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대가 바란다면 해 봐야지. 하지만 화이람, 내기에서 이긴 건 난데.”
“그건 무효지. 뭘 걸기도 전에 끝났잖아. 상품이라도 줘?”
이도하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는 동그란 유리 공을 꺼내 시오한에게 내밀었다. 안에 작은 숲을 재현해 놓은 아기자기한 물건이었다. 들판은 잡초 한 올 한 올 섬세했고, 커다란 나무 하나가 위를 둥글고 푸르게 덮고 펼쳐졌으며 손톱보다도 작은 토끼가 두 마리나 있었다. 심지어 작은 연못도 구현해놓았다.
뭘 했는지 별을 담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기에 신기해서 구경하고 있었더니 이것도 시오한이 냉큼 사다 손에 쥐여 주었더랬다. 이 거리를 통째로 다 살 수도 있는 시오한은 잔돈까지 야무지게 챙겨 이도하의 용돈으로 주었고, 그는 아이스크림 두 개로 보답했다.
아이스크림은 이미 진즉에 뱃속으로 사라졌고, 이도하는 땡전 한 푼 없으니 줄 건 결국 시오한의 돈으로 산 이 예쁜 쓰레기뿐이었다.
“아끼는 거다, 그거.”
“응. 예뻐, 화이람.”
이도하가 능청스레 말했다. 뻔뻔한 돌려막기에도 시오한이 굉장하네- 하고 성심성의껏 장단을 맞춰 주었다. 시선을 맞춘 시오한이 눈가를 휘며 웃었다. 뻔뻔하기로는 시오한에게 당해낼 수가 없었다. 민망해진 이도하가 말을 돌렸다.
“이제 그만 가야 하지 않나. 가게도 거의 다 문 닫았는데.”
구경은 할 만큼 했다. 제 나라를 보여주겠다는 시오한의 말대로였다. 거리는 화려하고 찬란했으며, 볼거리도 많았다. 저걸 무거워서 입을 수는 있겠나 싶을 만큼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도 보았다. 이리스티리움은 여인들의 사회활동 역시 활발하기 때문에 실제로 저런 걸 입는 여인들은 별로 없다, 저건 그냥 과시하려고 진열해 놓는 거다- 하며 시오한은 여행사 가이드처럼 하나하나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이름이 세 글자이면 첫 글자를 성으로, 나머지 두 글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한국인 특성으로 이도하는 시오한을 오한이라고 부르며 잠깐 놀리다가, 시 사장, 하며 장난을 쳐댔다. 대체로 뭐든 잘한다는 시오한은 이걸 또 금방 활용해 화 사장, 하며 응대했다.
그렇게 해서 시 사장과 화 사장은 옷가게로 가득한 오를라나 거리를 지나, 부유한 평민층이 더 많았던 플라쥬 거리에서 온갖 잡동사니들을 구경한 뒤 주거지역의 독특한 주택들까지 구경했다. 야바위는 그 주거지역을 지나 좀 더 깊고 한적한 성도의 외곽으로 나와 흔히들 ‘뒷골목’이라고 부르는 길목의 어귀에서 벌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요컨대 한껏 돌아다니고, 볼 만큼 보았다는 뜻이었다. 즐거웠지만 이도하는 슬슬 좀 불안했다. 그는 저를 소환하느라고 피를 토하고, 쓰러지며, 안색이 창백해진 시오한을 쭉 봐 왔다. 벌써 소환된 지가 꽤 되었는데 궁성을 향하기는커녕 이렇게 성도의 외곽에 나와 있으니 이도하는 초조해졌다.
게다가 시오한은 지금 호위기사도 없었다. 길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던 시오한의 말이 슬슬 머릿속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글세…. 가려고 한 곳이 있긴 한데, 그대가 원치 않으면 가지 않아도 괜찮아.”
“시찰?”
이도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적이 줄어든 거리는 한산하고 어두웠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재미없는 일이 생길 것처럼 생겼다. 그는 혀를 찼다.
“당신이 괜찮아야지. 주인은 당신이잖아.”
“……”
이도하는 별생각 없이 말했다. 별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도하의 소환을 유지하는 건 시오한이었고, 그러니 ‘계약주’라는 이름도 그에게 붙는 것이었다. 대체로 계약주들은 목적과 바람이 있어 계약자들을 소환한다. 계약자들은 그에 따라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지 뭘 할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오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드물게도 그는 할 말을 찾는 것 같았다. 이도하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이래? 잠시 후에야, 시오한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화이람. 단어를… 조심해서 고르는 게 좋겠어.”
“뭘?”
시오한이 앓는 소리를 냈다. 영 이상해 보여, 이도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안색을 살폈다.
“시오한? 아파?”
“…아냐, 화이람. 난 괜찮아.”
“봐.”
이도하가 숙인 시오한의 턱을 들었다. 손을 치워내지는 못하고 시오한이 질끈 눈만 감았다. 좀 이상한 것만 빼면 이도하가 보기에 그는 정말 괜찮아 보였다. 여전히 새하얗긴 하지만 창백하지는 않았고, 식은땀이 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열도 없었다.
“그래. 괜찮아 보이는데.”
“…좀, 기분이 이상해서. 괜찮아, 화이람.”
시오한이 이도하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내렸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 없이 가슴만 크게 들썩였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빙그레 웃었다.
“잠깐 확인만 하고 돌아가자. 이 근방이야.”
