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럴까….”
이도하의 눈길이 약쟁이의 입가에 닿았다. 한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마치 어디까지 찢어버릴까 고민하는 것처럼. 카페 안은 완전히 침묵에 휩싸였다. 묘한 긴장감과 흥분감이 꽉 차 있었다. 아무도 이 사태가 어떻게 끝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오기로 똘똘 뭉친 약쟁이는 절대로 사과할 것 같지 않았고, 그 약쟁이가 꼭지까지 돌아버리게 한 건 이도하였다.
“이도하씨…. 아.”
이도하씨가 정말 사람을 찢어버리기 전에 말려야겠다, 하고 일어서던 김윤혜가 우뚝 섰다. 이도하도 눈을 크게 떴다. 턱 밑으로 바다의 물결 같은 푸른빛이 일렁였다. 핸드폰을 들이대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술렁임이 일었다. 소환진이다- 소환진이야- 찰칵거리는 카메라 소리가 박수 소리처럼 순식간에 시끄럽게 침묵을 깨트렸다. 이도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푸른색 소환진이 펼쳐져 있었다.
“으, 으아아, 놔! 놔! 놓으라고! 놔!”
덩달아 이도하와 함께 소환진 위에 서 있던 약쟁이가 공포에 질려 몸부림쳤다. 이미 손아귀 힘이 풀어져 있던 이도하에게서 풀려난 남자가 기겁을 하고 허겁지겁 물러서다 우당탕- 요란하게 넘어졌다.
[화이람]
목소리가 들렸다. 시오한의 목소리였다. 낮고, 언뜻 바람 소리처럼 서늘하지만 다정한 목소리. 지난 며칠 동안 몇 번이고 환청처럼 맴돌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선명했다. 이도하가 질끈 입술을 물었다. 그가 눈을 감았다. 소환진의 푸른빛의 강렬해지는 만큼 그의 신형이 흐려졌다.
넘실거리던 빛이 일순 멈추었다. 파앗- 수백만 수천만 알갱이로 흩어지는 순간, 이도하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푸른빛이 불꽃의 잔재처럼 넘실거리다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모두의 시선이 꽂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굳어 있다가… 무슨 버튼이라도 켜진 것처럼 와르르 떠들기 시작했다. 개쩐다- 미친 대박- 하나같이 흥분한 목소리였다. 바닥에 넘어진 약쟁이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다들 핸드폰에 몰두해 있었다. 외면 받은 약쟁이는… 멍하니 앉아있다 곧 이를 악물고 벌떡 일어났다. 시발! 하고 크게 외쳤지만 잠시 눈길만 줄 뿐 여전히 관심은 없었다.
“이규원,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
“닥쳐!!”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걷어찬 약쟁이가 거칠게 남자를 밀치고 사라졌다. 밀쳐진 남자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젓다 김윤혜와 눈이 마주쳤다. 슥,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남자는 다시 김윤혜를 보더니 별안간 윙크를 했다. 준수한 외모에 어울리는 제법 근사한 윙크였다. 김윤혜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숨을 들이켜자,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로 밀려들었다. 이도하는 눈을 떴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바깥이었고, 밤이었다. 아주 높은 어딘가의 옥상이었다. 밤을 맞이한 세상은 지평선마저 사라져 오직 까맣고… 반짝였다. 하늘과 땅을 구분할 것 없이 밤 그 속에 그대로 잠긴 것 같았다.
위로는 깨어진 보석의 파편처럼 수없이 흩뿌려진 별들이 달도 없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아래로는 사람의 온기가 묻은 것 같은 주홍빛 불빛들이 땅 위의 별처럼 무수히 반짝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든 빛이 살아있었다. 웃음소리, 이야기 소리, 혹은 울음소리를 속삭이느라 분주했다.
이곳저곳에서 이따금 솟아오른 연기들은 밤하늘 속으로 흩어졌다. 불어온 바람에 그 연기가 묻어 있었다. 머리칼을 흔들었다. 보채는 어린아이처럼.
“제법 예쁘지?”
별이 흩어진 밤하늘, 서늘한 공기,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닮은 목소리였다. 이도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시오한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으며 팔을 벌린다. 평소였다면 코웃음이나 쳤겠으나… 이도하가 성큼성큼 걸었다. 설마 순순히 그렇게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듯, 시오한의 눈이 커졌다. 이도하가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어깨 위로 흩어진 금발에 밤공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시원한 체향이 섞인 그 향이 좋아, 이도하는 그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화이람?”
“응.”
조금 놀란 듯 당황스럽게 서 있던 시오한이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등 뒤로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내려앉아 이도하를 감쌌다. 밤바람은 차가웠으나, 그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를 안 이후로 늘 시오한은 그랬다. 이렇게 안고 있으니 꼭 모닥불을 끌어안은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고… 안심이 되었다. 그냥 다 괜찮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안도가 시오한이 것인지 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필요 없었다. 이대로면 다 좋을 것 같았다.
