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21화 (21/250)

21화

“싸인까지 해주고. 이도하씨 보기보다 말랑하네요.”

김윤혜 혼자서 거의 다 해치운 식사를 한상차림을 마무리하고 나오는 길에 이도하는 결국 소위 연예인 인증샷을 찍었다. 카운터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매니저와 한 번 찍고 나니 아르바이트생이 수줍게 제 핸드폰을 내밀어 셀카도 찍었다. 급하게 어디서 꺼내 온 것 같은 가게 팸플릿 뒤에 싸인을 해 주는 거야 별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종이가 식당 벽에 걸리는 건 차마 볼 수가 없어 이도하는 서둘러 가게를 나서야 했다.

“손 몇 번 움직이는 되는데 뭐 대단한 거라고 해 주고 말고가 어디 있냐. 그냥 한 거지. 이거 주세요.”

“이 색상으로 드릴까요?”

이도하의 옆에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던 직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색이 더 있다니. 그는 그 친절한 미소에 약간 겁을 먹고 물었다.

“…다른 색도 있어요?”

“이 제품은 버밀리온 칼라랑 블루 아톨 칼라 두 색상 있으세요.”

이도하가 김윤혜를 바라보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받은 김윤혜가 손을 흔들었다.

“그냥 이걸로 주세요.”

“예, 고객님. 그럼 셀렉하신 나머지 제품과 함께 준비해 드릴게요. 잠시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푹신한 소파에 앉으니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말 인형을 고른 김윤혜가 옆에 털썩 앉았다. 이도하가 보기에는 전혀 귀엽지도 않고 안고 자기에도 영 뻣뻣해 보이는, 다시 말해 쓸 데라고는 없어 보이는 인형을 왜 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김윤혜는 이도하를 따라 매장 투어를 하며 인형이란 인형은 다 쓸어 모으고 있었다.

“차라리 가방을 사지, 그 돈 주고 인형은 뭐 하러 사?”

“맨날 출근 퇴근만 해서 가방 들 일도 없어요. 인형은 예쁘긴 한데 실용성은 없어서 내 돈 주고 사긴 아깝지만 남이 사주면 완전 땡큐거든요.”

또 나름 일리가 있다. 김윤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매장에서 준비해준 케이크를 잘라 먹었다. 이도하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아버지 차 사드린다더니 뭐 샀어요? 람보르기니? 페라리? 연세가 있으시니 아무래도 롤스로이스나 마세라티?”

“레인지 로버.”

“집은요?”

“지금 집 아버지가 지은 거야. 돈 걱정 없이 건축가의 꿈을 맘껏 풀어보라고 하셨더니 좋아하시던데.”

“오, 건축 게임 좀 하시겠네.”

이도하가 픽 웃었다. 그는 얼마 전에 세 번의 소환에 걸쳐 매개한 마력을 에너젠에 넘겼다. 마력이란 게 원래 계약자가 제 세상이 아닌 곳, 즉 오즈에서 이계의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계약주가 제 세상에 간섭한 힘이라, 돌아와서는 하등 쓸모가 없었다.

그걸 독일의 어느 오베론이라는 호기심 많은 계약자가 어떻게 써먹을 수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에너지로 치환해낼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이론으로 파고들면 이도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고 평생 이해해 볼 생각도 없는 심오한 원리가 있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소환으로 체내에 쌓인 마력을 에너젠에 인도하면 에너젠은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는 나라를 부자로 만들고 계약자는 돈을 얻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환상의 콜라보가 된다는 말이었다.

첫 소환에는 피를 쏟고 수혈을 받는 등 영 시기가 좋지 못했던 덕에 가지 않았다. 두 번째 소환부터는 슬슬 에너젠에서 연락을 해 왔으나 귀찮았던 이도하가 차일피일 미루었고, 세 번째 소환부터는 사채업자처럼 독촉을 해대 그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오즈가 소환과 계약주 없이는 계약자들을 허락하지 않은 것처럼 이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제 것이 아닌 이물질인 마력도 소환된 계약자가 에너젠에 인도하지 않으면 결국 천천히 흩어지는데, 그게 결국 다 돈이니 이도하처럼 미적거리는 계약자들은 여태 없었다.

