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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6화 (26/250)

26화

“…실수로.”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시오한이 좀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도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무수하게 뜬 예쁜 하늘이라도 봐야 인생무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무한한 세상에 저는 고작 점 하나 같은 인간일 뿐이다.

그래, 이깟 계약명이 뭐 별건가. 계약을 파기하기 전까지 피부를 드러내도 지워지지 않는다지만 어차피 그들은 맹약을 한 사이고…. 그러니까 아마 죽을 때까지, 한날한시에… 그러나 생각할수록 억울하기만 했다.

“당신은?”

“응?”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는데, 이번에는 진심인 듯했다.

“왜 나만 이런 게 생겨? 이건 불공평하잖아.”

“아.”

“이리 와. 당신도 하자.”

이도하는 와플 비슷한 것을 한 번에 다 욱여넣고 시오한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식겁을 하며 피할 줄 알았던 시오한이 얌전했다. 기름 묻은 손가락이 코앞으로 다가와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반짝이는 게…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반은 농담이었던 이도하는 김이 빠졌다.

“뭐 하는 거야.”

“안 해?”

시오한이 물었다.

“뭘 해, 진짜로 하라고?”

“난 좋은걸.”

시오한이 눈을 접으며 곱게 웃었다. 이 인간이. 이도하는 또 기가 막혔다. 제 얼굴이라고 지금 막 쓰겠다는 건가. 시오한이 이도하의 손을 잡아 제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손끝에 묻은 기름이 그의 얼굴에 묻을 세라, 이도하만 깜짝 놀랐다. 그가 놀란 고양이처럼 손가락을 쫙 폈다. 시오한이 유쾌하게 웃으며 나머지 손조차 잡아 반대쪽 얼굴에 착 붙였다.

“이렇게 양쪽에, 다 새겨 줘. 그대가 원하는 이름으로.”

“됐어, 됐어. 안 해. 새기긴 뭘 새겨. 나 이름 못 지어.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 또또랑 뚜뚜였어.”

한쪽에는 또또, 또 한쪽에는 뚜뚜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강아지를 좋아해?”

“강아지도 좋아하지. 고양이를 더 좋아해.”

“왜?”

시오한이 태연하게 물었다. 여전히 이도하의 손바닥을 제 양 뺨에 붙인 채였다. 그러고 있는 모양도 웃기고, 삼천포로 빠지는 대화도 웃기다. 어느새 웃음을 흘리며 이도하가 시오한의 뺨을 꾹꾹 눌렀다. 새하얗고 완벽한 곡선을 그리는 뺨이 이리저리 찌그러졌다.

쓸모없는 살이라고는 1그램도 없어 보였는데 그렇게 누르니 찹쌀떡처럼 이리저리 봉긋하게 올라오기는 한다. 푸하하, 이도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제 얼굴을 짜부시키든 말든 시오한은 마냥 기껍게 바라보았다.

“외로움을 안타고, 말랑말랑하잖아.”

“고양이는 외로움을 타지 않아?”

“그렇대. 안 키워봐서 나도 몰라.”

“글쎄, 화이람. 나도 키워보지 않았지만 아마 아닐 것 같은데.”

시오한이 이도하의 뺨을 찰싹 눌렀다. 이번엔 그의 얼굴이 찐빵처럼 일그러졌다. 어어, 놔라. 이도하가 시오한의 얼굴을 양옆으로 쫘악 밀었다. 와중에도 기름이 묻을까 손가락은 쫙 편 상태였다. 그래 봤자 얼굴에 살도 별로 없어 그게 그거였다.

“기다리는 건 늘 외로운 일이니까.”

시오한이 고개를 숙였다. 이도하가 흠칫 놀랐다. 따뜻한 이마가 약하게 쿵, 부딪쳤다. 황금색 머리칼과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칼이 섞였다. 코앞에 다가온 황금색 눈동자가 샐쭉 웃더니 다시 멀어졌다. 이도하는 어안이 벙벙했다. 또 속이 일렁거려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문지르고 있었다.

“…뭐야?”

“고양이 인사.”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갑자기 무슨 인사를 해, 이 양반아….”

“난 늘 그대가 반가운걸.”

이도하가 더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반짝 웃은 시오한이 그의 손을 잡았다. 까만 밤 아래 주홍빛 가로등이 물들인 길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도, 비교적 남루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체로 낯이 밝았다.

대대로 성군을 맞이한 제국 이리스티리움은 시오한에 이르러서 가장 찬란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제국은 강건하고 부유했으며 자애로웠다. 시오한이 그 인파 속으로 이도하를 이끌었다.

“가자. 내 나라를 보여줄게, 화이람.”

***

“두 번째.”

“세 번째야.”

“씁, 아닌데. 분명 두 번째 같은데.”

“내 눈은 속이기 힘들어.”

시오한이 느긋하게 말했다. 확신과 여유가 넘쳤다. 쓰읍, 이도하가 다시 한 번 유심히 앞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두 번째가 맞는데… 특기를 쓰면 투시를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시오한에게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음.

“뭐 걸래?”

“화이람, 승산이 별로 없는 싸움인데?”

“난 앞만 보고 간다.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야바위에 소원이라, 굉장한걸.”

“아, 잠깐. 그래, 소원은 너무 갔다. 이건 그냥 버릇이야. 취소.”

“남아일언중천금이랬는데.”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고릿적 말이니까 잊어버려.”

