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미쳤어?”
이도하가 정색을 했다. 질색을 하는 그 표정에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야. 하지만 그대가 먼저 그렇게 불렀는걸.”
“내가 언,”
번뜩 떠오른 기억에 이도하가 이마를 짚었다.
“그건 그게 아니라… 아니, 틀린 건 아니잖아. 아, 잊어버려.”
“그건 내가 못하는 일이네.”
“뭐든지 잘한다며?”
“뭐든 예외가 있는 법이니까.”
시오한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주 얄미웠다. 이도하가 부르르 떨었다. 예로부터 남자는 혀끝 손끝 좆끝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변태야.”
제가 한 말이니 달리 도리도 없고. 심보가 오른 이도하가 툭 던졌다. 시오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
“그럼. 당신이 나랑 처음 하는 게 어디 한두 개야?”
누가 그를 두고 미친놈 소리를 하겠으며, 부정적이라고 타박을 하겠는가 말이다. 여태 본 시오한의 신하들은 그를 무슨 신 대하듯이 떠받들었다. 이도하가 괜히 유난이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 정도로, 시오한의 옷자락 하나에 손을 대는 것도 황송하고 송구스러워했다.
그러나 김윤혜의 비유도 그렇고, 그 뒤로도 이도하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시오한은 이 이리스티리움인들에게는 정조와 이순신을 합친 것과 다를 바 없는 황제였다. 나라를 평안하게 안정시키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사람을 아낄 줄 알고, 치우침 없이 공정하지만 억압하지 않으며 자애롭다- 하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광개토대왕이라고 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럼 시오한의 아버지는 뭐라고 해야 하나. 정복사업을 펼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리스티리움을 거의 혁신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모든 분야에서 기틀까지 정비해 높은 게 선황이었다고 하니, 세종대왕?
가만, 유난이 아니구나. 이래서 역지사지라고, 이도하는 새삼 눈앞의 제 계약주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실감이 났다. 대단한 게 아니라 위대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반성의 시간은 또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그래, 그대는 늘 내 처음이지. 그치만 변태란 말은 정말 새로운걸.”
시오한이 즐거운 낯으로 말했다. 심지어 흥미로워 보였다. 마치 설마 제가 정말 변태일까,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그 대단한 황제가 늘 저렇게 웃고 뭐든 다 해줄 것처럼 구니 실감하지 못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소환된 건 이도하이며, 소환한 건 시오한, 그인데도. 그러니 전혀 이상하지 않지…. 별안간 기분이 이상해진 이도하가 말했다.
“…당신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우산을 엎어놓은 것처럼 거대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둘 사이를 지나갔다. 가면무도회처럼 화려하게 장식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잠깐 고개를 숙였던 시오한이 다시 다가왔다.
“큰일이네. 그대에게는 그냥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그건 첫 소환부터 글러 먹은 것 같은데.”
이도하가 퉁명스레 말했다.
“당신은 그때부터 이미 좀 이상한 사람이었어.”
정확히는 미친놈이었지만, 이도하는 말을 순화했다. 어쨌든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미친놈은 아니니까. 물론 지금도 종종…. 이도하가 픽 웃었다. 그러나 시오한은 난처하게 신음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망설이는 것 같았다.
이도하는 의아해졌다. 좀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말이 심했나. 하지만 이 정도 말에 별로 아랑곳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고민하느라 이도하도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갑작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화이람.”
“그거.”
거의 동시에 입을 연 두 사람의 말이 겹쳤다. 먼저 말하라는 듯 시오한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감히 그와 이렇게 말을 겹치는 사람이 없을 텐데도 시오한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도하에게 양보한다. 이도하는 손바닥이 간지러운 기분에 괜히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먼저, 내가 해가며 시간 낭비를 하닌 성격은 아닌 터라 그는 사양하지 않고 먼저 말했다.
“운 그거. 이루어지지 않을 우연한 가능성이 싫으면 운명이라고 해. 한 글자만 더 붙이면 되네.”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싫은 거라면, 반드시 이루어질 가능성으로 생각하면 되는 게 아닌가. 운이라면 그게 그거 같은데. 그러나 말하고 보니 이게 맞는 말인가 싶다. 게다가 곧바로 조금 민망해졌다. 아무래도 운명이니 하는 건 좀 그렇다. 이도하가 꿋꿋하게 말했다.
“아니, 그냥 팔자라고 하자. 될 놈 될?”
“……”
시오한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입 안이 바짝 메말랐다. 어떤 표정도 아니었지만 이도하가 보기에는 꼭 신기하게 보는 것 같았다. 조금의 민망함에 부끄러움이 더해졌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에 이도하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래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괜한 말을 해서는. 혀끝, 손끝, 좆끝…. 그가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내 말은. 딱히 당신이 싫어서 소환을 거부했던 게 아니라고. 그냥… 난 그냥. 말했다시피 내가 도박을 못 해서 그래.”
거의 반쯤 포기한 이도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오한은 여태 한 번도, 어째서 그랬는가 묻지 않았다. 그래서 이도하도 잊고 있었다. 코끝을 찌르던 피비린내도, 정갈한 옥수수를 털어주겠다며 이를 갈던 것도 이제는 그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 떠오르니 그래도 말은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들었다.
