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물론 이도하는 궁인이 받은 충격 따위는 별로 안중에 없었다. 시오한이 제 체면을 신경 썼다면 말이 달랐겠지만, 그도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신경 쓰기는, 지난번의 디트리오인지 오트리오인지 하는 기사 때도 그렇고 시오한은 오히려 이런 상황들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이도하가 보란 듯이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탁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걸 먹었다간 진짜로 당신 머리에 토하겠어.”
“허억.”
궁인이 숨을 집어삼켰다. 단숨에 얼굴이 창백하고 핼쑥해졌다. 보아하니 이 궁인에게는 속에서 반쯤 소화되다가 다시 바깥으로 나온 몹쓸 것의 이름 따위는 감히 황제의 앞에서 입에 올리는 것조차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도하로서는 정말 골고루 유난이다 싶었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했다가는 황제가 아니라 불알친구조차도 단숨에 부모 죽인 원수처럼 척을 지게 되겠지만, 설마하니 제가 시오한에게?
“요, 용서하십시오….”
이도하의 마뜩잖은 눈빛을 받은 궁인이 납죽 엎드렸다. 발발 떠는 걸 본 이도하가 혀를 찼다. 그는 대체적으로 남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매번 이렇게 싫어하거나, 무서워하거나, 하여간에 썩 좋은 감정은 아닌 것으로 누가 절 대하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그런 마음으로 그를 보는 것 같았다.
궁금하면서도 그들이 하듯 황제를 떠받들며 공손히 하지 않으니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은데, 또 그 황제의 계약자니 뭐 이해는 하고, 그러면서도 어쨌든 좀 싫고, 동시에 그 기저에는 은근한 두려움이 깔려 있는, 종합적으로 교통정리가 통 될 수가 없는 상태.
언제까지 저러려는지. 굳이 또 상대를 편하게 해 줄 넉살도 친절함도 없는 이도하는 몸을 일으켰다. 시오한이 잠깐 그를 붙잡았다가, 놓았다. 그냥 이대로 늘어져 있고 싶을 만큼 귀찮았으나 정말 내내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슬슬 이게 꽤 남사스러운 자세라는 자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정말 빈속에 뭐든 밀어 넣고 싶었다.
“그냥 내가 주방에 가서 대충 해 먹는 게 낫겠어.”
“그대가 직접?”
시오한이 눈을 반짝였다. 꼭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마를 짚고 있던 이도하가 물었다.
“당신은 점심 먹었을 거 아니야.”
“먹지 않았어.”
시오한이 냉큼 대답했다.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이도하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중천을 넘어서 한참은 기울어져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점심보다도 저녁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알겠다.
“이 사람 진짜 점심 안 먹었습니까?”
이도하가 조아린 궁인에게 물었다. 그가 제게 직접 말을 걸 줄은 몰랐는지, 크게 놀라며 움찔 떤 궁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도하가 냅다 시오한의 눈을 손으로 가려버렸다. 그를 따라 일어서려던 시오한이 침대에 다시 쿵 박혔다. 켁, 궁인이 목 졸린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매번 반응이 아주 즉각적이었다.
“안 먹었냐고요.”
제 눈을 덮은 이도하의 손을 감싸며, 시오한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들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렴. 그렇겠지. 황제가 저렇게 웃고 있는데 눈치 없이 예, 드셨습니다, 할 눈치 없는 새끼가 궁에서 일할 리가 있나. 완전히 눈 가리고 아웅이다. 이도하는 시오한을 놓아주며 그때까지도 쓰고 있던 토끼 머리띠를 벗어 팔에 걸었다. 치렁치렁 소맷자락이 휘날리는 싸구려 곤룡포도 벗었다.
“그래. 그럼 가서 정답게 겸상 한 번 더 해보자.”
이도하가 손을 내밀었다. 반짝 웃으며, 시오한이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 주방이란 게 이렇게 멀 줄 알았더라면, 그냥 음료나 좀 달라 그래서 마시고 말았을 거라고 이도하는 생각했다. 근 20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평소라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겠으나, 이렇게 속이 안 좋고 만사가 귀찮을 때 걸어갈 거리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꼭, 정말로 꼭 도약을 좀 배워놔야겠다. 이도하는 다짐했다.
“업어주겠다니까.”
시오한이 물었다. 여느 때처럼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한바탕 시오한에게 이런 누추한 곳이 어쩌고저쩌고 난리를 피워댄 사용인들이 썰물처럼 빠진 주방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드라마에서나 간혹 보던 호텔의 주방처럼 거대하고, 생각보다도 잘 되어 있었다. 목재가 아닌 얇은 금속으로 된 싱크대와 자제들을 보며 한 번 감탄한 이도하는 냉장고를 뒤지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냉장고가 대체 어느 원리로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철제로 된 네모난 박스인데 안이 아주 차가워 살얼음까지 살짝 끼어 있었다. 우리 집 냉장고보다 좋은데. 아마 누군가의 계약자일 어느 특기자가 온도를 내려놓았던가, 겨울을 입혀 놓았을 수도 있겠다, 하며 관찰하던 이도하가 대답했다.
“귀한 몸으로 누굴 업으시겠다고요.”
“지난번에는 그대가 날 안아줬으니, 이번에는 내가 그대를 업어야 공평하지.”
물론 안는 것도 괜찮다, 하고 시오한이 말했다.
“다만 그대가 원하지 않을 듯 하여.”
