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갈색을 좋아해?”
시오한은 칙칙한 갈색으로 변한 제 머리칼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물었다. 웃던 이도하가 입을 다물었다. 그건 옆집 진돌이가 아침마다 생산하는 고릿한 초코파이 색이었다. 진돌이는 거의 사람만 한 것을 생산했다. 어떤 정신 나간 작자가 길바닥에다 저런 짓을 했나 이도하에게 아주 강렬한 충격을 주었던 터라 가장 먼저 떠올랐을 뿐이었다. 당연히 이도하가 좋아하는 색도 아니었다.
“…아니, 눈에 덜 띌 것 같아서. 평범하잖아.”
장을 거쳐 나온 색이 평범할 리는 없었다. 이도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시오한을 잡아끌었다.
“가자. 늦는다.”
시오한은 의아해하면서도 앞장섰다. 그는 미리 구해 둔 것 같은 열쇠를 건넸고, 이도하가 현관문을 열었다.
이도하는 좀 긴장했다. 심장이 약하게 두근두근 뛰었다. 세계에서 셋뿐인 인소더블이니 뭐니 해도 그는 여태 침대 아래로 들어간 핸드폰이나 꺼내는 일 따위에 특기를 쓰던 사람이었다. 무난하고 평범한 삶을 지향한 만큼 초중고등학교를 주르륵 다니며 학교와 피시방과 학원을 드나들었다.
그의 인생에 가장 스릴 있는 순간을 꼽자면 대학교 1년 때 여장하기로 제비뽑기를 했던 때였다. 이런 잠입수사 같은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안은 어두웠다. 인기척이라고는 없었고, 공기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싸늘했다. 단란한 일가족이 사는 것처럼 낡은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근래에는 전혀 손길이 닿은 것 같지 않았다. 한때 누군가 살기는 했지만 지금은 버려진 집 같은 느낌이었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손을 꽉 쥐었다. 조용하니 제 심장 소리까지 다 들릴 것 같았다. 어디선가 공포영화처럼 당장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았고, 그렇게 튀어나오면 이도하는 놀라 그게 뭐든 단숨에 찢어버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랬다가 시오한이 이 자리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건 정말 큰일이었다.
“어우씨.”
이도하가 마른침을 삼켰다. 시오한이 속삭였다.
“여긴 아무도 없어, 화이람.”
이도하는 홱 돌아보았다가 시오한을 보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거의 손을 뿌리칠 뻔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시오한이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웃었고, 이도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낄낄 웃었다.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지나, 시오한은 거실로 향했다. 벽난로와 소파, 그리고 테이블이 있는 평범한 거실이었다. 그는 테이블을 치우고 그 아래 카펫을 들어냈다. 바닥에 문이 나타났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불빛이 틈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도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랄도 정성이다 진짜.”
미리 알지 못하면 누구도 이 안에서 도박판을 벌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아주 평범한 집이었다. 그러니 보초도 뭣도 없는 것일 테고. 하여튼 인간들이 어디서나 대가리 굴리는 게 똑같지. 이도하가 혀를 찼다.
문을 여니 긴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시오한이 먼저 내려갔고, 이도하가 뒤를 따랐다.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매캐한 담배 냄새와 향수 냄새가 진득하게 공기를 잠식하고 있었다. 좁은 입구는 어두웠는데…. 뉴스에서 보던 작은 창고나 모텔룸 정도를 생각하고 이도하는 곧 황망해졌다.
“이런 미친….”
계단에서 이어진 입구를 지나 빛이 확 밝아지면서 드러난 내부는 그야말로 거대했다. 정말 엄청나게 거대했다. 축구장 하나는 족히 들어갈 것 같았다. 그 누구도 그런 조그만 집 아래에 이런 엄청난 규모의 지하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크기였다. 게다가 대단히 고급스럽기까지 했다.
시야에 닿는 천장에는 코끼리만 한 크기의 화려한 샹들리에가 두 개나 달려 있었다. 본격적인 도박 테이블은 한 계단 더 아래에 있었는데, 그 홀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둥그렇게 둘러진 이 층 복도의 난간은 매우 우아하게 조각되어 있었으며 뭘 모르는 이도하가 봐도 값비싼 목재를 쓴 것 같았다. 아래는 홀, 위층은 룸으로 된 구조인지 고급스러운 문이 복도를 따라 늘어져 있다.
그리고 그 넓은 곳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도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불법 도박장이 이 정도 규모로 있다는 것만 해도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리가 없을 정도로 성황리에 영업 중이라니, 황제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화병이 날 일이다. 이도하가 슬그머니 시오한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시오한의 눈은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를 보면서는 늘 웃기만 하니, 이도하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낯설었다. 웃거나 우는 시늉을 하거나, 여하간 이도하가 보는 시오한은 늘 표정이 다양하고 풍부했다. 지금이야 평소와 꼴이 좀 달라서 그나마 낫지, 원래의 그 인간미 없는 얼굴로 저렇게 표정 없이 있으면 어떨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이도하의 시선을 눈치챈 시오한이 문득 그를 보더니, 옅게 웃었다.
“여기에 내 백성들도 있고… 내 신하들도 있어.”
시오한이 말했다.
“신하?”
“귀족들이 많아. 그들이 아니라면 이렇게 크고 화려하게 차려놓을 수가 없지. 원래 암암리에 도박을 하는 편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눈치는 보았는데….”
시오한이 말을 흐렸다. 여전히 웃는 낯이기는 했으나, 북적거리는 넓은 홀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도하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냥 존나 빡친다고 해.”
“응?”
“당신 지금 여기까지 열 받은 거 다 느껴진다고. 그냥 개빡친다고 해, 속이라도 시원하게.”
