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22화 (22/250)

22화

“약쟁이네.”

별로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당사자는 정말 약쟁이라 용케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닌 척하던 약쟁이가 눈을 부릅뜨더니 김윤혜를 향해 테이블 사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일행은 이제 말리는 것도 귀찮았는지 태연하게 카운터에 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이 씨발년이, 뭐? 다시 말해 봐.”

사뭇 위협적인 모양새였으나, 김윤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너 약쟁이라고, 씨발 놈아.”

그쪽 지퍼 열렸어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아주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내용이 전혀 그렇지 못했다. 차분한 얼굴과 목소리, 제 덩치에 비해서 머리 하나는 작은 조그맣고 어린 여자애가 하는 욕이 저와 수미상관을 이루자 약쟁이는 아주 눈이 돌아버렸다. 나는 해도 되는데 너는 안 된다는 사고를 가진 모양이었다. 고함을 일발 장전하듯 어깨에 힘이 쫙 들어가는 순간 김윤혜가 선수를 쳤다.

“가정교육을 약으로 받았니? 카페에서 왜 떠들어, 시끄럽게.”

“허, 이 개년이 진짜….”

약쟁이가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손은 김윤혜에게 닫기도 전에 우뚝 멈추었다. 허공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약쟁이는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어떻게든 팔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팔은 그대로고 도리어 제 몸만 딸려갔다. 당연히, 김윤혜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약쟁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김윤혜의 시선이 쓸고 지나갔다. 시선이 고간에 조금 오래 머물렀다. 차버릴까, 고민하는 듯했다. 수치심을 느낀 약쟁이가 이번에는 다리를 휘둘렀다. 김윤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쩍 몸을 빼며 의자를 내밀었다. 약쟁이가 의자 모서리에 종아리를 콱 찍더니 악! 소리를 질렀다.

“이 개씨발년!! 너 내가 죽여 버린다! 야!”

“아우, 시끄러워.”

“가자.”

여태까지도 충격에 휩싸여 앉아 있던 이도하가 말했다. 약쟁이는 정말로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짐을 챙기려던 김윤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리 옆에 곱게 모셔두었던 짐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김윤혜가 줄곧 안고 왔던 말 인형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김윤혜가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안 피곤하냐. 그냥 그거만 안고 가.”

김윤혜도 이도하도 그 많은 짐을 그대로 들고 있었던 건 플렉스한 기분을 실시간으로 느껴야 한다, 는 김윤혜의 지론에 따라서였다. 이도하도 이대로 짐을 가득 들고 가 어머니 품에 안겨주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다 피곤했다. 이상하게 그냥 마음이 초조했다. 그러나 김윤혜의 관심사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물체 도약? 진짜? 이도하씨 지난번엔 도약 못 했잖아요!”

“돌멩이로 몇 번 연습하니까 되던데. 나잖아.”

김윤혜가 입을 딱 벌렸다.

“와, 재수 없어!”

솔직한 감상에 이도하는 그냥 픽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퍽 정다워 보여 그랬는지, 아니면 허공에 붙박인 꼴이 되어 아등바등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찍히는 수치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는지 약쟁이가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이 씨발놈들아아!!”

굉장한 성량에 김윤혜가 깜짝 놀랐다. 그러자 허공에 멈춰 있던 팔이 흔들렸다. 약쟁이는 거의 발광을 하는 수준으로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걸리는 의자고 테이블이고 간에 죄다 난리가 났다. 김윤혜가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진짜 약을 한 게 틀림없었다. 이도하는 그냥 무시하고 가려고 했다. 예로부터 미친놈을 상대하는 데는 약도 없다고 했다.

“어딜 가! 어디가 이 시발 호로새끼야! 야! 야, 너지! 너 그 인솜인지 인돔인지 하는 새끼 너잖아! 이 괴물새끼! 좆도 없는 게 거지새끼가 운 좋게 뭣 좀 갖고 태어났다고 유세 부리는데, 너 존나 이기적인 새끼야, 더러운 새끼, 퉤!”

횡설수설하며 약쟁이가 침을 뱉었다. 침은 이도하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맥없이 떨어졌으나 확실히 기분은 더러웠다. 약쟁이는 어떻게 해서든 이도하가 지금 저만큼 돌아버리는 걸 보겠다는 기세였다. 살다 보니 난데없이 이런 시비도 다 받아보는구나. 이도하로서는 그냥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돌연변이 새끼들이 사람대우 해주니까 주제도 모르고. 그냥 싹 다 잡아다가 처박아 놓고 저 깜둥이 노예새끼들처럼 부려먹어야 하는데, 시이발, 세상이 아주 미쳐 돌아간다니까. 야, 야, 말해 봐, 계약자 새끼들은 지 주인들이랑 존나 붙어먹는다며, 너도 그 황제 새끼랑 붙어먹었냐? 빠구리 좀 쳤냐고.”

그리고 약쟁이는, 보아하니 과연 사람 돌게 만드는 일에 재능이 있었다. 후, 한숨을 한 번 쉰 이도하가 돌아섰다. 약쟁이가 히죽거리고 웃으며 사타구니를 흔들었다.

