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30화 (30/250)

30화

“시오한.”

이도하가 절 감싸 안은 시오한의 팔을 쥐었다. 등 뒤로 시오한의 가슴이 따뜻하게 와 닿았다. 쿵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제 것인지 시오한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소리는 하나였다.

“그래, 화이람.”

시오한이 대답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순식간에, 이도하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우우웅- 홀 전체가 진동했다. 공기가 긴장하며 납작 엎드리는 듯 압박감이 내려앉았다. 아비규환으로 도망치던 사람들의 형체가 흐릿하게 떨렸다. 비명 소리는 진즉에 사라졌다. 막혔던 장막 너머로 들리듯 웅성거리는 ‘진짜’ 목소리가 환상을 너머로 들려왔다.

달리던 사람들이 우뚝 멈추었다. 시선들이 일제히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일그러진 얼굴이 그를 노려보았다. 꿈에라도 나올까 섬뜩한 장면이었으나, 이도하는 코웃음을 쳤다. 뭐- 저 얼굴이 다 김윤혜였더라면 한 번은 움찔했을지도 모르겠다.

우웅- 진동이 강해졌다. 특별한 기술 같은 것도 없었다. 이도하는 그야말로 힘으로 이 넓은 도박장 전체에 펼쳐진 특기를 찢어버리고 있었다. 애써 저항하며 버티는가 싶던 환영이 결국 산산조각으로 찢어지기 시작했다.

천 조각이 찢어지듯 환영은 사방팔방에 구멍이 나며 현실이 드러났다. 도박장을 꽉 채우고 부딪치는 특기에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든 사람들의 모습이 이도하를 노려보는 사람들 틈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퍽 괴기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환영은 실오라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진동하던 소리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도박장 전체에 흐르던 소리도 사라졌다. 달려가고 발버둥 치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나 보석을 주사위 대신에 굴려대던 인간들은 미어캣처럼 일어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기야, 아무리 도박에 정신이 나갔어도 이쯤 되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도하는 그 틈에서 환영 뒤로 사라졌던 오한울을 발견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이도하를 노려보다, 그대로 흩어져버렸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옅은 푸른빛이 남은 불씨처럼 맴돌다 사그라들었다. 역소환이었다.

“…어떡하냐. 망했네, 당신 시찰.”

이도하가 말했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시오한이 푸스스 웃었다.

“글쎄… 그대를 알아본 건 저 계약자뿐인 것 같은데. 망했더라도 괜찮지만, 일단은 나갈까. 곧 복잡해질 것 같으니.”

“허탕 쳤잖아.”

“그건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했을 때 쓰는 말이지.”

조금씩 웅성거림이 커지는 도박장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다시 계단으로 올라왔다. 뭘 제대로 한 것도 없이 이 사달이 났으니 이도하는 아무래도 그저 시간 낭비를 한 것 같다는 찝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단란하게 구성된 집 안은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기분 탓인지 조금 더 스산해진 느낌이었다. 발밑으로 드디어 소란이 일고 있는지 고함 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이 흘러나왔다. 이도하가 현관 손잡이를 잡았다. 갑자기 몸이 훅 뒤로 당겨졌다. 콰직-! 현관문을 뚫고 칼날이 짓쳐 들어왔다. 시오한이 뒷덜미를 당기지 않았으면 그대로 안면이 뚫렸을 깊이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칼끝에 이도하가 숨을 들이켰다. 시오한이 먼저 움직였다.

뒤에서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칼이 검 집을 긁고 빠져나왔다. 완전히 빠져나온 순간 번쩍 불꽃이 튈 정도였다. 시오한이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커다란 궤적이 어둠 속에 번쩍였다. 문짝이 사선으로 쩍 갈라졌다. 이도하도 입을 쩍 벌렸다. 이 미친?! 경악하면서도 이도하는 일단 문을 걷어차고 보았다.

