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뱉고 보니 꼭 투정 같았지만, 사실이 그렇기도 했다. 계약자가 먼저 오즈에 간섭해 들어올 수는 없다. 이도하는 어디까지나 기다리는 입장이었고, 소환은 오로지 계약주의 몫이었다. 저가 늦게 불러놓고는 앞에 있으니 기쁘니 마니 하는 것도 웃긴다며 이도하는 애써 제 투정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화를 해도 낯이 좀 부끄럽기는 했다. 달도 없는 밤이라 다행이었다. 얼굴이 좀 달아오른 것 같았다. 시오한이 옅게 웃음을 흘리며 한 번 더 사과했다.
“호사를 좀 오래 누렸더니 처리해야 할 게 많았고,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은데 또 간병을 하게 할 수는 없었는걸. 그대와 단둘이 있고 싶은데 혹 길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건 좀 큰일이니까.”
“길?”
이도하는 그제야 시오한이 평소와는 좀 다른 행색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편안하게 풀어 내린 머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길고 품이 넉넉한 가운, 예의 그 환자복이 차림이 아니었다. 시오한은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검은색 바지에 하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베스트도 받쳐 입고 있었으며, 무려 코트 차림이었다. 허리춤에는 코트 아랫자락으로 끝이 삐죽 나온 검도 달고 있다. 이도하의 눈길이 닿자, 시오한이 한 번 보라는 듯이 팔을 들어 보였다.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아주 근사하고 멋있기는 했다. 그러나 오즈에 대해 뭘 잘 모르는 이도하가 봐도 로마제국으로 비유될 만큼 최강대국의 황제가 입을 평상복은 아니었다. 바지도 셔츠도, 누가 봐도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법한 재질이 분명했다. 세계가 달라도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은 다 모양이 비슷하다. 황제가 저런 평상복을 입는 경우야 뻔했다.
“당신 설마….”
시오한이 부러 재듯이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놀 줄 모르는 사람은 재미가 없으니까.
그리고는 방긋 웃는다. 꼭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이었다.
“오늘은 나랑 놀아, 화이람.”
잠행, 뭐 그런 전문용어가 나올 줄 알았더니 단어 선택도 웃음만큼이나 아이 같은 말이다. 놀기는 뭘…. 가만 보니 사람을 매번 어이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도하가 황당하게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저 너머의 반짝이는 도시를 보고, 다시 시오한을 보았다. 이도하는 어느새 슬금슬금 웃다가… 헛바람 같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요컨대, 저렇게 일반인인 척하고 궁성을 나가 저 불빛 속으로 놀러 가자는 말이렷다.
이도하는 솔깃했다. 계약자들이 전하는 오즈에서의 다사다난한 일들이야 이미 영화로 잔뜩 나와 있다. 그러나 이도하는 본 적도 없었고, 별로 관심도 없었다. 시오한과 계약을 맺고 나서도 사람들이 그렇게나 열광하고 궁금해하는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작 그는 궁금한 적이 없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어떻게 그랬나 좀 의아할 정도였다.
하기야, 처음 만나서부터 온 천지에 피를 쏟아놓고 만날 때마다 안아주고 먹여주고 해야 했던 환자를 만났으니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기는 했다. 이도하는 좀 새로운 기분으로 어느새 옆에 선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그냥 미친놈, 했더니 어느새….
시오한이 손을 내밀었다. 이도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잡으려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 잠깐, 잠깐. 설마 여기서 그대로 내려가자고?”
이도하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특기자가 아니었다면 눈앞이 아찔할 높이었다. 이전에 살았던 아파트 10층도 이것보다는 낮았던 것 같다. 길에서 쓰러지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떨어지면 큰일 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였다. 오즈인이라고 신체가 더 단단할 리가 없으니 그건 그냥 끝이다. 하마터면 분위기에 취해 한 나라의 황제를, 시오한을 골로 보낼 뻔했다는 생각이 들자 식은땀이 쭉 났다.
“걸어서 나가면 한참 걸려, 화이람.”
“아니, 그건 아는데. 무슨 수로?”
이 궁성, 에트레제가 얼마나 큰지는 이도하도 지난 소환에 주방까지 걸어가며 충분히 느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옷자락을 붙잡고 분분히 뒤로 물러서는 손길에 시오한이 종이 인형처럼 순순히 딸려 왔다. 그러면서도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었다.
“그대가 있잖아.”
“이 양반아, 당신이 안 괜찮잖아!”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유쾌하게 웃으며, 시오한이 이도하의 손을 잡았다. 긴 손가락이 부드럽게 이도하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와 단단하게 잡았다.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대를 기다리게 하며 시간을 허투루 쓰지는 않았으니.”
“안 돼.”
“화이람, 처음에는 그대를 소환하자마자 돌려보내야 했지.”
첫 소환- 칼자루의 칼을 산산조각 낸 날이었다. 이도하는 그날 제 눈에 섬광이 돌았다는 것도 뒤늦게야 알았다. 힘의 사용이 자유로운 제 세계였더라면 섬광은커녕 특기를 사용한 낌새도 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를 소환하느라 이미 마력을 쓴 시오한의 남은 마력을 저도 모르게 끌어다 써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얼마 남지 않을 마력을, 박박 긁어내는 바람에. 그래서 시오한이 피를 토했고. 이도하로서는 별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가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시오한이 선수를 쳤다.
“두 번째는 밥을 먹었어.”
고작 이틀 만이었다.
“세 번째에는 그대를 배웅할 수 있었고.”