“그 황제 놈이 그렇게 예,”

“야.”

약쟁이가 굳었다. 분명하게 자의는 아니었다. 석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지저분하게 고간을 내밀고 흔들던 자세 그대로 멈춰버렸다. 당황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허공에 팔이 붙박였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말 인형을 챙겨 들었던 김윤혜가 쯧, 혀를 찼다.

“시끄럽다잖아.”

이도하가 약쟁이에게 다가갔다. 남들보다 유난히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특기자들이 일정 이상의 특기를 사용하면 눈에 섬광이 돈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정도는 이도하에게 숨 쉬는 것과 별 차이도 없다는 뜻이었다.

“주둥이 찢어버리고 싶네, 씨발….”

이도하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주둥이가 아니라 온몸을 찢어버릴 기세였다. 온몸이 꼼짝없이 고정된 채로도 오기와 분노로 이를 까득까득 갈던 약쟁이의 눈에 두려움이 서렸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눈앞의 이도하가 정말 마음만 먹으면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보다 쉽게 그렇게 할 수 있음을 그는 이제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도하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순간 팟, 이도하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아, 미안해요. 근데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약쟁이의 일행이었다. 약쟁이와 다를 거 없이 한눈에 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을 잔뜩 바른 남자였다. 잘 세팅된 갈색 머리칼에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 만한 다정한 인상이었으나, 이도하에게는 미친놈 친구일 뿐이었다. 옛말에 끼리끼리라고 했다. 짜증스러운 이도하의 시선이 꽂히자 남자는 잠시 난감해하다,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러면 곤란해질 거거든요. 이 친구가 집에서 내놓은 개망나니이긴 한데, 그래도 그 집이 워낙에 체면을 따져서.”

집- 하며 남자가 두 손가락을 토끼 귀처럼 까딱였다. 알아차리는 데 큰 눈치가 필요한 손짓은 아니었다. 차 한 대 값은 넘는 행색 하며, 상식이라고는 개나 준 것 같은 성격 하며. 이렇게까지 전형적일 필요가 있는가 싶은 재벌 3세쯤 된다는 소리겠다. 이러나저러나 이도하는 그냥 어쩌라고였다. 아니라도 상관없었겠지만 이도하도 며칠 전부터 재벌이 된 참이었다.

“그래서 뭐.”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이 친구가 원래 성격이 개 같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낮부터 술이 좀 들어가서 그랬는지… 아무튼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정신 차리면 이 친구도 직접 사과할 거예요. 그러니까 한 번만 참아주면 안 될까요? 그쪽도 귀찮아지는 건 싫잖아요.”

남자는 제 손을 꼭 모으고는 정말 간곡하게 사과하기 시작했다. 이도하는 그냥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헛웃음만 내뱉었다. 김윤혜는 이제 심드렁하게 앉아서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스무디를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잠깐 김윤혜를 돌아본 이도하는 정말 한껏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를 흘긋 본 뒤, 다시 약쟁이를 보았다.

이도하는 잠깐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정말 짜증나고 빡치지만 한 번 참아보려는 모습이었다. 남자도, 조금 무서워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난데없는 싸움을 구경하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현실이 그렇지 뭐, 하고. 이도하가 몸을 돌렸다.

짝-!!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쫄깃한 타격음이 경쾌하게 울렸다. 헉-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가 어어- 하며 입을 벌렸고, 맞은 장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석상처럼 굳어 있던 약쟁이는 아직 사태 파악이 덜 돼 어안이 벙벙했다. 제 몸이 풀린 것도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맞은 뺨에 가련하게 손을 올리는데, 다시 한 번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짝-!!

고개가 반대로 돌아갔다.

“깽값 물지 뭐. 야, 손 치워.”

이도하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관자놀이께를 얻어맞은 약쟁이가 비틀 넘어갔다. 그러나 넘어지지도 못하고 다시 똑바로 세워졌다.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이도하가 반대쪽 뺨을 후려쳤다. 짝, 짝, 속수무책으로 두 대를 더 얻어맞고서야 약쟁이가 정신을 차렸다.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지켜보던 남자가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이 시발놈이-”

짝-!!

“시발놈이 뭐.”

다시 한 번 약쟁이를 후려친 이도하가 이번에는 와락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의 코앞까지 끌려간 약쟁이는 몸부림을 칠 뻔도 했으나, 마취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이 늘어진 채였다. 시선이 부딪친 눈에만 오기와 분노, 수치심과 두려움이 들끓고 있었다. 이도하가 코웃음을 쳤다.

“시발놈이 뭐?”

찢어버려, 찢어버려. 관중 속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마치 경기를 응원하는 것처럼 묘한 흥분감에 휩싸인 목소리는 이도하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는 눈앞이 좀 아찔할 정도로 열 받은 상황에서도 그 기이한 응원이 우스워 픽 웃고 말았다. 약쟁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도하가 속삭였다.

“그럴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