이도하가 제 머리 위에 손을 대고 흔들었다. 속이 지긋하게 가라앉으며 답답했다. 머리가 저릿했으나, 그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시오한의 것이었다. 시오한의 분노였다. 그러나 겉으로 봐서는 여전히 담담하니,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시오한이 곧 하하 웃었다.
“그래. 빡치네.”
“……”
속이 시원하라고 한 말이었는데, 어째 좀 더 서늘하고 무섭다. 상스러운 말을 쓰며 이러기 쉽지 않은데. 큼, 이도하가 헛기침을 했다.
“제국을 부강하게 키워 놓았더니 나태해져서 이런 데 빠지기나 하고... 재미있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시오한은 좀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분위기를 떨쳐내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둘은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번쩍이며 빛을 반사했고,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들로 귀가 시끄러웠다. 이따금 무심한 눈빛이 스쳐 지나가기는 했으나, 새롭게 들어서는 둘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종종 가면을 쓴 이들도 있었다.
“운영자가 있을 거 아니야.”
“간자야.”
“간자?”
이도하가 미간을 모았다.
“흔히 태평성대가 이어지면 나라가 안으로부터 썩는다고 하지. 그 나라를 지탱해야 할 관리들이 나태해져서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그걸 부추기며 한 방울, 한 방울씩 독을 푸는 자들이 있어서야.”
대륙 대부분을 집어삼킨 정복 전쟁을 벌이며 이리스티리움을 지금의 광활한 제국으로 키워 놓은 것은 아칼테케 황제, 시오한의 조부였다. 그는 그의 대에서 모든 정복 전쟁을 끝냈다. 선황을 거쳐 시오한에 이르면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었고 대륙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 평화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은 나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리스티리움은 너무 크고 강했으며, 황제는 시오한이었다. 이리스티리움은 엎드린 호랑이였다. 감히 바깥에서는 찔러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죄다 타짜판이겠네.”
난간에 팔을 걸친 채 돌아가는 꼴을 구경하던 이도하가 말했다. 규모는 카지노인데 속내는 타짜 깔고 등쳐먹는 하우스 도박이라. 언뜻 보니 돌아가는 판돈이 보석 단위였다.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보이는 것들이 게임판을 도르륵 굴러다녔다. 과연 나라를 등쳐먹는 규모이기는 했다.
“화이람, 한 판 하겠어?”
시오한이 물었다. 그러나 이도하는 도박에 한해서라면 굉장한 쫄보였다. 모름지기 도박이란 운을 믿고 과감히 배팅을 해야 하는 법인데, 그는 괜한 돈을 날릴까 뽑기도 못하는 어린이였다. 이도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잘해?”
난간에 턱을 괴고 있던 시오한이 고개를 틀어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그가 묘하게 웃었다.
“말했지만, 화이람. 난 뭐든 잘하는 편이야.”
아무리 시오한이지만 저 말은 좀 재수없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정말로 사실이었다. 시오한은 도박도 잘했다. 태어나기를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왜 도박까지 잘하는가.
이도하는 좀 이상한 기분으로 조그만 동전 하나를 다이아몬드로 바꿔온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면 초심자의 운 같은 것도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여긴 일반 도박판도 아니고 타짜판이었다. 그냥 머리가 기똥차게 좋은 건가. 될 놈 될인가.
“시오한… 당신 운도 좋은 편이야?”
다이아몬드를 건네받으며 이도하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시오한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운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지.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기회를 운이라고 부르는 거 아닐까?”
“잡는 것도 능력이다?”
“아마?”
시오한이 모호하게 답했다. 이도하는 손톱만 한 다이아몬드를 굴려보다가 다시 돌려주었다. 어차피 가져갈 수도 없다. 운을 잡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은 그의 세계에서도 하는 말이었다. 운도 실력이다, 라는 말도 결국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도하는 썩 동의하지 않는 말이었다.
“각박하네.”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산책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걸었다.
“내가 특기자로 태어난 것도 운이야. 인소더블인 것도.”
시오한의 걸음이 느려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한 발자국 앞서간 이도하가 뒤돌아보았다. 시오한은 통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얼굴이라 더 알 수 없었다. 시오한이 곧 아무것도 아닌 양 다가왔다.“운을 부정하는 건 아니야. 그저 내가 좋아하지 않아서 그래. 우연히 이루어졌다는 건,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말과 같으니.”
“무슨 소리야. 길 가다 동전 보면 동전 못 주울 뻔 했다고 우울해하겠다?”
이도하가 타박했다. 인소더블로 태어난 저가 인소더블로 태어나지 못할 뻔했네, 하고 우울해하고 있으면 그건 정말 고까울 테였다. 재수 없다는 말로도 다 표현이 안 된다. 죽빵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시오한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황제로 태어나지 못할 뻔했네,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건 정말 싫을 거였다.
“하하. 그 정도까진 아니야. 다만 그대에 관해서라면 내가 좀 미련해지는 터라.”
“나?”
여기서 또 저가 왜 나온담. 이도하가 미간을 모았다. 그러니까 저 말은, 절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싫다는 말…인 것 같은데. 소환을 삼십 번도 넘게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피바람을 보게 한 이도하는 갑자기 어떠한 책임감을 느꼈다.
시오한은 여태 한 번도 그 때의 일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본래 켕기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 찔리는 법이니까. 이도하는 머쓱해졌다.
“…황제 폐하라 그런가, 좀 부정적이시네.”
시오한이 눈썹을 구겼다. 그래 봤자 웃는 낯이라 꼭 시무룩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부르지 마.”
“황제 폐하를 황제 폐하라고 부르지 뭐라고 해.”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