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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0화 (20/250)

20화

금방 다시 부를게. 기다릴 수 없어. 그렇게 말한 것치고는 꽤 긴 시간이 아닌가… 하고. 이도하는 어느 순간 서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제 자신에게 놀랐다. 이도하는 시오한이 그를 부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화이람- 그 목소리가 시시때때로 귓가를 맴돌아 이유 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제가 낯설었다.

그 지경이니, 오즈에서 있었던 일들이 두더지 잡기 게임의 두더지들처럼 때를 가리지 않고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것도 이도하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웃다가, 그다음에는 얼마 안 된 흑역사처럼 이도하 미쳤네, 하고 말았다가, 또 그다음부터는 오즈에서의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왜 그랬지? 돌았었나?

누가 봐도 이도하 저보다는 키가 반 뼘은 큰 남자를… 깔고 앉다니. 심지어 그 위에 엎드리다니. 괜히 그 궁인이 저를 천하의 염치없는 놈팽이 보듯 했던 게 아니었다. 물론 시오한은 불편한 기색도, 싫은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즐거워했으나 어차피 그는 뭐든 즐거워했다. 문제는 저였다. 속속들이 떠오르는 기억이 무엇보다 문제였다.

얼굴은 제대로 상을 구현해낼 수도 없을 만큼 또렷하지도 않으면서 대체 감각은 왜 이렇게 또렷하다는 말인가. 다리 사이에 갇혔던 얇고 단단한 허리. 따뜻한 체온. 뺨에 언뜻 와 닿았던 귀 끝. 차갑고 매끄러운 머리카락. 낮고 정갈하면서도 바로 곁에서 들으니 옅은 쇳소리가 섞여 있던 목소리.

‘화이람.’

“미쳐버리겠다, 진짜….”

이도하는 손바닥의 도톰한 부분으로 눈을 꾹 눌렀다. 시오한더러 미친놈이라고 했지만 이제 보니 저도 별다를 것 없는 미친놈이었다. 끼리끼리 모인 것이다.

“이도하씨, 피자 안 먹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꿀 주꾸미 세트를 즐기고 있던 김윤혜가 물었다. 이도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김윤혜씨 다 먹어라.”

“개꿀.”

“너는 진짜….”

“혼자 몸부림을 치고 있으니 배려해 준 건데.”

통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는 상태는 맞았다. 그사이에 피자 한 조각을 해치운 김윤혜가 다시 주꾸미를 밥에 비볐다. 김 가루를 솔솔 뿌리며 김윤혜가 물었다.

“그래서 얼빠인가 물어본 거예요? 본인 게이 됐나 싶어서?”

아주 진심이었는지 김윤혜는 웃지도 않았다. 이게 웃자고 한 소리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 이도하는 저도 어느 장단에 맞춰 가야 할지 헷갈렸다. 어쨌든 애써 둘러댄 것을 그렇게 정확히 뼈를 탁 때리니 쿡 찔린 것처럼 좀 아프기는 했다.

“그놈의 게이 진짜… 당신 그거 세상 게이들 모독하는 소리야.”

“무슨 모독이에요. 인류애적인 말이지. 알았어요. 사랑에 빠졌다고 해요. 그게 그거네.”

이도하가 이마를 짚었다.

“얼른 먹어, 김윤혜씨. 다 먹어라.”

“투샷이 예쁘면 사귀라는 말이 있는데.”

“좀, 주제에 집중하자. 사심 넣지 말고.”

또 우와앙 주꾸미 볶음밥을 잔뜩 욱여넣은 김윤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미동도 없이 우물거리느라 해바라기씨를 넣을 만큼 넣은 햄스터처럼 볼만 씰룩거렸다. 하기야, 크게 다르지도 않다. 집중력이 잔뜩 깨지는 모습이었지만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틀림없었다. 김윤혜를 본 게 한두 해도 아니었다.

