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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5화 (25/250)

25화

불빛이 점차 발아래로 밝게 깔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는 새까만 하늘에 별이 가득했고, 아래로는 따스한 불빛이 반짝거렸다. 아래와 위가 뒤집혀도 그들은 그대로일 테였다. 빛 사이를 걸어가는 기분이 아주 독특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도하는 걷는 게 아니라 이 빛나는 성도의 한복판까지 단숨에 갈 수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그건 단순히 떨어지지 않도록 발밑을 받치는 것보다 좀 더 많은 마력이 들 테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도 위도 이렇게 예쁜데 좀 천천히 걸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부는 바람이 끊이지 않아 시오한의 긴 머리칼이 공중에 떠오른 채 연신 물결쳤다. 나부끼는 황금의 강처럼 근사했고, 살짝 상기된 시오한의 얼굴에 빛이 반짝이며 어른거렸다. 정말 천사와 다름없었다. 즐거워 보였고, 힘들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힘들었다면 이렇게 느긋하게 천천히 걷지도 않았을 테였다.

저기는 무슨 상점이고, 여기는 극장이고, 하며 이도하가 짚는 발걸음마다 설명을 친절하게 곁들이는 게 아주 반나절은 걸릴 기세였다. 혹시 그 모습이 좀 더 기억에 남을까 하여, 이도하는 시오한을 꼼꼼히 바라보았다. 빤히 절 보는 이도하와 눈이 마주치면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

“해서… 그 축제에 그대가 이렇게 사람들을 잡아주었다고?”

그들은 인적이 드문 어느 골목에 내려섰다. 파랗게 물들었던 눈동자가 다시 까맣게 돌아왔다. 이도하는 이런 산책이라면 돈 내고 할 법도 하다, 하며 만족스러운 감상을 말하던 참이었다.

이게 바로 이상적인 계약자와 계약주의 모습인가. 홧김에 힘을 썼다가 계약주가 피를 토하게 만든 전적이 있는 이도하는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환계-오즈에서 부르는 그의 세상을 부르는 이름대로라면-에서는 돈을 내고 이런 걸 해주는 사람도 있냐는 시오한의 물음에 그는 별생각도 없이 답했다.

당연히 그런 일 따위는 없고, 다만 제가 장삿속이 밝은 후배의 산책 셔틀이 되어 하룻밤에 한 이백쯤 잡아준 것 같다고. 이도하는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도 특기로 사람을 허공에 띄우겠다는 게 흔한 발상은 아닌데. 발상이야 해도 누가 그걸 진짜 밀어붙이냐. 당신이랑 같은 생각을 한 걸 보면 난사람들끼리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지. 이주연을 여기 재상으로 써먹었으면 나랏돈 좀 굴렸을걸. 이대로 나가면 돼? 당신 뭐 변장 같은 거 안 해?”

이백 명… 중얼거리며 시오한이 코트 안자락을 뒤적였다. 그가 안경을 꺼냈다. 얇은 금테로 되어 있었고, 알은 컸다.

“…진심이야?”

시오한이 안경을 썼다. 잠깐이나마, 이도하는 주방의 그 냉장고처럼 특기가 씌워진 물건이 아닌가 기대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냥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기만 했다. 도수가 조금도 없으니 굴곡이 없어 화사한 인상이 좀 더 차분해질 뿐이었다. 언뜻 서늘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 번 보면 꿈에서라도 볼 수 있을까 끙끙댈 얼굴은 조금도 못나지지 않았다. 누구라도 한 번 스쳐 지나가면 눈을 의심하며 뒤돌아볼 터였다. 이도하는 갑자기 좀 짜증이 났다.

“잠행이라며?”

“응.”

시오한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이도하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아, 잠시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 매번 이렇게 허술하게 잠행을 나갔어?”

“사람의 시선은 생각보다 단순해, 화이람. 요란한 게 오히려 시선을 끄는 법이지.”

“그래. 요란한 건 시선을 끌지, 당연히. 지금 어디가 요란한지 모르겠어?”

“내 얼굴?”

“……”

이도하는 말문을 잃었다. 그래, 그깟 안경으로 변장을 논하기에는 당신 얼굴이 너무 요란하다고 하려던 말이기는 했다. 그건 정말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시오한의 입에서 저렇게 들으니 이게 복지다, 이게 나라다, 하던 댓글들과 저가 크게 다르지 않은 주접을 떤 것처럼 느껴졌다.

이도하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사뭇 순진무구하게 고개를 기울였던 시오한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이도하의 손을 잡고 먼저 걸음을 떼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바쁘고, 남에게 별 관심이 없어, 화이람.”

데자뷰였다. 안경을 건네며 똑같은 요지의 말을 하던 제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건 당신 생각이겠지,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마당이니 할 수 없었다. 당신이 너무 기가 막히게 생겨서 그깟 안경 따위로 가려지지 않아… 하는 말이 될 뿐이었다. 이도하는 전의를 상실하고 시오한이 이끄는 대로 딸려갔다.

더 기막힌 것은, 시오한의 말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보고 돌아보고 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 시선이 달라붙기는 했지만, 굉장한 소란이 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니 이도하는 정말 대단한 주접을 떤 격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억울하게도, 시선과 소란은 오히려 이도하에게서 일었다.

“우와….”