“뭔데?”
오늘 밤의 잠행은 목적은 그곳인 게 분명했다. 시오한은 망설임 없이 골목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키가 커 보폭도 컸으나 이도하도 그보다 아주 조금 작은 정도였다. 못 따라갈 속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시오한은 늘 걸음걸이가 단정하고 느린 편이었다. 서둘러도 일반적으로 허둥대는 것과는 달랐다.
“시 사장, 손은 놓으시죠.”
감싸 쥐었던 손을 여태 잡고 있던 시오한이 흘긋 눈치를 보았다. 이도하는 거의 바로 곁에 서서 걷고 있었다. 굳이 손을 잡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시오한은 못 들은 척 했다.
이도하는 시오한이 감싼 쥔 제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제 손도 작은 편이 아니었으나, 시오한은 손가락이 유난히 곧고 길었다. 그렇게 감싸 쥐니 꼭 옭아맨 느낌이었다. 이게 아무래도 이게 수작은 맞는 것 같은데….
이도하는 모른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앞만 보고 걷는 시오한을 흘긋 보았다. 어차피 손에 땀이 나는 것도 아니고…. 크게 불편하지도 않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그는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근방이라던 말처럼 이미 오려던 곳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겉보기로는 평범한 주택이었다. 야트막한 담이 있으나 마나 한 것처럼 처져 있었고 높게 솟은 지붕에 달린 굴뚝도 귀여웠다. 털이 보송보송한 강아지 한 마리와 화목한 가족이 살 것 같은 집이었다.
한밤중이라 그런지 불은 전부 꺼져 있었다. 현관 입구의 등 하나만이 사람이 산다는 표시처럼 흐리게 밝혀져 있었다. 시오한은 마치 제집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겨 있지도 않았다. 이도하가 여태 잡고 있는 손을 흔들었다. 설명 좀 하라는 뜻이었다.
“야바위까지는 놀이지만, 집까지 팔아먹을 정도가 돼서는 봐주기가 어렵지.”
이도하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가 집을 가리켰다.
“하우스 도박?”
그러니까 이 평범하고 귀엽고 아기자기해 보이는 집이 본격적인 도박판을 벌이는 곳이라는 말이렷다. 이도하는 감탄했다. 아주 다른 세상인데도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게 생겨 먹은 모양이었다.
“재밌는 이름이네.”
시오한이 말했다. 그러더니 잡은 이도하의 손을 올려 제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뺨을 감싸며 이도하가 조금 얼떨떨하게 그를 보았다. 흐린 현관 등이 다 저문 노을처럼 어스름히 그를 비추었다. 빛이 자연스레 늘어트린 머리칼과 매끄러운 뺨, 목선으로 이어지는 곡선을 따라 흐르는 것 같았다.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갑자기 왜 이러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목이 꽉 잠긴 것 같았다. 시오한이 씩 웃었다.
“자, 화이람. 원하는 대로 주물러봐.”
“뭐, 뭐?”
놀라 거의 딸꾹질을 할 뻔한 이도하가 말을 더듬었다. 시오한이 눈을 접으며 짓궂게 웃었다.
“이제 변장이 필요해서. 여기서는 눈에 띄면 좀 곤란하거든. 훑어보기만 하고 나올 테니 잠깐이면 충분해.”
“당신 얼굴?”
“응.”
호… 이도하가 눈을 반짝였다. 변장에 이런 방법도 있었구나! 이도하는 이런 일에도 저런 일에도 특기를 하찮고 다양하게 활용했지만, 그건 전부 알찬 실생활용이었다. 그는 상상력이 그리 풍부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이도하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잠깐 동안 갖가지의 아이디어들이 그의 머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도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눈앞의 사람을 제 마음대로 커스터마이징 해보라는 게 이렇게 신날 줄은 몰랐다. 어렸을 적 게임 캐릭터를 가지고 하던 온갖 장난을 다 쳐보고 싶었다.
시오한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지만, 정말 그렇게 했다가는 또 그가 피를 토하고 쓰러질 것 같다. 일단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도하는 아쉬움에 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결 좋은 금발이 손가락 사이를 시원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느낌이 좋아 이도하는 근래에 들어 부쩍 습관처럼 시오한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시오한. 이거 날 잡고 다시 한 번만 더 하자. 제대로.”
시오한이 나직이 웃었다.
“그래, 그대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이도하는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노렸다. 안경이라고 하면 모름지기 왜곡이지. 이도하는 안경에 왜곡을 걸고, 엄청나게 눈에 띄는 머리칼도 바꾸었다. 그 자체로 번쩍이는 듯하던 머리칼은 갈색으로 바뀌었다. 눈동자도, 눈썹도, 모두 같은 색으로 변했다.
안경 덕에 얼굴선은 틀어지고 눈도 좁아졌다. 심상찮은 턱 선이나 콧대는 여전했으나, 인상이 아주 묘해졌다.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드라마나 소설 따위가 떠올랐다. 옆집에 사는, 한량 백수인 줄 알았으나 어느 날 슈트를 쫙 빼입고 나타나는 알고 보니 재벌 2세, 매일 빵 셔틀이나 하며 왕따를 당하지만 안경 벗고 보니 세계 서열 0위….
이도하가 부르르 몸서리치며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유치하다고 비웃기나 했는데, 사람들이 어떤 상상을 하며 그런 캐릭터를 만드는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