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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9화 (19/250)

19화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건 아니죠? 그러면 안 돼요. 지구 망해요.”

“아, 좀 조용히 해 봐. 집중이 안 되잖아.”

“진짜 별일이네. 이도하씨가 특기를 다 개발하고. 근데 가서 그렇게 마력을 쓰려고요? 부자는 되겠다.”

“됐다.”

“어디 봐요.”

김윤혜가 냉큼 인화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이게 뭐가 된 거예요. 완전히 심령사진이네.”

“처음 해 보는 건데 이 정도면 잘하는 거지. 뭘 실망하고 있어.”

이도하가 투덜거리는 것을 무시한 김윤혜는 인화지를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하얀 인화지에는 사람의 형상만 어렴풋했다. 긴 머리가 금발이고, 턱이 단정하고, 윤곽이 매우 뚜렷하며 얼굴 골격 역시 눈에 띄어 아주 잘생긴 사람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 잘 그린 그림 위에 물을 한번 왈칵 솟은 다음 조심스레 닦아낸 것 같은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이도하씨, 안 될 것 같아요.”

“또 왜?”

“이도하씨는 물론 특기가 특기니 아주 안 될 건 없겠죠. 말이 좀 이상한데, 가능은 하지만 알키오라처럼은 안되겠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완전기억능력자’였잖아요. 그것조차 특기였냐 아니었냐는 아직도 논란이지만, 어쨌든. 알키오라는 그만큼 상을 정확히 기억해냈기 때문에 그려낼 수도 있었던 거예요. 알키오라의 특기는 ‘간직하는 기억’ 이에요. 말 그대로 ‘기억’. 인화나 염사 같은 게 아니고요. 그런데 이도하씨는 아니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이도하는 뚱하게 앉아 말이 없었다. 요컨대, 상을 인화지에 그려내는 특기가 모자란 게 아니라 애초에 인화지에 그려내야 할 상이 그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없다는 말이었다.

“...그럼 그 사람을 앞에 두고 보면서 찍어낸 다음 갖고 오면 되겠네.”

“오즈에선 아무것도 갖고 올 수 없잖아요.”

“종이를 들고 가면 되잖아.”

“넘어오는 동안 다 일그러질 것 같은데….”

김윤혜가 으쓱 어깨를 털었다.

“뭐, 이도하씨 특기로 한 번 해보든가요.”

“에이 쯧.”

“주문하신 꿀주꾸미 세트 나왔습니다.”

타이밍 좋게 웨이터가 음식을 들고 나왔다. 테이블 위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르곤졸라 피자와, 주꾸미 볶음이 콩나물과 함께 수북이 쌓인 철판을 내려놓는다. 불을 켜준 웨이터는 음료까지 내려놓고도 잠시 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김윤혜가 양념과 버무리기 시작한 주꾸미를 착잡하게 보고 있던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저, 혹시 이도하씨 아니세요?”

“아, 예.”

아는 사람인가. 혹시 저만 까먹은 고등학교 동창인가. 대학 동기인가? 이도하는 좀 당황해서 웨이터를 살펴보았다.

“죄송한데 사진 하나만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사진이요?”

이도하가 되물었다.

“아, 물론 지금은 아니고요. 이따 식사 다 하시고 점장님이 사진 한 장 같이 찍어주시면 안되겠냐고 여쭤보라고 해서….”

가엾은 아르바이트생은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런 거였다. 연예인이 왔다 간 곳, 하며 함께 방긋 웃는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해서 벽에 걸어놓는… 연예인 인증샷.

이도하는 이게 뭔가 하여 잠깐 멀뚱히 쳐다만 보다, 아르바이트생이 점점 더 가여운 얼굴을 하자 그래요,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아르바이트생은 기쁜 얼굴로 김윤혜가 헤집어 놓던 주꾸미 볶음을 알맞게 섞어주고 돌아갔다.

“연예인 다 됐네.”

“나 방송 탄 거 없는데.”

“이도하씨 얼굴은 원래 알음알음 다 알았는데요 뭐. 워낙 속세에 관심 없이 검소하시니. 이번에 매개한 마력 때문에 한참 시끄럽다가 법안 통과 됐는데 몰라요?”

알다마다. 모를 수가 없을 만큼 떠들썩하게 난리를 피워대는데 어떻게 모르냐. 티브이고 인터넷이고 온 뉴스에 한동안 그 이야기뿐이었다. 당연한 순서로 기자들도 몰려들었고… 정말 한동안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도약 같은 걸 밥 먹듯 썼다가는 게으름뱅이 소가 될 거라며 등짝을 때려대던 이도하의 어머니가 그것 좀 써봐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들이 자랑스럽기는 하지만 부모 된 입장에서는 염려가 더 크다, 보는 눈이 많으니 매사에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조심해라, 사람들 마음이라는 게 연기 같은 것이라 언제 어떻게 흩어지고 휘어질지 모른다, 휘둘리지 말아라, 하는 아버지의 진지한 조언에 이도하는 정말 몸 둘 바를 몰랐다. 공명심이 없기로는 이도하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자리 잡아서 인터뷰 한 번 하는 게 나을걸요.”

“그렇지 않아도 브릿지 쪽에서 그 얘기 하더라. 근데 김윤혜씨. 꼭 주꾸미여야 했어?”