“왜 화가 나 있지?”
“그냥… 날파리가 얼쩡거려서.”
시오한이 낮게 웃었다. 다 안다는 듯이. 그러니 정말 방금 전 머리가 뜨거워질 정도로 열 받았던 일이 별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약쟁이는 정말 날파리에 지나지 않았다.
“금방 부른다더니.”
시오한 좀 더 몸을 숙여 이도하를 제 품에 넣었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이도하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미안해, 화이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날 기다렸어?”
“…그래.”
이도하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를 보자마자 뭔가 목 아래를 탁 때리며 북받쳐 올라와 와락 달려든 주제에 이제 와 아니라고 하면 그것도 이상할 터였다. 그리고 정말로 그를 기다렸으므로, 그다지 둘러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도하는 그를 이렇게 품에 안고서야,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그를 기다렸음을 깨달았다.
“당신이 보고 싶었어.”
“……”
시오한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뜻 아주 근심스러운 한숨인 듯 했으나, 이도하가 여전히 시오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시오한은 분명 기뻐하고 있었다. 속이 간질간질하고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심장을 따라 해바라기를 닮은 노란 물이 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무하네. 화이람. 오늘은 내가 그대를 기쁘게 해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선수를 치는 게 어디 있나. 시오한이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두 팔은 여전히 이도하를 착실히 보듬어 안고 있었다. 이도하 역시 덩치가 작은 편이 아니고 꽤 무게를 실어 기대었는데도 먼저 떼어낼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온종일 이러고 있어도 타박 하나 없을 것 같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그런 생각이 문득 스쳤다.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좋다. 이도하는 이제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애니멀 테라피는 아닐 테지만, 시오한을 만지작거리면 기분이 좋았다. 계약주와 계약자의 관계이기 때문인지, 그걸 넘어서 피를 나누고 맹약을 한 사이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뭐 문제인가. 시오한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저 변태가 되겠지만, 그것도 아니니까. 그것도 아니니까… 별안간 기분이 좋아졌다.
‘그 거시기하다는 감정이 이도하씨 것이 아니라면 결국 오르페노스 황제의 감정이라는 말이잖아요. 감정 동조가 아니라 이도하씨 감정이라면 이도하씨가 좋아한다는 뜻이고. 어느 쪽이든 결국 원웨이는 사랑이라는 말 아니에요?’
음. 이도하는 갑자기 몹시 부끄러워졌다. 문득 사실 이게 좀 부적절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시오한의 어깨에 이마를 조금 비비다 아쉽게 떨어져 나왔다. 고개를 들자 코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반 뼘 정도의 차이로 키가 엇비슷했으니 정말 코끝이 스칠 만큼 지척이었다. 순순히 이도하가 하는 대로 그를 놓아준 시오한은 눈매를 휘며 웃고 있었다.
마력을 운용하고 있어서인지, 황금색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감돌고 있다. 꼭 달이 뜬 것처럼. 머리칼과 같은 황금색 속눈썹이 매끄럽게 빛났다. 예뻤다.
그는 충동적으로 손을 올렸다. 무심코라도 움찔할 법한데, 시오한은 반쯤 제 얼굴을 감싸는 손길에도 여전히 이도하만 응시할 뿐이었다. 이도하는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그 속눈썹을 쓸어보았다. 시오한이 손길을 따라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예민한 손끝으로 길고 가는 속눈썹이 올올히 스쳤다. 부드럽고, 간지럽고… 등줄기가 저릿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도하의 시선이 시오한의 입술로 떨어졌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이도하는 멍하니 그 입술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쿵쿵,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도 아니고 이게 뭐지, 했더니 제 심장 소리였다. 미친, 이게 왜 이렇게 소리가 크담. 심장이 점점 위로 올라오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눈을 뜬 시오한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기를 아주 가득 담고서. 번쩍 정신이 돌아왔다. 끊이지 않고 머리칼을 흔들고 있던 차가운 밤바람이 그제야 한꺼번에 불어 닥치듯 느껴졌다. 이도하가 얼른 물러섰다. 어느새 등허리쯤으로 미끄러져 있던 손이 허리를 스치고 떨어져 나갔다.
“…왜- 큼, 왜 웃어?”
목소리는 또 왜 잠기고 난리야. 이도하가 얼른 헛기침을 했다.
“그냥. 기뻐서.”
시오한이 손을 뻗었다. 다가온 손이 바람에 헝클어진 앞머리를 가볍게 정돈해 주었다.
“그대가 앞에 있는데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겠어.”
보고 싶었다고도 해 주고. 안아주기까지 하고. 연이은 직설 화법에 공격당한 이도하는 잠깐 말문을 잃었다. 당신 진짜 나 좋아해-?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간신히 내려갔다. 이도하는 마른세수를 하며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다가, 그냥 불쑥 드는 생각을 말해 버렸다.
“…당신이 좀 더 나를 일찍 불렀으면 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