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지난 소환에 오한울의 환영을 힘으로 찢어버렸다가 시오한을 또 앓아눕게 만든 이도하는 고심했다. 남들보다 마력을 많이 쓴다는 건 남들보다 큰 힘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어째서 번번이 시오한은 침대로 끝이 나는가. 이도하가 생각하기로 지난번에 저가 그렇게 엄청난 힘을 쓴 것도 아니었다.
이도하는 김윤혜에게 물었고,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김윤혜는 그를 체육관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반성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도하는 밥을 먹고 티브이를 듣는 동시에 핸드폰을 보면서 빌딩도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숟가락을 들어 올리는 거나, 빌딩을 들어 올리는 거나, 여의도를 들어 올리는 거나 이도하에게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인소더블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닌지라 힘의 크기를 수치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바닷물에서 티스푼으로 물을 한 줌 떠내는 거나, 바가지로 떠내는 게 별 차이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도하는 제 자신조차 한계를 모를 정도로 힘이 남아돌았고, 그러니 숟가락 하나 들어 올리는데 빌딩을 들어 올리는 것과 같은 힘을 써도 자각조차 없었다. 어차피 별문제도 없으니까. 여태까지는 그랬다.
제약이 없는 제 세상에서야 문제가 없지만, 애초에 그곳에 지음 받지 않아 존재조차 마력으로 내리눌러야 하는 남의 세계에서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인소더블은 존재가 너무 커 세계 자체를 짓누른다’ 했던 김윤혜의 말에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이도하는 소환만 해도 이미 남들보다 많은 마력을 잡아먹었다. 게다가 오즈에서 쓰는 제 힘은 오롯이 제 것이 아니라 계약주의 마력을 통해 행사하는 것인데, 평소처럼 효율 없이 힘을 써댔으니 그 마력을 감당해야 했던 시오한이 진작 죽지 않은 게 대단한 지경이었다.
“마력을 그냥 막 갖다 썼네.”
쌈박한 결론에 이도하가 움찔 몸을 떨었다.
“…두 번 죽이지는 말자, 인간적으로.”
“네, 뭐. 그럴 수도 있죠, 사람이.”
김윤혜가 대충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건성으로나마 위로했다.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말없이 구겨져 자기반성에 빠져 있던 이도하가 조금 고개를 들었다.
“근데 마력을 그렇게 빼다 쓰는데 왜 몰라? 본인은 알 거 아냐.”
“그러니까 본인한테 물어봐야죠. 이도하씨 물어볼 게 많네. 적어줘요?”
“메로나도 사다 줬는데 이럴래?”
“메로나 오억 개쯤 사도 끄떡없잖아요. 마력 막 갖다 쓰는 인심을 이런 데 쓰면 참 좋겠다.”
“오억 개 다 먹으면 사준다.”
“진짜 유치해.”
“누구 얘기하냐.”
우웅- 주머니 핸드폰이 진동했다. 요새 제 핸드폰이 내내 그랬다. 이도하는 무시하려다 짐작 가는 곳이 있어 핸드폰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오한울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3시였다. 예의는 밥 말아 먹은 것 같더니 시간 약속은 칼 같다.
-어딥니까.
꼬박꼬박 마침표까지. 진짜 웃기는 놈이네, 생각하며 이도하가 답장했다.
-체육관
그 외에도 답장을 안 할 문자와 답장하지 못한 문자들이 여전히 잔뜩 쌓여 있었다. 꼭 숙제가 밀려 있는 기분이라 들여다보면 속이 답답해졌다. 아, 도망가고 싶다. 이도하가 생각했다. 어딘가가 간절했다.
“황후는 까먹어도 마력은 꼭 물어봐요, 나도 궁금하니까.”
“김윤혜씨, 안 바빠?”
“바쁘죠. 지금 일하고 있잖아요.”
김윤혜가 이도하를 가리켰다. 진짜 도망가고 싶다. 그는 울적해지고 말았다. 김윤혜와 이도하 사이가 늘 그렇듯 그녀는 별 개의치 않았다.
“말고 또 다른 건 없어요? 특이사항 같은 거. 좀 이상하다 싶은 것도 다 괜찮고.”
“왜, 뭐가 궁금해.”
체육관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하며 이도하가 물었다.
“맹약 말이에요. 이도하씨가 한 게 일반 계약이 아니라 맹약인 거 잊은 거 아니죠?”
뒤척거리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사실 거의 잊고 있었다. 맹약뿐이랴, 계약조차도 가끔 잊는다. 이도하가 여태 오즈에 소환되어 한 일이라고는 밥을 먹고, 주방을 한 번 망쳐놓고, 시오한의 돈으로 밤거리를 구경 다닌 것밖에 없었다.
마력 문제도 있었지만 시오한은 애초에 그의 특기를 어디에든 써먹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지극히 당연하게 가졌던 왜 저를 소환했는가, 했던 의문조차도 이도하는 어느새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기야, 처음에는 제 평온한 일상에 안녕- 따위의 생각을 하며 이를 갈았던 적조차 있었다. 돌이키면 이도하 스스로도 낯설 정도였다. 돈 지랄도 해봤고,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등에 업고 행패도 부려보았으니 이만하면 권력도 부려봤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공명심이라고는 없기로 이도하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다만….
다만, 어느새 소환되지 않는 시간이 더 어색해졌을 뿐.
“…안 잊었어.”
거짓말이 뻔한 늦은 대답이었다. 표정으로 타박한 김윤혜가 말했다.