잘려나간 문이 쾅! 튕겨 나갔다. 그 뒤에 숨어 있던 이가 분분히 물러서다 별안간 바닥으로 콱 엎어졌다. 바르작거렸으나, 뭔가에 짓눌린 것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옆에서 또다시 무언가 번쩍했다. 바람이 홱 일며 머리칼을 흔들었다. 캉! 쇳소리가 나더니 무언가 바닥으로 날아갔다. 부러진 검 조각이었다. 시오한이 이도하를 당겨 현관문을 빠져나왔다. 그가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는 궤적은 크고 빨랐으며, 검이 지나간 자리는 반드시 무언가 잘렸다. 막아서는 게 검이든 팔이든 어김없었다. 바닥으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이번에는 검 조각이 아니었다.

“으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 소리에 이도하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언젠가 그를 질색하게 만들었던 비릿한 향이 코를 찔렀다. 앞쪽에서 또 누군가 달려들었다. 이제 보니, 죄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달려들던 이는 이도하에게 닿지도 못했다. 옆에서 거대한 망치라도 후려 맞은 것처럼 남자가 홱 날아갔다. 와장창! 저택의 외벽과 창문을 부수고 들어가 처박혔다. 망할, 이도하가 욕지거리를 했다.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는 소란임에도 옆집도 앞집도 조용했다. 하기야, 지하에다가 그 정도 크기의 도박장을 파놨으면 옆집도 앞집도 다 도박장 입구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경찰 비슷한 것은 있을 테였다. 그러나 곧 이도하는 그 경찰 비슷한 것을 기다릴 여유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눈앞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캉! 시오한이 휘두른 궤적에 튕겨 나가 바닥에 나동그라진 것은 뾰족한 단도였다. 뒤에서 뻗어온 팔이 이도하를 당겨 안았다. 갈색 머리칼이 이도하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달그락거리던 단도가 떠오르더니 던져진 방향으로 다시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억- 멀리서 외마디 비명이 퍼졌다.

집 안쪽이 소란스러웠다. 도박장에 있는 인원이 이대로 빠져나온다면 지금보다 더한 난장판이 될 테였다. 시오한이 노출되는 것도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를 감싼 몸이 뜨거웠다.

이도하가 시선을 돌렸다. 왜곡이 사라진 안경 너머 어느새 돌아온 황금색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매끈한 턱 선을 따라 땀방울이 미끄러져 내렸다. 턱 끝에 매달려 있다가, 톡 떨어졌다. 이도하의 어깨 위로.

이도하가 몸을 돌렸다. 멀쩡히 서 있는 것 같던 시오한이 휘청였다. 이도하가 그를 껴안았다. 열이 나고 있었다. 벌써 몸에 무리가 가고 있었다. 반드시 쓰러지겠지만, 여기보다는 에트레제에서 쓰러지는 게 백번 낫다.

“…한 번만 참아.”

시오한이 몸을 숙였다. 이도하의 등을 감싸 마주 안으며 그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리광을 부리듯 품을 파고들었다. 쾅-! 어디선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욕설을 쏟아냈다. 완전히 개판이었다.

이도하의 눈이 다시 한 번 섬광으로 새파랗게 물들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인 다음 순간에는, 그 모든 소란이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사위가 고요했다. 시오한의 침실이었다.

챙그랑- 시오한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바닥을 굴렀다.

“읏.”

묵직하게 쏟아지는 무게에 이도하는 재빨리 시오한을 받쳐 안았다. 바로 뒤가 침대였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밀었다. 시오한이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고, 딸려간 이도하가 그의 위로 엎어졌다.

지난번의 교훈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근래에 시오한이 침상 신세를 많이 진 탓인지 발치에도 끈이 달려 있었다. 이도하가 거칠게 끈을 잡아당겼다. 금방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궁인이 고개를 조아린 채 들어섰다.

“부르-”

“당장 가서 아무나 좀 불러와요. 의사든 계약자든.”

