 오한울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귀신 곡소리 같은 비명 소리가 여전했고 불꽃도 넘실거리고 있었다. 정신 사납게 귀를 긁어대는 쇳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렇게 현실감이 떨어지는 건가.
이도하가 까딱 고개를 비틀었다. 오한울의 손목을 잡자, 불길이 꺼지듯 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도하는 여기서 오한울을 붙잡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불법 도박장의 당위성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머리 아픈 이야기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얘기를 할 만큼 오즈의 정세를 잘 알지도 못했고,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었다. 시오한은 한 번도…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그의 힘을 필요로 한 적이 없으니까.
가만 보니 오한울이 도박을 하긴 한 셈이었다. 처음부터 이도하의 신경을 깔짝깔짝 건드리며 제가 마치 정말 도박을 하다 들킬 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으니. 이도하가 정말 모든 걸 폭로했더라도 곧 누군가 오즈에서 도박을 하는 의미가 있나- 하는 의문에 도달했겠지만, 이미지에 타격이 가는 건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전부 계약자들이 오즈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궁금해했다. 오즈의 정세, 세력 구도, 전쟁 같은 큰 줄기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것까지 모두 알고 싶어 했다. 오한울이 계약자와 함께 이리스티리움에 불법 도박장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난리가 날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오한울은 그 위험을 다 감수한 것이다.
이도하는 갑자기 기분이 좀 누그러졌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오한울이 좀 다르게 보였다.
“당신 나라도 아니잖아.”
이도하가 말했다. 계약주 본인이야 제 세상이고 제 나라이니 그렇다 쳐도, 오한울은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오즈는 어디까지나 다른 세계였다. 지음 받지 않아, 계약주를 통해 계약명을 받고 마력을 매개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세상. 버젓한 현실이 있는데 계약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는 건 누가 봐도 계산이 안 맞는 장사였다.
“그러는 이도하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한울이 사납게 말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뿐이었다. 어깨에 힘이 탁 풀리며, 초조하고 사나워 보이던 오한울은 순식간에 지쳐 보였다. 퍽 자괴감이 드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 보면 결국 시간문제인 일이었다. 그도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오한울이 피곤한 낯으로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잠깐 망설인 그가 다시 말했다.
“…이도하씨. 내 계약주가 누구인지, 황제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 부탁입니다.”
본래 계약자들의 계약주가 전부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그건 일종의 개인정보였다. 오한울은 계약자가 되기 이전부터도 특기자로 유명했기 때문에 알려진 것이었다.
이도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도하가 인소더블이기 때문에, 오즈에 그를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한정되어 있어 단번에 모두가 알게 된 것이지 원래 본인 의사 없이 모두에게 공개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 오한울의 계약주가 일을 망치게 된다면, 그건 오한울의 탓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시오한은 그런 거 물어보지도 않아.”
이도하가 말했다. 그러나 말하는 그도 확신은 없었다. 정말 물어보지 않을까? 시오한은 이도하가 오한울을 분명히 알아본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황제였고, 성군이었다.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도박장을 내려다보던 눈이 생각났다.
“그러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오한울이 말했다. 별로 기대도 없어 보였다. 이도하 역시 절대 말하지 않겠다- 하고 약속할 수는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렇게 되니 둘 다 더 이상 할 말도 없었고, 오한울은 기운도 없어 보였다.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계약자니…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도하는 얼굴이 이상해졌다. 몇 번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원래 우리가 계약주 일이라면 좀 미련해지잖습니까.”
오한울은 쓰게 웃으며 터덜터덜 체육관을 나갔다. 소리도 없이 문이 조용히 닫히자, 이제 이도하는 혼자였다. 넓은 체육관에 혼자 덜렁 선 이도하는 한참을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러다 다시 소파로 가서 주르륵- 미끄러지듯 앉았다. 이도하는 멍하니 높은 천장을 응시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다채롭고 뒤죽박죽으로 섞여 머리가 복잡했다.
“…뭐 해, 당신?”
이도하가 멍하니 물었다. 텅 빈 체육관에 목소리가 울려 다시 이도하에게 돌아왔다. 그가 또 버릇처럼 눈 밑을 매만졌다.
“몸은 좀 괜찮나….”
유세오에게 듣기로는 그래도 저번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했다고 들었다. 잡다한 미사여구를 붙여대며 요란을 떨었지만 결론은 괜히 인소더블을 소환한 사람이 아니다, 대단하다- 였다.
그러면서도 반짝반짝한 눈으로 이도하를 보았는데, 제가 체감할 만큼 마력이 대단한 사람도 이도하를 소환하느라고 힘들어하는 걸 보며 이유 모를 존경심 같은 걸 느낀 것 같았다. 거기다 대고 제가 마력을 쭉쭉 막 갖다 써서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고는 차마 말 못 했다.
“…결혼은 왜 안 했어?”
시오한 오르페노스, 제국 이리스티리움의 황제. 그냥 황제도 아닌, 하나하나 굳이 꼽기도 힘든 여러 가지 이유들이 대단해 만백성의 사랑을 받는 성군. 기적의 현신. 그렇지 않아도 오즈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훑기에 딱 좋다.
이도하는 시오한에게도 팬클럽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볼 수도 없는 사람을 무슨 수로 좋아하는지는 알 수는 없었다. 그 외에도 인터넷에 시오한의 정보가 차고 넘치는 이유는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 황후가 없다는 것쯤은 그 날 마트 계산대에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오한에게 왜 황후도 후궁도 없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시오한의 조부는 대단한 정복 황제였으며, 성군으로 이름이 드높기로는 그의 아버지인 선황도 마찬가지였다. 시오한은 황후의 유일한 적자였다. 이치대로라면 시오한은 태자일 때 이미 국혼을 해 진즉에 태자비부터 있어야 했다. 왜 없는지는 추측만 난무했다.
근래에 들어 황제가 병석을 꽤 오래 지키면서 국혼과 태자를 세우는 일이 다시 떠들썩하게 대두되었다는 것도 이도하는 이제야 알았다.
“시오한, 왜 날 부르지 않아?”
벌써 사 일째였다. 이도하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빛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번져나가며 형제를 만들어냈다. 황금색 머리칼이 너울댔다. 위로는 거뭇한 하늘이 있었고, 아래에서 반짝거리는 빛이 그를 어른어른 비추었다. 더듬더듬, 어린아이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걷던 시오한이었다. 빛무리로 흐릿한 얼굴이 그를 보며 웃었다. 이도하는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날 안 불러….”
깊게 들이마신 숨이 느리게 퍼졌다.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소환은 온전히 마력을 운용하는 계약주의 영역이었다. 여기서 제가 아무리 넘어가고 싶다고 한들 먼저 들이닥칠 방법 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 무언가 북받쳐 올랐다. 이도하가 꾹 입술을 물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는 그냥 여기서 막연히 기다려야만 했다. 기약 없이….
순간 몸이 쑥 꺼졌다. 이도하는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헉, 숨만 삼켰다. 딱 알맞게 맞추어져 있던 공기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찬바람이 느껴졌다. 엉겁결에 휘두른 팔꿈치가 딱딱한 무언가에 꽝 부딪혀 찌르르하게 통증이 올라왔고, 다리도 딱딱한 것에 팍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나 등 뒤로는 푹신한 것이 깔렸다.
억! 으악! 제 비명인지 남의 비명인지 꿈인지도 모를 단말마들이 연이어 꽥 터졌다. 이도하는 어안이 벙벙했다.
“…화이람?”
어른어른 환청으로만 듣던 익숙한 목소리가, 이제는 버릇이 되어 늘 매만지는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약간 넋이 나간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