인소더블이 얼마나 많은 마력을 매개했을지 설레 두근두근 신상품을 기다리고 있던 에너젠의 관계자들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잔뜩 성이 나 있다가… 당황했다.

무려인지 고작인지, 세 번에 걸친 소환으로 쌓인 마력이 너무 많았다. 에너젠이 감당하기가 벅찰 정도로. 필수 교육 이수 시간에 영상으로나 봤던 거대한 수조에 들어갔던 이도하는 주변이 벌겋게 물드는 순간 어, 이거 뭔가 잘못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덜덜덜 건물이 흔들리며 물–물은 아니지만- 무색무취무미로 물과 매우 닮은 액체가 따뜻해지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나오니 관계자들이 괴롭고 당황스러우면서도 기쁜, 몹시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한 것이다.

상기된 에너젠의 김기현 소장은 과연 인소더블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긴 설명과 칭찬을 곁들었지만, 결국 떼돈을 벌 예정이라 매우 기쁘긴 한데 다음부터는 부르면 재깍재깍 오라는 점잖은 잔소리였다. 그리고 이도하는 아무 무늬도 없이 영롱하게 반짝 빛나는 짙푸른 카드를 받아, 비싼 차에 모셔져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에는 또 다른 인소더블인 우르슬라의 마력을 인도받아 본 적 있는 독일의 기술자들과 협업을 하니 마니 했지만 다음날 뉴스에서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인소더블이 매개한 마력이 굉장하다! 우리 이제 부자 된다! 우리나라 최고된다! 이런 요지의 뉴스만 가득이었다. 또 뒤늦게 대책을 세우니 하며 혼나기는 싫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이도하는 티브이를 껐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영롱한 푸른빛 카드는 꺼내보지도 않던 차였다. 막상 뭐든 다 사라고 했지만 특별히 사고 싶은 것도 없었다.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잔뜩 들은 탓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돈이 다 시오한의 마력이라고 생각하니 영 기분이 이상했다. 대한민국이 시오한의 마력으로 굴러가다니. 대한민국을 굴리는 것도 모자라서 수출까지 할 정도란다. 나라를 굴릴 마력을 써댔으니 시오한이 그렇게 쓰러지던 게 굉장하게 와 닿았다.

……보고 싶었다. 시오한이.

화이람- 하고 부르는 소리를 분명히 들은 것 같은데 돌아서면 아무것도 없기가 여러 번이었다. 처음에는 좀 서운하고 아쉽다가, 시간이 지나자 이도하는 급기야 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닥치랄 때는 뭔 마트고 학교고 공원이고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발밑을 퍼렇게 물들이더니 왜 이럴 때는 또 조용한가 말이다.

‘스트레스 쌓일 때는 돈 쓰는 게 최고예요.’

그리고 마침 김윤혜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소곤거린 것이다. 이도하는 기꺼이 넘어갔다. 모름지기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 선물을 사야 한다는데 저는 월급은 아니지만 꽤, 사실 아주 많이 벌었으니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요, 같은 것을 한 번 해볼 생각이었다.

해서 이도하는 가장 먼저 아버지 몫의 차를 새로 계약하고, 백화점 명품관을 돌며 어머니 몫과 가족 친지 아무튼 선물을 줄 만한 사람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에게 살 것들을 잔뜩 샀다. 두 손이 모자랄 정도였지만, 그는 특기가 있으니 괜찮았다. 특기를 쓰기 전 자기도 모르게 멈칫했던 것만 빼면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런데 이도하씨, 문득 생각났는데요.”

“무슨 생각.”

