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문제는 좀 더 큰 해프닝이었다. 이도하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재빨리 도약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그와 동시에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초코톡이에요! 하는 그 짧은 알람이 할 말조차 마치지 못했다.
쏟아지는 메시지에 알람은 목 부러져 고장 난 인형처럼 촠촠초코촉촉! 하며 알람을 씹어대 이도하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카페에서 일어났던 일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도하만 잊어버리고 있었다.
당장 오한울을 찾아갈 생각으로 부릉부릉 시동이 걸려 있던 이도하는 그만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다. 돌아오자마자 꼴사납게 의자와 테이블 사이로 우당탕탕 넘어지는 꼴을 전국구로 생중계 한데다가 모르는 사람, 안 친한 사람, 친한 사람, 친척들에게까지 온갖 문자가 미친 듯이 쏟아지니 이도하는 단숨에 피곤해졌다.
더구나 오한울이 괘씸하긴 하지만 야단법석이 난 인터넷을 직면하고 나니 화가 난들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여긴 오즈가 아니었다. 오한울이 그 정신 나간 약쟁이도 아니고 다짜고짜 찾아가서 멱살을 짤짤 흔들었다가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고 나니 오한울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하나씩 하자, 싶은 마음이었다.
해서 이도하는 의도치 않게 삼 일 동안 두문불출하게 되었다. 문자로도 모자라서 밖에서 마주친 누군가 멋있어요! 잘했어요! 칭찬해요! 응원해요! 따위로 파이팅이라도 해 보이면 쪽팔리고 민망해 건물 두어 개쯤은 무너트릴 것 같았다. 그는 제 특기 제어 능력을 비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건 불가항력일 테였다. 그러나 이도하는 장바구니를 던지는 어머니를 이길 능력도 없었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보여주는 거지.”
“장 같이 보는 게 다정한 거예요?”
“그럼, 다정이 별거니. 같이 시간 보내고, 혼자 할 수 있는데 굳이 같이 해 주고, 많이 웃어 주고, 그런 게 다정이지.”
소시지를 고르며 그의 어머니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이도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그냥 짧게 웃고 말았다. 그는 빈말로도 다정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저는 썩 다정하거나 싹싹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다정하다고 하면….
[화이람.]
언뜻 귓가로 목소리가 맴돈다. 또. 이도하는 소리 없이 한숨을 삼키며 카트 손잡이에 턱을 괴고 늘어졌다. 다정이라고 하면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시오한. 저를 향해 웃던 얼굴이 떠오르니 속이 술렁술렁한다. 이도하가 이마를 문질렀다. 엄지손가락으로는 무의식적으로 눈 밑을 매만졌다. 이제는 버릇이 되어 버렸다.
“네 계약주 얘기나 좀 해봐.”
“네?”
이도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도하를 쳐다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소시지와 베이컨을 카트에 넣었다. 이게 무슨 타이밍이…. 이도하는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이유를 알 수 없게 돌연 부끄러움도 밀려들었다.
“어째 한 번을 얘길 안 하니. 황제라며, 어때? 막 볼 때마다 폐하를 뵙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일어나라, 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되고 막 그런 거 아냐?”
“아니… 그런 거 안 해요. 그냥 안녕, 해요.”
“진짜? 그래도 돼?”
이도하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의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이도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은 무슨, 그런 인사도 안 한다. 매번 시오한은 화이람, 하고 먼저 반겨 주었으니 그런 인사는 필요 없었다.
이도하도 딱히 그를 향해 예를 차려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궁인들이 하는 걸 보면 그런 절차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그는 해본 적이 없었다. 이도하는 그냥 이 대화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가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어, 그냥. 그냥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 다행이네. 엄마도 되게 궁금한데 볼 수도 없고.”
“…좋은 사람이에요. 더 살 거 있어요?”
다시 한 번 말하며 이도하는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다.
“맥주 사야지, 맥주. 그럼 황후는 어때, 엄청 예뻐? 중국 드라마 같은 거 보면 황후들이 엄청 화려하잖아, 머리 장식도 이따만 해가지고. 거기도 그래?”
그러나 멀리 쏘아 보내려고 했던 대화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이도하가 우뚝 멈춰 섰다. 밀던 카트가 그의 손을 떠나 혼자 탈탈 굴러가더니 초콜릿 진열대에 쿵 부딪혔다. 중심을 잃은 초콜릿 하나가 카트 안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어머니가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네?”
“황제면 황후도 있고 후궁도 있고 그럴 거 아냐? 아니야?”
“……”
이도하는 입만 뻐끔거렸다. 그건… 그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소환될 때마다 시오한은 늘 혼자 그를 맞이했다. 시중을 드는 궁인들도 옆에 없었고, 기사들도 밖에서 대기했다. 그게 아주 당연해 보여서 이상하다고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니에요.”
이도하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대답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황후가 저를 미워하는지 좋아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도하야?”
“으악!”
“악!”