드레스를 잔뜩 진열해 놓은 옷가게의 거대한 진열대를 흥미롭게 관찰하던 이도하는 턱 밑에서 들려오는 감탄사에 흠칫 놀랐다. 내려다보니, 아주 조그만 꼬마였다. 머리 꼭대기가 그의 허리에도 오지 않았다.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고, 손가락이 노골적으로 이도하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눈 밑에 새겨진 계약명을 가리키고 있었다.

“환수다.”

이도하가 부욱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인마.”

“환수 맞는데.”

손가락은 여전히 그의 눈 밑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도하는 그 손가락을 곱게 접어 가슴에 안겨주었다.

“사람보고 짐승이라고 하면 못쓴다. 엄마 아빠 어디 있어, 얼른 가, 얼른. 잃어버린다.”

“맞는데….”

이도하가 꼬마의 등을 밀었다. 꼬마는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도하가 만졌던 제 손가락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꼬마는 저만 들리는 부모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곧 후다닥 뛰어갔다. 끝까지 엄마, 환수! 하고 소리쳤다.

“아니라니까, 콩알만 한 게….”

“잘 고쳐지지가 않아.”

어느새 다가온 시오한이 바스락거리는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도하가 받아들었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아 뜨겁다.

“아무래도 처음 돌던 용어가 입에 붙어버려서. 개정한 지가 꽤 되었는데도 일반적으로는 그대와 같은 계약자를 보기가 쉽지 않고, 대할 일도 드무니 처음 쓰던 단어를 계속 써.”

‘환수’는 계약자에 대해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던 시기에 쓰던 단어라고 시오한은 설명했다. 특기자가 신기한 건 이도하의 세상이나 이곳이나 별다를 것도 없었다. 심지어 오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세계에서 소환되어 오기까지 했으니, 처음에는 같은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이 괜히 처음이겠어.”

“…그렇지.”

꾸러미를 풀며 이도하가 말했다. 느린 반응이 돌아오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이 묘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곧 빙그레 웃는다.

꾸러미 안에 든 것은 손가락 두께로 바삭바삭하게 구운 빵 사이에 작은 조각으로 자른 과일이 꿀과 함께 저민 크림과 함께 들어간 길거리 음식이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달달하고 새콤한 향이 가득 올라왔다.

“와플이네.”

크게 한 입 베어 문 이도하가 간단히 평했다. 시오한이 소리 없이 웃고는 말했다.

“화이람, 여기 봐.”

시오한이 턱 아래를 받쳐 들었다. 이도하는 와플 비슷한 것을 우물거리며 순순히 그 손에 제 얼굴을 맡겼다. 시오한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통을 꺼내 그 안의 것을 손가락에 던 다음, 이도하의 눈 밑에 살살 발랐다. 그리고 그 위로 작게 자른 천 조각을 붙였다. 그런 그에게 이도하가 와플 비슷한 것을 내밀었다.

집중하느라고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시오한은 입만 벌렸다. 이도하는 친절히 과일이 많은 쪽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넣어 주는 대로 대충 문다. 그는 이도하의 눈 밑에 새까만 문신처럼 새겨져 있던 글자들을 가리는 데 완전히 집중해 있었다. 시오한이 조금 미간을 모았다. 썩 내키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내 안경도 같이 준비 좀 해주지 그랬어, 폐하.”

이도하는 이제 안경의 간단하고도 놀라운 유용성을 인정한 상태였다. 고작 유리 두 짝으로 정말 시선이 분산된다니, 쫄쫄이 바지 위에 팬티를 입은 그분이 괜히 안경을 쓰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클래식은 과연 클래식이었다.

“그대를 가릴 생각은 없었어. 게다가 안경으로는 계약명이 가려지지 않는걸.”

시오한이 한 발자국 물러나 그를 보았다. 눈 밑의 글자들은 완전히 가려진 상태였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애초에 왜 이렇게 눈에 띄는 데다가 새겼어? 이거 당신이 한 거잖아?”

그러고 보니 묻는다는 게 매번 깜빡하고 말았다. 처음이야 매번 신경이 쓰여 만지작거렸지만 그렇다고 달리 느껴지지도 않으니 어느새 이도하는 잊어버리게 되었다. 아직도 때때로 만지작거리기는 하지만… 그건 시오한이 떠오를 때였다. 그러니 그가 눈앞에 있으면 저는 거울 없이 볼 수도 없는 것이야 매번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게….”

시오한이 드물게도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이도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보란 듯이 눈 밑에 새겨진 이 계약명으로 인해 달갑지 않은 관심을 얼마나 많이 받았던가. 이도하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초등학생이며 중학생들이 눈 밑에 계약명처럼 보이는 문양들을 그리고 한껏 멋지게 사진을 찍어 올렸다. 이도하는 제 나라의 미래가 너무 캄캄한 게 아닌가 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sns에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자 정말 딱 쥐구멍으로 숨어 들어가고 싶었다. 계약명은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라면 읽을 수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해서 이도하도 궁리를 좀 하기는 했다. 아무래도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았고, 그 짐작이 맞다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계약명은 계약이 성립하는 첫 소환의 순간에 계약자와 계약주가 첫 번째로 접촉하는 곳에 새겨진다고 했다. 당연히 계약자 본인의 동의를 거쳐서.

그러나 첫 소환의 순간에 이도하는 혼비백산해 있었고, 시오한은 정말로 넋이 날아가고 흩어질 뻔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를 어떻게 만졌는지는 하늘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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