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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35화 (35/250)

35화

“둘이 아는 사이였어요?”

인사도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던 김윤혜가 물었다.

“그런 게 있어.”

“계약이 이도하씨 사회성을 길러주네.”

이도하가 김윤혜를 밀었다. 가요, 가. 김윤혜가 이도하의 발을 치워내며 일어섰다. 오한울을 지나치면서는 그제야 까딱, 고갯짓한다. 오한울도 비슷했다. 그도 특기자라 아이라를 오다가다 김윤혜를 몇 번 보았을 테니 안면은 있는 모양이었다.

막 문을 나서기 전에 김윤혜가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멋있어요 잘했어요 칭찬해요 응원해요! 눈에 띄는 입 모양에 이도하가 눈을 부릅뜨자 깔깔 웃으며 체육관을 빠져나간다.

“얘기 좀 하죠.”

그러는 사이 다가온 오한울이 물었다. 이도하는 여전히 소파에 늘어진 채였다.

“해.”

짧은 한마디에 오한울이 대번에 인상을 썼다.

“왜 반말합니까?”

“왜 선빵 쳐?”

이도하는 원래부터도 크게 예의에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성격이 썩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전지적 부모 시점으로 보았으니 감히 그를 더러 다정 같은 표현을 쓴 것이지, 실은 꽤 거리가 멀다 하는 게 맞다. 그러니 심사가 꼬인 지금 이도하는 오한울에게 예의를 차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한울은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이도하를 보며 분이 치민 것 같았다. 꾹 다문 턱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는 잠시 이도하를 노려보았고, 심기가 불편한 이도하도 삐딱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오한울이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나한테 할 말 없습니까?”

왜 반말을 하냐 따지더니 저는 끝까지 존대를 고수할 모양이었다. 삐딱하게 이도하를 노려보는 모습이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서로 반말 찍찍 해대며 질 낮은 다툼을 해대느니 나라도 챙기자, 하는 것 같았다. 이도하로서는 같잖을 뿐이었다.

“내가?”

“그쪽이요.”

이도하가 까딱 눈썹을 들어 올렸다. 또라인가…. 중얼거리며 그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혼잣말이었으나 코앞에 선 오한울이 못 들을 리는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오한울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이도하가 물었다.

“왜 선빵 쳤냐고 내가 먼저 물었는데. 그쪽이야말로 나한테 할 말이 있어야 하지 않아?”

“이도하씨. 듣자 하니 교류하는 계약자들도 거의 없고, 처음에 계약도 거부했었다고 하던데 그래서 모를 겁니다. 원래 오즈에서의 일은 여기까지 끌고 오지 않는 게 계약자들 불문율입니다.”

“불문율?”

이도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불문율? 다시 한 번 중얼거린 이도하가 시선을 들었다.

“그래, 그쪽 말대로 나는 사회성이 모자라서 아는 계약자도 별로 없어. 근데 니들이나 따르는 그깟 불문율을 뭐, 나보고 어쩌라고? 그래서 지금 나보고 거기서 있었던 일은 입도 뻥끗할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경고라도 하려고 납셨어?”

“삐딱하게 굴지 마요. 나는 지금 설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이봐요, 오한울씨.”

이도하가 일어섰다. 오한울은 슈트 장인이라는 말도 들은 만큼 키도 번듯하게 컸는데, 이도하도 못지않았다. 새파랗게 물든 시선과 마주치자 오한울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주변이 위협적으로 진동했다. 사람이 화가 나면 심장이 뛰고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로, 특기자들도 어지간히 열 받으면 특기가 새어 나오기 마련이었다.

다만 인생은 실전인 탓에, 특수 폭행으로 분류돼 붙을 가중처벌이라든가, 합의금이라든가 하는 현실적인 제약이 있어 실제로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정말 다치게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도하는 특기가 조금만 새어 나가도 그 규모가 남다를 것을 본인이 알아 여태 그런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이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진동하는 대기는 명백히 고의였고, 위협이었다. 그리고 오한울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피부로 와 닿는 것은 달랐다.

“개소리를 해도 좀 솔직하게 해.”

질끈 입술을 깨물면서도 오한울의 눈빛이 몹시 사나워졌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범생이 이미지 팔아, 환상 팔아, 신비롭고 환상적인 저세상 얘기까지 아름답게 꾸며서 잘 살고 있었는데 사실은 불법 도박장이나 드나들면서 보석 굴려 가며 놀더라, 하는 말이 내 입에서 한 톨이라도 나올까 봐 미리 입단속 하러 온 거라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라고, 그러면 이해라도 할 거 아니야.”

“착각하지 마요, 그쪽이 뭘 봤습니까? 뭘 아는데요?”

“그러게, 내가 뭘 봤지?”

빛이 확 번졌다. 반듯한 얼굴 윤곽을 따라 빛줄기가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오한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천천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옆을 보았다. 허공에 선명한 환상이 펼쳐져 있었다.