이도하가 미간을 모았다. 도박은 모름지기 백 원이라도 걸어야 재미라고 했는데,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나 소원 들어주기 따위로 대충 퉁 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일단 지금은 생각이 안 나니 나중에 어떻게든 너를 써먹겠다, 혹은 엿 먹이겠다, 하는 일종의 달아두기였다. 어렸을 때부터 입에 붙은 버릇이자 한국인 고유 기술 같은 것인데 시오한에게는 정말 말 그대로 소원이 될 모양새였다.

“…옥새?”

궁리하던 이도하가 말했다.

“그런 건 그냥도 줄 수 있어.”

시오한이 태연하게 말했다.

“장난이니까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내게 바라는 게 없어?”

“옥새도 준다는데 황송해서 뭘 더 바라.”

사람 심보라는 게 원래 장난이라도 소중하고 아끼는 걸 뺏고 싶은 법이다. 저렇게 다 줄 것처럼 굴면 괜스레 민망해지기만 한다. 흥이 식은 이도하가 툴툴거렸고, 시오한은 소리 없이 웃음 지었다.

그사이에 고심하던 야바위의 주인공이 두 번째 컵을 골랐다. 야바위꾼이 껄껄 호탕하게 웃으며 컵을 탁 들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에서 탄성과 환호가 동시에 터졌다. 시끌벅적한 소리 안에는 이도하의 것도 있었다. 와, 분명 저기로 들어갔는데!

“아, 이것 참 아쉬워서 어쩔까, 사실 이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있긴 했는데. 이 선생님이 눈이 참 좋으시네. 어째, 달고 한 번 더 가?”

야바위꾼이 손가락으로 공을 굴리며 실실 웃었다.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고 푸근한 외모에 그렇게 웃으니 아주 얄미웠다. 절로 투지를 일으키는 얼굴이었다. 묻고 더블로 가야지.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주변에서도 추켜올렸다. 가, 가, 사나이가 끝은 봐야지!

주변의 성원에 힘입어 야바위의 주인공이 비장하게 외쳤다. 한 번 더! 이도하가 픽 웃었다. 둘은 잔뜩 몰린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아쉽네.”

시오한이 말했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여기는 내일도 없이 밤새 노나, 싶을 만큼 북적거리던 거리도 제법 한산해졌다. 밤바람이 제법 차갑게 불었다.

이도하는 시오한의 안색을 살피고 목에 걸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그에게 건넸다. 어깨에도 두르고 목에도 두르고 무릎에 덮어 담요처럼도 쓰고, 하여간 이렇게 저렇게 다 쓸 수 있다며 옥장판처럼 영업을 해대던 게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었더니 시오한이 사준 것이었다. 어차피 계약자인 그는 오즈에서 추위도 더위도 별로 타지 않았다.

시오한은 스카프를 건네받더니 엉성하게 둘렀다. 반은 어깨에 걸쳐지고 반은 머리에 걸렸다. 그나마도 마저 넘기지 못한 손이 스카프를 찾아 허공을 헤맸다. 급하면 이불로도 쓸 만하다는 긴 스카프를 주체하지 못해 거의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이가 없던 이도하는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며 지켜보았다. 엉뚱한 곳을 잡아당겨 제 목을 조르는 모양새쯤 돼서는 참을 수 없었다.

“애도 아니고 이런 것도 혼자서 못 하냐.”

“내 손으로는 물도 못 뜨게 하니, 버릇이 잘못 들었지.”

“너무 손 타는 거 아냐?”

섬세함이라고는 없기로 이도하도 크게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어깨며 머리며 붕대처럼 칭칭 두른 것을 풀어 시오한의 목에 몇 번 감아주었는데도 길게 남아 무릎까지 온다. 도대체 저가 어떻게 하고 있었더라. 이도하는 잠깐 멈춰 있다가, 남은 스카프를 리본으로 묶어보았다.

꼭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완성되었다. 리본은 엉성하지만 시오한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럴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도하는 꾹 입술을 물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를 길거리에서 이렇게 우습게 만드는 게 영 적절치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들긴 했다. 하지만 이젠 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됐어. 패션은 마이웨이랬고, 원래 옷걸이가 다 한다고 했다. 그는 대충 합리화했다.

“많이 타. 혼자 두었다가는 굶어 죽을지도 몰라.”

시오한이 뻔뻔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랑 둘이 있어도 당신은 굶어 죽을걸.”

“…그것도 그렇네.”

잠시 고민한 시오한이 곧 인정했다. 웃던 이도하의 얼굴이 조금 찌그러졌다. 시오한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대랑 둘이 있는 거라면 그것도 괜찮겠는걸.”

“괜찮기는. 나란히 굶어 죽는 게 퍽이나 괜찮다. 당신이 좀 배워볼 생각 없어? 난 이미 글렀어.”

사실 이도하라고 만회할 노력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집에서 레시피까지 찾아본 그는 그냥 제가 요리에 한해서는 대단한 똥손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팔까지 걷어붙이고 시도했던 야심 찬 오므라이스는 고래나 코끼리가 반쯤 소화하다 실패하고 토해낸 풍선 같아 보였다.

어떻게 해서 그런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는지 그는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제 어머니까지 식겁하게 한 이도하는 그냥 체념했다. 요리는 제 팔자에 없었다.

어차피 황제인 시오한과 함께 그렇게 굶어 죽을 상황까지 갈 일이 없다는 건 둘 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의미 없는 설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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