가벼운 웃음소리에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대 말이 맞아.”
시오한이 활짝 웃었다. 정말로 기쁨만 가득 담고 있는 미소였다.
“그대 말이 다 맞아.”
“…그래서. 당신은 무슨 말 하려고 했는데?”
시오한이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아아악-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고통스럽고 분노한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나른하게 흐르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내부에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이 즉시 놀란 참새 떼처럼 고개를 들더니,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입구가 하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이도하도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감싸 당겼다. 단단한 어깨가 부딪쳤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시오한이었다. 어느새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혼비백산한 홀을 바라보며, 그가 이도하를 벽 쪽으로 이끌었다.
“황제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외쳤다. 비명 소리로 뒤섞인 와중에 또렷한 목소리가 쨍하게 귓가로 박혀 들었다. 칼을 꺼내 드는 듯한 날붙이 소리가 곳곳에 섞여 있었다. 이도하는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곁에 붙은 시오한의 머리칼은 여전히 칙칙한 갈색이었고, 안경도 그대로였다.
안경 하나만 쓰고도 길거리를 멀쩡히 돌아다녔다. 저마다 제 살길을 모색하느라고 정신없는 와중에 이런 시오한을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체 누가? 처음부터 시오한이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 이건 함정인가?
밀치고 달리고 넘어지는 사람들이 각 입구에서 발버둥 치느라 아비규환이었다. 비명 소리가 시끄러워 머리가 어지러웠다. 탁한 공기에 숨이 답답했다. 뭔가 위화감이 들었으나,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이도하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몰아붙여진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본능으로 특기가 꿈틀거렸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벗겨낼 수 있는 담요 아래에 그는 깔려 있었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시오한이 그를 감아 당겼다.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지그시 내리눌렀다. 쿵쿵,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시오한이 속삭였다.
“화이람, 진정해.”
문이 탁- 닫히듯 사위가 조용해졌다. 주변으로 공간이 유리되고, 마치 다른 곳에 접어든 것과 같았다. 계약주의 목소리에 반응해,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던 힘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도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이도하는 홀 위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파랗게 섬광으로 물든 눈이었다. 그는 똑바로 이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인 다음에는 환상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도하는 분명히 보았다. 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일그러지는 얼굴을. 의도치 않게 너무 많이 봐서, 알아볼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오한울?”
단정하고 반듯한 얼굴에 예의 바른 미소. 유세오와 더불어서 연예인인지 계약자인지 모를 정도로 유명한 계약자였다. 이도하는 유세오도 코앞에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지만, 오한울은 그것보다 더 많이 여기저기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반듯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공익 광고에도 등장하고, 어디 어디 학교에 멘토링도 가고, 하여간에 안 보려야 보지 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근데 오한울이 왜 여기서 나와.
“화이람?”
“잠깐….”
오한울 특기가 뭐였더라? 이도하는 뉴스만 끝나면 나오던 공익 광고를 떠올렸다.
휠체어를 탄 채 시무룩한 얼굴로 골대를 올려다보던 아이, 그 옆으로 공이 굴러오고, 둘이 함께 농구를 하다가, 휠체어 탄 아이가 공을 넣기 전 배경이 바뀌면서 화려한 경기장으로 변하고… 조그만 시골 교정의 휑한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아이, 토슈즈 없이 발레를 꿈꾸는 아이, 놀이터에서 혼자 꽃을 춤추게 하던 아이, 누군가 손을 내밀고, 환한 미소가 떠오르고… 오한울이 등장하며 그 주위로 모인 그 아이들이 모두 손을 잡고 웃는다. 손 내밀어 주세요- 우리 모두가 가족입니다, 그리고 오한울의 손끝에서 나비가 팔랑팔랑…
저게 대체 무슨 광고야, 이도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비, 나비….
환상.
이도하가 눈을 번쩍 떴다.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 달아나는 사람들, 그럼에도 부딪치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점심 시간에 종만 쳐도 학교가 우르르 울린다. 밥 먹겠다고 뛰어가는 학생들만 해도 그렇게 건물이 울리게 하는데, 살겠다는 일념으로 사람들이 발버둥을 치는 데도 난간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피부로 와 닿는 감각은 하나도 없었다.
“이 새끼가….”
이도하가 서슬 퍼렇게 짓씹었다. 오한울과는 다르지만 이도하 저도 유명이라면 또 한 유명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니 저쪽에서 먼저 이도하를 알아본 것이다. 어떻게 해서 오한울이 여기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하지 못하는 돈놀이를 다른 세계에까지 와서 즐기려고 했을 수도 있다.
오한울이 똥을 쑤러 왔든 죽을 쑤러 왔든 이도하는 관심 없었지만 오한울은 저를 보고 놀란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건 전부 그가 이도하를 쫓아내려 일으킨 소동이었다. 저와는 접점도 없는 오한울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이도하에게는 같은 결론이었다.
“선빵을 쳐?”
이도하가 으르렁거렸다. 특기란 종류도 제각각이었고 방식도 다 달랐다. 그만큼 상성을 타기도 한다. 김윤혜가 괜히 주머니 괴물이니 하며 놀렸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정설에 불과하고. 뭐든 압도적인 힘으로 찢어발기는 데에는 재간이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