이도하는 감을 잡았다. 시오한의 말이 맞았다. 소환 주기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점차 소환될 때마다 오즈에 머무를 수 있었던 시간은 길어졌다. 그건 시오한이 그만큼 충분히 쉬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이도하를 소환하는 데 드는 마력을 조금씩, 줄인 것이었다.
“화이람. 나는 더 이상 그대를 기다릴 생각도, 매번 그대를 기다리게 할 생각도 없어. 그대를 소환하는 데 필요한 마력을 운용하는 건 소환주인 나의 일이야. 다행히 나는 어떤 일이든 꽤 잘하는 편이지.”
시오한이 느른하게 웃었다. 언뜻 오만해 보였으나, 무척 다정한 미소였다.
“우린 괜찮아, 화이람.”
이도하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말했다.
“…정신 놓으면 둘 다 죽는 거야.”
“그것도 좋겠지만, 아직은 너무 이르니까 꽉 잡고 있을게.”
그대 말대로, 정신줄을. 이도하가 쯕, 혀를 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진짜 미친놈.”
이도하 저를 소환하겠다고 피를 다 쏟아내던 미친놈이 어딜 갔나 했다.
시오한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서 이렇게 서슴없이 내뱉은 사람은 단연 처음이었다. 이도하도 태어나서 특기를 쓰느라 긴장하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손을 꽉 쥐었다.
“…믿는다, 시오한.”
이도하가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시오한은 조금 놀란 듯했다. 이도하가 뒷걸음질 쳤다. 성 바깥, 허공으로. 우웅- 주변으로 공기가 기이하게 진동했다. 동공으로부터 불꽃이 피어나듯, 푸른빛이 번졌다. 밤을 그대로 닮은 새까만 눈동자가 선명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이도하의 손길을 따라 시오한이 허공에 발을 디뎠다. 까마득한 허공으로 걸어 나가는 데 흔히 보일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이도하가 보는 시오한은 늘 웃는 낯이었지만, 지금은 또 색달랐다. 미소를 띤 입가가 설레 보였다. 그는 단단하게 허공을 딛는 제 발밑을 보고 있었다. 두렵지는 않지만 신기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음미하듯 시오한은 천천히 걸었다. 그의 손을 잡은 이도하가 그 걸음에 맞춰 허공에 뒷걸음질 쳤다. 시오한은 꼭 걸음마를 처음 떼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 모습이 좀 웃기고… 귀여웠다. 긴장해 있던 이도하가 웃음을 흘렸다.
“되게 웃기네.”
저도 제가 우스웠는지 시오한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오한은 첫 걸음마도 성 한 채 값은 할 굉장한 붉은 융단 위에서 뗐다. 뒤뚱거리는 아기의 걸음걸이를 보면서도 저하, 영민하시옵니다, 따위의 감격한 칭찬을 했을 텐데 이제 와 이렇게 솔직한 감상을 들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억 이후로 이렇게 어정쩡하게 걸어보는 것은 그도 처음이었다.
“느낌이 이상한걸. 유리 위를 걷는 것과 비슷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달라.”
시오한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를 걸을 일이 뭐가 있어. 여기도 스카이 워크 같은 게 있나?”
“이리스티리움 동부에 브란센이라는 협곡령이 있어. 긴 협곡을 따라 수십 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는 공중요새지. 그중 하나가 전부 유리로 되어 있어 브란센의 명물이야. 시찰을 갔다가 올라가 보았는데, 내가 올라서니 다들 불안해하여 즐겨보지는 못했어.”
두 사람은 조금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신중히 한 걸음 한 걸음 디디다 산책하듯 가벼워지자 발밑에 신경을 끌 여유도 생겼다. 이도하는 무척 즐거워졌다. 축제 때 셔틀을 돌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공중 산책이라며 홍보를 돈 것과 달리 그때는 산책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일단 위로 올라가면서부터 열에 아홉은 비명을 질렀다. 걷기는커녕 이도하를 붙잡고 놔주지도 못했다. 허공에 떠서 믿을 거라고는 이도하 저밖에 없으니 그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어쨌든 산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정말 공중 산책이라고 해도 좋았다!
“당신이 올라갔다고 불안해하면 부실공사지. 싹 다 옷 벗겨.”
시오한이 웃었다. 계약주의 특권으로 이곳에서는 낯선 표현을 알아들었을 그는 표현이 재미있네- 하며 눈을 접었다. 이도하가 코웃음을 쳤다. 시오한이 어깨를 흔들며 웃더니 손을 꽉 쥐었다.
“아니야, 화이람. 다리는 튼튼했어.”
시오한이 이도하를 당겼다. 놀란 이도하가 숨을 들이켰다. 둘의 위치가 바뀌었다. 시오한의 등 뒤로 멀리 뻗은 성도의 불빛이 찬란하게 펼쳐졌다. 그가 이도하를 이끌었다.
“다만 알면서도 걱정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
시오한은 즐겁게 잡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씁, 놀래라. 이도하가 눈을 홉떴다. 하하, 시오한은 웃기만 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음에 가서 한 번 두드려 보자. 튼튼한가.”
“그래. 함께 가, 화이람.”
이도하의 으름장을 시오한이 물 흐르듯 넘겼다. 저놈의 수작 저거…. 이도하가 결국 픽 웃고 말았다. 마음이 들뜨고 즐거운 탓에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다리를 두드려 보러 가든, 구경하러 가든 그렇게 놀러 다니는 것도 다 좋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