그들의 황제도 아닌 이도하의 목소리에 궁인이 흠칫 몸을 떨더니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눈을 크게 뜨며 놀라더니 즉각 대답했다.

“분부 받잡겠나이다.”

그가 재빠른 걸음으로 종종걸음쳐 나갔다. 폐하- 어찌! 따위의 눈물 바람을 하며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소리 없이 육중하게 닫히는 문을 잠깐 노려보던 이도하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긴 황금색 머리칼이 침대에 화려하게 흩어져 있다. 시오한이 옅게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뭘 웃어, 미련한 인간아.”

퉁명스레 타박하여, 이도하가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체온계 따윌 가져와볼 필요도 없이 그냥 뜨거웠다. 아주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밤바람에 차가워진 이도하의 손이 기분 좋은 듯 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시선이 흐렸다.

“…어쩔 수가 없어. 화이람.”

“또 나 때문이라고는 하지 마라.”

말해놓고 이도하는 입을 다물었다. 따지고 보면 저 때문은 맞는데, 이게 또 완전히 저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영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언제부터야.”

시오한이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열이 점점 끓어올라 몽롱해지는 듯했다. 쯧- 이도하가 입술을 씹었다. 이대로 제가 돌아가 주는 게 제일 좋다는 걸 알지만… 손발이 붙은 듯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 누가 올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문득 시오한이 손을 뻗었다. 이도하가 잠자코 그 손이 제 뺨을 덧그리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화이람.”

“…그래.”

“…보고 싶었어.”

“……”

“보고 싶었어…. 화이람.”

쌕쌕, 시오한이 달뜬 숨을 내뱉었다. 이도하는 떨어지려는 손을 잡아챘다. 잠시 망설이다,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시오한이 눈을 휘며 웃었다. 가슴이 저릿했다. 꼭 누가 꽉 틀어쥔 것처럼.

“시오한.”

“…응.”

“당신… 나를 기다렸어?”

“…기다렸어. 많이……”

“…내가, 맞아?”

시오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늘 그렇듯,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초점이 흐려진 황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이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없는데. 나를 처음 소환한 건 당신이잖아, 시오한. 그런데 당신은 나를 기다렸다고 하니까… 나는….”

이도하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시오한이 나직이 웃었다. 그가 손을 뻗었다. 뒷목을 감싸 당겼다. 손에 거의 힘도 없었으나, 이도하는 순순히 그가 당기는 대로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맞닿았다. 시오한이 가만히 그의 뒷목을 매만졌다. 이도하가 애꿎은 시트를 꽉 쥐었다.

“…괜찮아. 화이람. 아무 걱정하지 마….”

“……”

다급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꾹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겨우 말했다.

“내가 하기엔 좀 이상한 말이라는 거 아는데, 시오한. 좀….”

“……”

“…아프지 마.”

이도하의 몸이 흐려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지탱하고 있던 것이 사라진 손은 가슴 위로 털썩 떨어졌다. 푸른 빛무리가 어른거리다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조용한 밤에 제 숨소리만 들린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컴컴한 어둠뿐이었다. 시오한은 눈을 감았다. 옅은 한숨이 가볍게 퍼졌다.

문득 시오한이 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동그란 것이 손에 잡혔다. 힘겹게 꿈지럭거리며, 그가 물건을 꺼내었다. 주먹만 한 유리 안에 조그만 숲이 차 있다. 토끼 두 마리가 앉아 있었고 동그란 윗부분을 가득 채우며 푸르게 퍼진 잎사귀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이야, 여기도 이런 걸 파네.’

‘뭘?’

‘예쁜 쓰레기.’

‘사줄까?’

‘뭐? 아니, 예쁜 쓰레기라니까. 잠깐- 시오한, 사지 마!’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거뭇하게 물들어가는 시야 너머로 시오한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물가물 눈을 감자,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흔들리는 것 같다. 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시오한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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