“죽기 전에나 소원이라고 하면 고민해 볼 정돈데. 환자한테 업히는 것도 물론 사양이고. 좀 받아 봐.”
냉장고에 안에는 정말 온갖 것들이 다 있었다. 고기가 가장 많았고, 채소도 빠져 죽을 정도로 있었다. 코끼리도 일주일은 먹을 양이었다. 빌어먹을, 이걸 다 먹기는 하나. 이도하는 적당한 크기로 포장된 고기 한 덩이를 뒤에 선 시오한에게 건네주고, 계란도 찾아 다섯 개나 건넸다. 뭔지 모르겠지만 조그맣고 자글자글한 게 말린 멸치 같은 것을 담은 봉지도 일단 건넸다.
“지금까지는 굳이 배워놓지 않았던 이유가 있나?”
“어머니가. 정신 사납게 여기서 뿅, 저기서 뿅 하지 말고 운동도 할 겸 좀 걸어 다니라면서 못 쓰게 했지. 여긴 해산물은 안 먹어?”
그러나 그것 말고는 바다에서 난 것으로 추정되는 무엇도 없었다. 시원하게 속이 풀리려면 아무래도 해산물을 넣어야 하지 않나 하는 게 이도하의 짧은 요리지식이었다. 바지락, 다시마, 뭐 그런 것들.
“이리스티리움은 위성국이 아니라면 바다를 접한 곳이 없어서 아무래도 해산물에 익숙하질 않지. 아직도 바다에서 난 것들은 다 괴물이라고 믿는 백성들도 꽤 되는걸. 낙지를 고래의 정액이라고 생각하는 낭설이 아직도… 조심!”
손을 헛짚은 이도하가 삐끗했다. 시오한이 거대한 고깃덩이에 얼굴을 박을 뻔한 이도하를 당겼다. 들고 있던 재료들이 우르르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이런 미친. 그게 무슨 개소리야?!”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낙지탕탕, 산낙지. 낙지볶음. 핵꿀맛인데. 설마 오즈에서는… 절 돌아보는 이도하의 표정을 본 시오한이 풋 웃었다.
“화이람. 낭설이야. 정액이 살아 움직일 리가 없지.”
그게 그렇긴 한데. 이도하가 얼굴을 구겼다. 빛으로 빚은 천사 같은 얼굴로 웃으며 정액 같은 소리를 태연하게 하고 있으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좀…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이런, 낙지를 좋아해?”
시오한이 곱게 웃으며 말했다. 사뭇 순진무구했다. 이도하는 좀 낙심했다. 낙지가 아니라, 아니 지금은 낙지도 물론 문제이긴 하지만, 차마 그 얼굴로 그런 단어를 말하지 말라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생겼든 19금에 준하는 단어를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 그만. 의식을 따라가던 이도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좋아하지. 근데 당분간은 못 먹을 것 같다….”
이도하가 힘없이 쪼그리고 앉았다. 뭘 더 찾을 의욕도 나지 않았다. 시오한이 나란히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가 보이는 족족 꺼내놓았던 온갖 재료들을 함께 주웠다. 시오한이 태어나 바닥에 무릎을 대 본 게 처음이라는 걸 이도하가 알 리는 없었다.
“그런데 화이람… 이걸로 대체 뭘 만들 수 있지?”
“……”
거대한 조리대에 재료들을 우르르 쏟아놓은 뒤, 시오한이 묘한 얼굴로 물었다. 널 믿기는 하는데, 지금은 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도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냉장고를 뒤질 때는 그래도 저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들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완전히 오합지졸이었다.
“기다려 봐. 다 계획이 있다고.”
이도하가 호기롭게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고기, 일단 고기를 볶자. 그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아주 조금 두르고 통고기를 그대로 던져 넣었다. 고기에 기름이 너무 많이 돌면 안 되니까. 단순한 생각이었다. 시오한이 손끝을 움찔 떨었다. 그는 당연히 요리라고는 해 본 적도 없으며, 주방에 와본 적이 이번이 처음이지만 어떤 감으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느새 숙취도 잊은 것 같은 이도하는 이미 불이 붙은 상태였다.
“이거 미역 아니야?”
간을 할 향신료를 찾아 서랍을 뒤지던 이도하가 불쑥 뭔가를 꺼내 들었다. 네모나고, 커다랗고, 시커멓고, 바삭한 무언가였다. 미역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다에서 난 해초는 맞는 것 같다. 시오한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역국 하면 되겠네.”
“…음.”
이번에는 그러라고 상쾌하게 동의하지 못했다. 시오한은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이도하가 하는 것을 지켜봤다. 네모나고 커다랗고 시커멓고 바삭한 무언가를 칼로 댕겅댕겅 자른 이도하는 물을 넣은 냄비에 그것을 던져 넣었다. 소금도 조금 넣고는 짙은 갈색의 향신료의 냄새를 맡더니 그것까지 한 숟가락 넣었다. 육수는 역시 멸치라며 멸치를 닮은 무언가도 넣고 나니 곧 물이 끓기 시작했다.
이도하는 고기도 풍덩 넣었다.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자신만만한 손길만 본다면 요리를 30년쯤 해 온 주방장이라고 믿어도 좋을 정도였다. 덩어리째 구워지고 있던 고기는 당연히 겉만 살짝 익고 속은 날 것 그대로였지만 어차피 뜨거운 물에 넣으면 다 익는다는 식이었다.
시오한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체념하여 얌전히 지켜보았다. 그는 제 계약자가 요리에는 전혀 소질이 없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