나란히 앉아 딸기 스무디를 쪽쪽 빨던 중 김윤혜가 말했다. 이도하는 음료 바닥에 잔뜩 깔린 딸기 펄을 잘근잘근 씹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백화점 앞 카페에 앉은 두 사람 주변으로 잔뜩 쌓인 고가의 명품 상자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긋 시선을 주었다가, 오, 이도하다- 하고 알아보며 핸드폰을 들이대는 일에 그는 이제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거시기하다는 감정이 이도하씨 것이 아니라면 결국 오르페노스 황제의 감정이라는 말이잖아요. 감정 동조가 아니라 이도하씨 감정이라면 이도하씨가 좋아한다는 뜻이고. 어느 쪽이든 결국 원웨이는 사랑이라는 말 아니에요?”

이도하가 말없이 스무디 컵을 툭 떨어트렸다. 옆으로 처량하게 툭, 넘어졌다. 김윤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극적인 반응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진짜 생각 못 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랑은 무슨 사랑이야. 그냥 재미있어 한다고.”

재미있어 하고, 즐거워하고, 그냥 그렇다고. 웃기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겠냐며 이도하가 더듬거렸지만, 김윤혜는 정말 웃기는 사람이라는 듯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그게 이도하씨 감정이라면 사랑하는 것 같다면서요? 그럼 저쪽도 마찬가지지.”

“내가… 내가 언제?”

“사랑이라고 하니까 너무 오글거려서 그래요? 러브?”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도하는 입을 뻐끔거리며 뭐든 대답을 하려 했다. 난데없이 끼어드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이야, 러브, 사랑, 조오오치. 졸라 좋지. 돈 많고 여자 있으면 시발- 세상이 천국이지, 안 그러냐?”

귀를 막아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이도하도 김윤혜도,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쳐다볼 정도였다. 시선이 마주친 것은 아주 젊은 남자였다. 나이가 이도하와 비슷해 보였고, 명품에 관해서라면 오늘에야 뭘 좀 배운 이도하가 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것들이 차 몇 대 값은 나올 남자였다.

반듯하고 멀끔해 어디 가도 잘 생겼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았으나, 표정이 아주 더러웠다. 명백히 이도하와 시선을 마주하며, 남자가 들으란 듯이 크게 떠들었다.

“난 진짜 뭣도 아닌 새끼들이 돈벼락 좀 맞았다고 어설프게 분수에도 안 맞는 거 잔뜩 사는 거 보면 존나 꼴 보기가 싫어. 진짜 왜 이렇게 거슬리지?”

“아, 좀 닥쳐, 진짜. 가자고.”

“아, 놔 봐. 내가 존나 틀린 말 했어? 야, 너도 솔직히 말해 봐, 새끼야. 시발 그지 같은 새끼들이 돈맛 좀 봤다고 옆에다가 잔뜩 쌓아놓고 저게 뭐 하는 짓이야. 존나 촌스러워서 진짜.”

옆의 일행이 팔을 끌었으나 남자는 보란 듯이 더 목소리를 키우며 팔을 탁 쳐냈다. 누군지 콕 집지는 않았으나 누가 봐도 이도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도하와 김윤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둘 다 저런 유치한 시비에 시간을 낭비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렇지 않았는지, 무시를 당하자 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왜 저래- 미쳤나봐- 하는 소리가 들리자 더 했다.

“시발, 존나 빡치네? 안 그러냐고! 따지고 보면 존나 돌연변이 기형아 새끼들 아니야! 특기니 계약이니 존나 유세 부리는 거 나만 싫어? 괴물 새끼들이 운 좀 좋아가지고 대우받으니까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시발 인간들도 존나 대가리가 빠가사리지, 뭐 오즈? 존나 지랄 대잔치 진짜 푸하하하!”

“아, 존나 골 때리네 진짜….”

남자는 과장되게 웃음을 터트렸고, 옆의 일행의 이마를 부여잡았다. 시끄러우니까 나가죠, 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던 김윤혜가 흘긋 보더니 한 마디 던졌다.

“약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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