“왜 그런 결론에 다다랐는지나 좀 자세히 말해 봐요. 내가 하는 짓이 이상한데 이거 얼빤가? 하면 내가 축하합니다, 하는 말밖에 할 게 더 있겠어요? 이상하면 왜 그럴까도 생각해 봤을 거 아니에요.”

“…알겠다고.”

억지로 떠밀린 아이처럼, 이도하는 느리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이렇게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속으로 두서없이 생각만 하던 걸 입 밖으로 내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결론에 도달할 것 같은 싫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김윤혜는 원래 집요했다. 물론 일의 일환이기도 하겠지만, 김윤혜가 일과 일이 아닌 것을 썩 구분하지도 않는 탓이었다. 김윤혜가 궁금해하는 게 곧 일이었고, 일이 곳 궁금한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맹약에 관해선 제대로 알려져 있는 게 별로 없으니 이도하씨가 알려줘요- 했더랬지. 처음부터 입을 닫았다면 모를까 꺼낸 이상 이제 발을 빼는 건 어림도 없었다. 어쩌면 이도하 저도 그걸 은연중에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은 꺼냈는지도 몰랐다.

“시오한의 기분, 감정, 그런 거. 원래 그 사람은 내가 뭘 하든 재미있어 하긴 하는데, 가만 보니까 이상하잖아. 웃기야 늘 똑같이 웃는데 그 사람 속을 내가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이건 짐작도 아니고, 그냥… 알겠어. 근데 어떻게 아는지는 설명할 방법이 없어. 그냥 그래. 재미있어 하는구나, 신기해하네.”

혹은, 아쉬워하네… 같은 것들. 그리고 이상하게 저도 시오한 옆에만 가면 행동도 감정도 헤프다. 시오한이 솜털 보송보송 귀염뽀짝한 새끼 고양이도 아닌데 좀 만지작거리면 거짓말처럼 기분이 풀린다던가, 느닷없이 신이 나고 웃음이 났다가도 순식간에 가라앉는다던가 아주 널을 뛴다. 마치 고무줄에 묶여 얼마나 멀리 당겨갔든 다시 가야 할 곳으로 퉁 튕겨져 돌아오는 것처럼. 시오한에게로.

게다가 타인과의 접촉에 별로 거리낌이 없기는 하지만, 사실 이도하는 그렇게 치대는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즈에만 가면 무슨 눈밭에 던져놓은 멍멍이처럼… 스스로 떠올린 비유에 이도하가 얼핏 미간을 구겼다.

“원래 계약자들이 계약주의 감정에 좀 민감한 편이긴 해요. 왜냐하면 보통 계약주가 원하는 것들을 계약자를 통해 관철하려고 하니까요. 운전대를 같이 잡고 있어야 빡쳐도 같이 빡치지. 그런데 이도하씨는 그거보다 좀 세네요.”

“그래서?”

“이도하씨는 일반적인 계약이 아니라 오르페노스 황제와 맹약을 했잖아요. 한날한시에 그거.”

한날한시에 그거. 짧은 문장이 주는 기묘한 느낌에 이도하가 슬그머니 미간을 구겼다.

“감정도 동화되는 거 아닐까요?”

“……”

다시 고르곤졸라를 죽 뜯어내며 김윤혜가 흘긋 이도하를 확인했다.

“사실 이도하씨도 짐작은 하고 있었죠? 그게 탐탁지 않았던 거고. 이도하씨 말은 오즈에서 느끼는 감정이 계약주의 감정에 동화된 거지, 이도하씨 감정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이잖아요.”

이도하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김윤혜는 이도하 몫의 밥을 가져가 철판에 와르르 쏟아붓더니 새 숟가락 두 개로 솜씨 좋게 비비기 시작했다. 원래 여기서 일하던 사람처럼 아주 능숙했다. 가위로 남은 주꾸미를 싹둑싹둑 잘랐고, 그걸 보는 이도하는 또 아주 착잡해졌다. 눈을 자극하는 새빨간 양념에 새하얗던 밥이 착착 비벼지는 걸 보니 제가 저 밥톨 같은 신세가 아닌가, 하는 감상도 문득 들었다.