“맹약의 이점이 뭔지 모르겠어요. 한날한시에 죽는다, 그것도 추측이지 확실한 건 아니고. 그건 사실 이점이라고 하기에도 힘들잖아요. 목숨을 걸 만큼 간절해야만 맺을 수 있는 계약이라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하니까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랬는데.”
“가치는 무슨 가치야. 계약이 투자냐.”
“크게 다르지는 않죠. 계약주들이 할 짓 없어서 마력을 쓰는 게 아닌데요.”
“그냥 소환했을 수도 있지.”
“누가 이유 없이 마력을 낭비해요? 그냥 목숨 거는 사람도 있어요? 고양인가.”
이도하는 꾹 입술을 물었다. 미간이 구겨진 얼굴이 짜증스러웠다. 김윤혜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네, 이도하씨. 처음에는 미친놈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안 궁금해요?”
“내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궁금한 거잖아.”
“그게 지금 이도하씨가 여기 있는 이유잖아요.
이도하가 김윤혜를 보았다. 김윤혜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아이라에 입사했고, 이도하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김윤혜는 13살이었다. 머리는 좋아도 어쨌든 13살이었다. 그때 이후로 줄곧 6년을 봤으니 이도하에게 김윤혜는 여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윤혜씨- 하고 꼬박꼬박 존칭으로 부른 것은 고작 13살의 나이에 가운을 입고 나타났던 그녀를 존중해서였다. 김윤혜도 오빠, 같은 다정하고 말랑한 호칭 대신 이도하씨, 하고 꼬박꼬박 불러왔다. 그게 이도하를 존중해서는 아니었음을 그도 여태 알고 있었다.
“대단하다, 김윤혜씨.”
이도하가 말했다. 평소 둘의 대화를 생각하면 빈정거리는 것과 같았으나,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김윤혜가 짧게 혀를 찼다.
“반칙하지 마요, 이도하씨.”
“김윤혜씨 이과라 반칙의 뜻이 뭔지 잘 모르나 봐.”
“내가 이도하씬가, 멀티도 안 되게. 나 인류학 학위도 있거든요.”
“학위 수집이 취미야?”
“재미로 하는 게 취미면 틀리지는 않네. 말 돌리지 마요. 갑자기 왜 그래요?”
이도하가 얼핏 찌푸리더니, 시선을 돌려버렸다. 김윤혜도 허투루 이도하를 6년이나 봐온 게 아닌지라 이럴 때면 여러 말 섞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이쯤 되니 김윤혜도 부루퉁하게 입이 튀어나왔다.
“진짜 웃겨, 이도하씨.”
“또 뭘?”
“가만 보면 매사에 늘 관심 없는 척하면서 되게 감정적인 거 알아요?”
“당신이 자 같은 거야. 평소에 선 그을 때 자 안 쓰지?”
“허, 참.”
김윤혜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 같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됐어요, 오늘은 완전히 텄네. 그녀는 결국 손을 흔들었다. 맹약은 근래에 김윤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나 오늘 인소더블인 이도하가 힘을 얼마나 마구잡이 써 왔으며, 그게 또 오즈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봤으니 그것만으로도 영 시간 낭비를 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도하의 말처럼 김윤혜 역시 정말 자가 아니기도 했다.
김윤혜가 길게 늘어진 이도하의 다리를 치워버리고 털썩 소파에 앉았다. 이도하가 다리로 밀어냈으나, 김윤혜도 버텼다. 아, 좀 접어 봐요. 길지도 않으면서. 너보다 길거든. 유치하게 말싸움을 벌이며 잠시 아웅다웅 투닥거린 둘은 잠시 후에야 결국 이도하가 다리를 접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김윤혜가 가운 주머니에서 메로나를 두 개 꺼냈다. 주머니에서 나온 아이스크림인데도 여전히 냉장고에 들어있는 것처럼 차가웠다. 김윤혜가 하나를 이도하에게 던졌다. 분명히 배를 겨냥하고 던졌는데 허공에 붕, 뜨더니 봉지까지 쭉 뜯어졌다.
“좀 움직여요, 좀. 돼지 되겠네.”
“특기가 칼로리 더 많이 먹는다고 김윤혜씨가 그랬다.”
“그리고 어디 가서 그런 농담 하지 마요. 아재 소리 들어요.”
“인터넷에서 본 거야.”
“그게 아재 같다고요.”
“메로나 내놔라.”
“두 개 먹든가.”
“가져, 가져. 너 다 먹어.”
“됐어요. 내가 양보해야지 뭐.”
어휴. 김윤혜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둘은 널찍하고 하얀 체육관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 앉아 한동안 아이스크림만 씹어 먹었다. 김윤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도하씨, 그때 그 약쟁이 있잖아요.”
“어.”
“티브이 나와서 줄줄 울면서 사과했다던데 봤어요?”
“그걸 왜 봐.”
“하긴, 나도 안 봤어요. 근데 생각은 해 봤어요.”
“무슨 생각.”
이도하가 물었다. 김윤혜는 벌써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남은 하드만 입에 물고 있었다. 김윤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막 입을 열려는 찰나에, 매끄럽게 체육관 문이 열렸다.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큼직한 남자가 서 있었다. 잘 세팅된 머리나 차려입은 쓰리피스까지, 금방 티브이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주연이 상견례 프리패스상이라고 했던 반듯하고 단정한 얼굴은 늘 보이는 것과 달리 웃음기라고는 없었지만.
오한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