그의 어머니가 넋이 나간 아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도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고, 덩달아 그의 어머니도 놀라 왁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흘긋흘긋 쳐다보던 시선들이 단숨에 몰려들었다. 이도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깜짝이야!”
“가, 갑자기 찌르니까 그러잖아요. 맥주, 맥주 얼른 사서 가요. 배고파 죽겠다.”
이도하가 카트를 붙잡아 황급히 맥주 진열대로 성큼성큼 걸었다. 늘 마시는 맥주를 덥석 쓸어 담아 카트에 와르르 쏟아 넣었다. 갑자기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
“왜 없지?”
이도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한숨 소리가 크게 울렸다. 김윤혜의 한숨이었다.
“그러게요. 왜 없지, 집중력이?”
“왜, 잘 떠 있잖아.”
넋을 놓은 와중에도 듣기는 들었는지 이도하가 대답했다.
“떠 있는 게 문제예요? 띄우려고 마음먹으면 이도하씨가 뭘 못 띄워요? 대륙도 통째로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소파 하나 띄웠다고 자랑해요? 먼지 한 톨 들어 올릴 힘으로 하라고요. 먼지 한 톨이 얼마나 무거운지 설명해 줘야 해요? 이도하씨, 이과도 아니잖아요?”
“김윤혜씨, 요즘 랩 배워?”
벌써 한 시간 째 넋 나간 이도하를 인내하던 김윤혜가 다다닥 쏟아 붙였고, 그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김윤혜가 냅다 물고 있던 하드 막대를 집어던졌다. 무게감도 없는 조그만 나무 막대가 이도하의 머리를 통 때리고 바닥에 나동그라지더니, 곧 두둥실 떠올랐다.
“그래요, 뭐 나도 띄우고 건물도 층층이 분리하고 다 해요. 보니까 넋은 이미 내 님 찾아서 갔네. 글렀어요.”
“아우, 좀 조용히 좀 하자.”
이도하가 머리를 짚었다.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허공을 유영하던 나무 막대가 다시 이도하의 머리 위로 통, 떨어졌다. 진짜 바보 같네. 김윤혜가 혀를 찼다.
“자, 봐요. 되게 쉬운 논리예요. 계약주가 결혼을 해야 하는데 아직 안 했다, 이상하다, 궁금하다. 가서 물어보고 싶다. 가려면 마력 운용을 알아봐야 한다. 마력 운용 알아내면 가서 물어보고 오래 알콩달콩 연애도 할 수 있다. 그럼 지금 뭘 해야 할까요?”
바닥에 앉은 이도하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김윤혜는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가며 설명했다. 그는 말도 없이 뚱하게 김윤혜를 바라보았다. 뭐가 문제인가 싶어 김윤혜는 그대로 마주 보았다. 체육관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곧 김윤혜가 우와, 하고 감탄했다. 뜬금없는 반응에 이도하가 얼굴을 구기고는 물었다.
“왜?”
“이제 부정도 안 하네요? 진짜 사랑에 빠진 거구나!”
김윤혜가 짝짝 박수를 쳤다. 이도하는 앓는 소리를 하며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김윤혜씨, 내가 잘못했어. 우리 그냥 여기 집중하자.”
“잘 생각했어요. 소파 내려놓고 숟가락부터 다시 들어봐요.”
김윤혜가 냉큼 받아먹었다. 김윤혜는 이도하와 비슷했다. 남이 사랑 놀음을 하건 쌈박질을 하건 별 관심도 없다. 처음부터 게이니 뭐니 했던 것도 다 이도하를 놀려 먹으려던 것뿐이었다. 눈앞에서 이도하가 남자와 키스를 해도 김윤혜는 방을 잡아요, 정도의 반응이나 보일 것이다. 아이라의 연구원들이 대체적으로 그렇듯 김윤혜도 탐구에만 진심인 인간이었다.
쿵, 소리와 함께 소파가 내려오고 얌전히 바닥에 놓여 있던 숟가락이 두둥실 떠올랐다. 이도하는 여전히 뚱하게 턱을 괸 그대로였다. 이 정도 일에는 눈 한 번 깜빡할 필요 없었다. 김윤혜가 말했다.
“괜한 힘쓰지 마요, 딱 떨어트리지 않을 정도만, 좀 더 빼 봐요, 더더더더더… 됐다. 지금 딱 그대로 소파 드는 거예요.”
허공에 그려놓은 것처럼 딱 고정되어 있던 숟가락이 위태롭게 흔들릴 쯤이었다. 이도하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평온하게 놓여 있던 소파가 지진이라도 만난 듯 덜덜 흔들리며 조금씩 떠올랐다. 흠. 가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유심히 바라보던 김윤혜가 됐어요, 하고 말했다. 소파도 숟가락도 요란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맞네. 이도하씨가 범인이었네요.”
“…맞아?”
“맞아요.”
“아우….”
이도하가 몸을 숙였다. 온몸을 구기는 수준으로 찌그러졌다. 그가 찌그러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닌지라 핸드폰을 찰칵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숨길 생각도 없어 셔터 소리가 크게 났으나 이도하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반성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