“이도하씨 보기보다 되게 감성적이다.”

김윤혜는 이제 잘 비벼진 주꾸미 볶음을 철판에 납작하게 펴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재차 이도하를 보더니 불을 낮게 줄이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것 같거든요.”

“아닐 텐데.”

김윤혜는 자존감도 높고 자존심도 강했다. 이도하의 말에 잠시 생각해 보던 김윤혜가 순순히 동의했다.

“그럴지도. 안 겪어봐서 모르죠. 그래서 기분이 나빠요?”

“아니… 몰라. 그냥 싱숭생숭하다.”

이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고 싶은데요? 계약 파기라도 하고 싶어요?”

“무슨 소리야.”

순간 심장이 철렁한 이도하가 와락 인상을 썼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시오한과 그는 맹약을 한 사이였다. 그 넓은 침전에 온통 피 칠갑을 해대고 저는 수혈까지 받아가며 병실 신세를 졌는데 벌써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날한시를 운운하는 사이인데 파기가 될 리가 없었다. 안심한 이도하가 퉁명스레 말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답이 없는데.”

“확인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볶음밥은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져 기가 막히는 냄새를 솔솔 풍기고 있었다. 김윤혜가 숟가락을 들었다.

“가설을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도하씨. 실험이요.”

“됐어. 확인하면 뭐 어떡할 건데.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다.”

“아는 게 힘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정이라도 뚝 떨어질까 봐 그래요?”

“아, 아니라고.”

“그럼 왜요?”

“밥 탄다.”

“불 껐어요.”

“……”

이도하가 꾹 입을 다물었다.

“확신할 수 없을 때는 모든 게 애매할 뿐이에요. 갈피를 잡기도 어렵고. 이도하씨가 무슨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뭘 알아야 고민도 하고 생각도 하고 길도 정하는 거죠. 계약주와의 관계를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기억이나 해 둬요.”

이도하는 바삭바삭하게 익은 볶음밥을 얇게 떠 호호 불며 입에 넣는 김윤혜를 말없이 바라보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근데 오즈에 음식은 가져갈 수 있나.”

“안 주는 게 좋을걸요.”

김윤혜가 대답했다.

“계약자들이야 이름을 지음 받고 계약주를 매개로 일시적으로나마 오즈에 머무는 걸 허락받는 거지만 음식은 아니잖아요. 먹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시험해 보고 싶으면 가져가던가요.”

“좀.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라.”

질린 듯 말하는 이도하를 보며 김윤혜가 씩 웃었다.

“이도하씨, 물론 가설이 잘못된 경우도 있는데.”

“또 뭐.”

“그거요. 그냥 이도하씨가 저세상 얼빠라 한눈에 반해서 원큐에 게…, 아니 사랑에 빠졌다는 가설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가설도 아니지 뭐. 원래 감정엔 이유도 없고 논리도 없고 개연성도 없어요.”

사랑하는 경우도 그렇게 되잖아요. 감정이 널을 뛰고, 그 사람 기분 따라 가게 되고, 닿고 싶고, 헤어지면 아쉽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로 생각나고. 가만 듣고 있으니 들을수록 더 그럴듯해진다.

김윤혜는 이도하가 또 와락 얼굴을 구길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가만히 있던 이도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차라리 게이가 된 거면 속이 시원할지도 모르겠다.”

힘이 쭉 빠진 목소리였다. 식사야 전초전이고 아직 하려고 마음먹은 게 잔뜩 남았는데 의자에 축 늘어지고 나니 이도하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높은 천장에 걸린 전등을 멍하니 보며 그는 멍하니 의식에 잠겼다.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 그런 건 돈을 두고도 하면 안 되는 말이지만 감정은 더더욱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김윤혜의 말마따나 사실 제가 지독한 얼빠라 한눈에 반한 거라고 하면 차라리 낫겠다. 남자든 뭐든, 이건 그냥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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