피자면 피자고 주꾸미면 주꾸미지. 피자랑 주꾸미는 뭐냐. 영 어울리지 않는 낯선 조합도 조합인데 주꾸미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고래의… 미친.

“밥 사준다면서요. 난 이게 먹고 싶었는데요.”

“어, 그래… 많이 먹어.”

콩나물, 채소와 함께 철판에서 지글지글 볶아지고 있는 주꾸미는 분명 맛깔나 보였지만 이도하는 전혀 식욕이 돌지 않았다. 그는 피자나 한 조각 집어 들었다. 뽀얀 치즈가 노릇노릇하게 익어 아주 반질반질했다. 치즈가 길게 늘어졌다. 젓가락으로 대충 휘감은 뒤 꿀에 찍어 먹으니, 촉촉하고 달콤하다. 오즈에도 피자가 있나. 이도하는 무심코 생각했다. 고작 밀가루에 치즈만 올라간 음식이니 이건 좀 쉬울 것 같은데.

“근데 이도하씨, 처음에는 무슨 웬수처럼 굴더니 역시 막상 계약자를 접하니 좀 다른가 봐요? 지난번에 내가 그림 좀 배우라 했을 때는 시큰둥했잖아.”

“김윤혜씨.”

“왜요.”

고르곤졸라를 우물거리던 이도하가 물었다.

“내가 얼빠였나?”

“당연하죠.”

즉각 나온 대답에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김윤혜가 시큰둥했다. 그런 쓸모없는 질문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원래 인간은 다 얼빠예요.”

“……”

평소라면 콧방귀나 끼고 말았을 텐데, 이도하도 이번에는 좀 진지했다. 아무래도 정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괜히 서시나 양귀비, 클레오파트라 같은 고대 미인들이 아직까지 이름을 날리는 게 아니고… 지금도 예쁘고 잘생긴 연예인들에 사람들은 열광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지. 사람이 시각적인 자극에 가장 약하다는데 아름답게 생긴 것에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더구나 시오한 정도라면 누구라도 그럴 테지.

그사이 김윤혜는 불을 끄고 주꾸미 볶음을 크게 한 숟갈 덜어 제 밥 위에 박박 비볐다. 붉은 양념이 찰진 밥과 고슬고슬 섞이니 그 위에 김을 솔솔 뿌린다.

“물론 오르페노스 황제는 이도하씨의 계약주라 기본적으로 애착과 애정을 느끼게 되니 더 그럴 거고요. 오징어 한 마리였더래도 애정이 갔을 텐데 기적이니 뭐니 할 정도로 예쁘면 두말할 것도 없는 거 아니에요?”

“…어, 그래. 오징어가 아니라 다행이네….”

다행인지 아닌지 사실 잘 모르겠다. 적어도 오징어였더라면 이렇게 심란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이도하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김윤혜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째 탐탁지가 않아 보이네요.”

“탐탁지가 않아.”

“뭐 때문에요.”

“……”

“이도하씨 개인 연구 부분에 당연히 계약자와의 심리도 들어가는 거 알잖아요. 새삼스럽게 뭘 내외를 하고 그런담.”

주꾸미 볶음밥을 크게 와앙 욱여넣을 준비를 하며 김윤혜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이도하도 딱히 자세를 잡고 진지하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저렇게 햄스터처럼 볼이 빵빵해져서 오늘 좀 춥더라, 하는 것처럼 말하니 정말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좀, 이상해서.”

“뭐가요.”

“거기서는 괜찮은데, 돌이켜보면 이상하거든.”

“그러니까 뭐가요?”

“…내 행동이.”

아우. 말하려니 또 떠오른다. 얼굴에 열이 몰렸다. 이도하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 숨에 갇혀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으, 견디지 못한 이도하가 쿵쿵 발을 굴렀다. 뭐라도 때릴 것 같아 주먹을 꽉 쥔 순간 특기가 튀었다. 콰직! 소리가 났다.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스테인리스 물컵이 공처럼 우그러져 있었다.

“……”

“그건 물어내고요. 지랄하지 말고 그냥 좀 말해 봐요.”

김윤헤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한쪽으로 슥 치워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나 말이 험해진 걸 보면 좀 짜증은 난 모양이었다. 별 유난이다, 싶은 눈치였다. 큼, 이도하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어느새 저도 모르게 꼬깃꼬깃 구겨버린 고르곤졸라를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별로 입맛도 없었다.

창밖을 보니, 축축하게 비가 오고 있다. 간만에 내리는 비였다. 하늘은 어둡고, 창문에 물방울이 맺혀 또르륵 흘러내린다. 오즈에도 비가 오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말 그대로 좀 이상하다고. 보통 내가 안 할 짓을 막 하고…. 근데 정작 그 순간에는 그게 뭐가 이상한지 몰라. 근데 돌아와서야 생각해 보면 왜 그랬지 싶어.”

이도하는 그냥 인정했다. 그는 시오한을 좋아했다. 그건 정말 그를 좋아한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남자이니 뭐니 게이가 된 건가 싶은 정체성의 고민까지 가기 전에 일단 그냥 그랬다. 애착이 갔으며 애정을 느꼈다. 달리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으며,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은 아쉬웠다. 시오한이 돌아가야 한다고 했을 때는 분명 실망했다. 그 마지막 소환이 벌써 일주일하고도 삼 일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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