짙은 향에 눌려 나른하고 묵직하게 흐르던 공기가 빛무리처럼 일렁거리고, 화려한 샹들리에에서 난반사되는 빛 아래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뿌옇게 번져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오한울, 그의 모습은 더더욱 선명했다. 흐려진 사람들 틈, 날이 선 눈동자로 이도하를 노려보는 모습이.

“어떻게….”

“그쪽 특기를 보고 참고했지. 별로 어렵지도 않던데.”

사실 그동안 알키오라의 특기를 연습한 덕이 컸다. 그러나 굳이 지금 얘기해 줄 필요는 없는 말이었다. 이도하가 이죽거렸고, 오한울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물었다.

“뭘 바랍니까? 돈이라도 줘요?”

“…허.”

이도하가 헛바람을 내뱉었다. 환영이 쑥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는 사람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도 잠깐 말문이 막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도하는 그동안 그래도 세상이 어느 정도는 상식대로 돌아가지 않나, 했다. 이제 보니 그건 다 제가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맹맹하게 살아왔기 때문인 듯 했다. 이도하는 눈을 감고 잠깐 믿지도 않은 신을 찾으며 마음의 평안을 찾아보았다.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누르고 있던 이도하가 간신히 물었다.

“그쪽이 나한테 뭔데?”

“뭐요?”

“난 당신이 도박장을 가든 똥을 싸든 오줌을 뿌리든 뭔 지랄 염병을 하든 관심 없다고. 네가 뭐 그렇게 대단하고 의미 있는 인간이라고 내가 관심을 쏟아. 연예인 하면서 사람들이 좋다고 우와아아 관심 주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것 같아? 애초에 지금 따지러 온 게 누구야. 제 발 저려 찾아와서는 개소리를 가르치려 들질 않나, 뭐, 돈? 뭘 바라냐고?”

이도하가 짓씹듯 말했다.

“다시는 네 짜증 나는 얼굴 볼일 없게 해.”

으득- 오한울이 이를 악물더니 와락, 이도하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게 있습니까?”

“있지. 앞으로 당신이 어디에라도 나와서 바른 척하면 내가 역겨워서 구역질이 나올 것 같거든. 너 같은 새끼를 좋다고 시간 쏟고 돈 쏟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오한울이 정말 새파랗게 이도하를 노려보았다. 눈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였다.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그렇지 않아도 하얀 편인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누가 보면 꼭 이도하가 오한울을 잡는 모양새였다.

“내가 안 하겠다고 하면?”

이도하가 오한울의 손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천천히 내리누르자, 오한울은 버티지 못했다. 손을 탁, 털어낸 이도하가 차게 말했다.

“그건 당신이 상상해야지. 보아하니 상상력도 풍부한 것 같은데.”

“사람들이 누구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궁금하면 걸어보든가.”

이도하가 삐죽 입꼬리를 올렸다. 원래도 서늘한 편인 인상이 작정하고 이죽거리기로 마음먹으니 다른 사람 복장을 건드리기에는 충분했다. 오한울은 정말 울화가 치민 듯 창백했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도하를 때려주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면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는 처치였다. 그가 분노로 바르르 떨더니 홱 돌아섰다.

물론 이도하는 오한울과 그런 진흙탕 싸움을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제가 말했듯이, 오한울이 된장으로 똥을 쑤건, 똥으로 된장을 쑤건 관심도 없었다. 도박장에서도 오한울이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가 발가벗고 춤을 추고 있어도 그냥 한번 혐오하고 말았을 것이다. 오한울인지도 몰라봤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생각은 여전했다. 오한울 때문에, 그리고 그와 엮여서 또 화제가 되는 건 정말 사양이었다.

다만 오한울은 그런 이도하를 모른다. 애초에 이도하가 어떤 인간인지 오한울이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그가 절 조금이라도 폭로할까 지레 걱정해 먼저 찾아오지는 귀찮은 짓거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겁이 나서 정말 활동을 접을지 말지도 전부 오한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

성큼성큼 멀어지는 오한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도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가 신경 끝에 거슬렸다. 위화감이 들었다. 아쉬운 게 있으면 보통 조심스럽게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건 벌집을 쑤셔놓는 것처럼 이도하를 잔뜩 열 받게 한 것 말고는 아무 소득도 없는 멍청한 짓이었다.

계약자이자 연예인인 사람이, 활동 기간 내내 아무런 스캔들도 잡음도 일으킨 적 없는 사람이, 이렇게 처세술이 없다고?

왜 오한울은 저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연락을 했을까. 어차피 계약자들은 아이라에서 한 다리씩만 건너면 연구원들끼리 아는 사이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좀 더 조심스러울 수도 있었을 텐데…. 혹시나 싶어 다른 세상까지 가서 도박을 한 인간이. 도박. 오즈에서 도박…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오즈에서 도박을 한다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도, 가지고 올 수도 없는 오즈에서?

“오한울.”

막 나가려던 오한울이 우뚝 멈추어 섰다. 값비싼 정장 재킷에 감싸인 등은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문고리에 올린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은 이도하는 보았다.

“당신… 도박을 하러 간 게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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