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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6화 (16/250)

16화

억, 하는 사이에 이도하는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다 이불에 얼굴을 푹 처박고 말았다. 큽- 머리 위에서 꾹 억누른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도하도 이제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는 이불에 고개를 처박은 그대로 끅끅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휘적거리는 소매가 긴 옷자락은 곤룡포였다. 이도하는 대체 저가 이걸 왜 주워 입고 있는지 아득했다. 온 학교를 빨빨거리고 쏘다니던 유세오가 곤룡포를 입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저는 토끼 머리띠에다 괴상하게 생긴 용이 번쩍이며 눈을 부라리는 싸구려 곤룡포까지 입고 학교를 배회했다는 말이었다. 아, 이건 휴학각이다. 휴학이야. 어처구니가 없어 이도하는 웃음밖에 안 나왔다.

고개를 드니, 아니나 다를까 시오한은 얼굴까지 빨개져 있었다. 웃음을 참느라고 아주 곤욕을 치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새삼 신기했다. 티끌도 미끄러질 것 같은 얼굴에는 혈관 따위도 없어 보였는데. 깎아놓은 조각보다도 더 인간미 없는 얼굴에, 행동까지 느려 매 움직임 하나하나가 비현실적이었던 그가 저러고 있으니 퍽 생기가 돈다. 웃는다 이거지. 씩 웃은 이도하가 달려들었다.

“!!!”

시오한이 풀썩 넘어졌다. 황금색 머리칼이 올올이 비산하며 반짝거렸다. 잽싸게 토끼 머리띠를 주워든 이도하는 웃다가 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시오한의 머리에 머리띠를 씌웠다. 거의 반쯤 덮치는 모양새였는데도 대응이라고는 없어 어렵지도 않았다. 같이 우스워져 보자고 씌운 것이었는데, 잠깐 놀랐을 뿐 시오한은 그리 당황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절 타고 앉은 이도하를 보고는 묘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웃는다.

“어울리나?”

시오한이 보송보송한 토끼 귀를 퉁겼다. 잊고 잊었다. 이 황제가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지를. 고작 털이 보송보송한 토끼 귀 따위에 시오한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즐거워 보였다.

“화이람. 귀여운 건 모친의 취향이라고 하더니.”

“…그랬지.”

대답하는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이도하가 마른침을 삼켰다. 연푸른빛의 이불 위 황금빛 머리칼이 화려하게 흩어져 있다. 발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은 어느새 옅은 홍조만 남기고 말끔하다. 머리띠에 눈을 정말 정통으로 얻어맞긴 했는지 심지어 한쪽 눈은 빨갛게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제1기사라더니 허술하게 뭘 머리띠 따위에 얻어맞냐고 놀려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얼굴에 흰 토끼 머리띠를 쓴 모습은 정말이지……

변태가 될 것 같았다.

“이제 보니, 나도 귀여운 걸 좋아하는 것 같아.”

“……”

시오한이 하얀 토끼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부드럽게 머리띠를 벗어, 다시 이도하의 머리에 씌웠다. 이도하는 망부석처럼 굳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시오한이 또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러고 다니지 않는 게 좋겠어.”

머리띠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손이 오른쪽 눈가에 닿았다. 눈 아래, 시오한이 새겨놓은 그의 이름이 있는 곳에. 닿을 말듯 감싼 손에, 이도하가 반사적으로 눈가를 찡그렸다. 엄지가 눈 아래의 여린 살, 이름 위를 가볍게 훑었다. 기다란 손가락 끝이 귓바퀴를 건드렸다. 다정하게 감싸는 손길에 이도하가 고개를 움직였다. 언뜻 피하는 듯 했으나, 결국은 그 손바닥에 제 얼굴을 더 기대면서. 한숨이 나올 것 같다. 이도하가 꾹 입술을 물었다.

“…토할 것 같아.”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뭐?”

“올라올 것 같다고… 욱.”

“화, 화이람.”

이도하가 올리는 시늉을 하자 시오한이 말을 더듬었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당황이 엿보였다. 이도하는 흡사 당장 삿된 것을 쏟아내기라도 할 듯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그가 제 위에 앉아 있으니 시오한은 피하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댔다.

어깨를 짚었다가, 토닥여야 하나 싶었는지 가슴을 짚었다가, 종래에는 뭘 쏟아내면 일단 받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든 손을 받친다. 이도하는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욱- 하며 와락 그의 위로 엎어졌다. 시오한이 흠칫 몸을 떨었다.

“…화이람.”

시오한의 머리 옆으로 제 얼굴을 박은 이도하는 입술을 꽉 물고 웃고 있었다. 토끼 귀도 아무렇지 않더니 더러운 것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게다가 그 손은 또 뭐야. 정말 제가 토했으면 그 손으로 받기라도 하려고 했나.

태연자약하고 능글거리는 모습만 보다 이렇게 당황하는 걸 보니 이도하는 속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얼을 타는 절 보며 시오한이 왜 그렇게 재미있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시오한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이도하의 등을 토닥였다. 실컷 웃으라는 것처럼. 잔웃음을 머금고 있던 이도하가 이내 끙, 하고 신음했다. 실컷 웃고 나니 순식간에 몸이 무거워지며 피곤해졌다. 난리를 하느라고 잠깐 잊고 있던 숙취가 그제야 정말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아, 근데 진짜 속 안 좋아.”

“뭐라도 먹겠어?”

“뭐가 있는데….”

“글쎄. 뭐라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여기가 황궁인데.”

시오한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크고 긴 침대에 가로로 엎어져 있었다. 침대를 사용하는 사람은 헤드 부분에 머리를 대고 자니, 궁인을 부르는 끈도 당연히 머리맡에 있었고. 시오한이 가만가만 이도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화이람, 저 끈 좀 당겨 봐.”

“무슨 끈?”

이도하가 꾸무럭 고개를 들었다. 과연. 워낙에 침대가 광활한 탓에 손을 뻗기에는 너무 아득한 거리에 있었다. 그냥 사방에다가 좀 달아놓지. 언제 필요할 줄 알고. 이도하는 이불에 다시 머리를 박고 중얼거렸다.

“일어나야 되잖아….”

그러나 정말 귀찮았다. 조금도 움직이기 싫었다. 딱 알맞게 자리를 잡고 누운 겨울 이불 속에서 불을 끄지 않은 걸 깨달은 것처럼 귀찮았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는 형제자매를 적절히 이용해 먹는다고 하지만 이도하는 특기를 이용해 먹었기 때문에 귀찮음을 무릅써야 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 정도 일에는 좀 일어나라며 등짝을 때리는 어머니도 지금은 없고…

하지만 그의 계약주가 있었다. 설탕 과자처럼 연약한 그의 계약주는 그 정도 특기만 사용해도 또 와락- 피를 토할지도 몰랐다. 그 꼴은 귀찮은 것보다도 더 싫었다. 해서 이도하는 일어나려고 했다.

“그냥 당겨, 화이람.”

시오한이 그의 등을 꾹 눌렀다. 너무 강해 도저히 일어나지 못할 힘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도하는 그 힘에 순응해 잠시 그대로 있다가 한탄처럼 말했다.

“난 피는 지긋지긋해.”

“화이람. 겨우 끈 하나야.”

시오한이 웃었다. 그러나 이도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유세오의 방식으로 말하면, 피가 100까지 차는 걸 기다리지도 못하고 홀랑홀랑 써먹는 인간이다. 괜찮다는 이 말을 정말 믿어야 할까. 이도하가 머릿속에 이미 시오한은 마시멜로를 두 개는 못 얻어먹을 인간이었다. 세종대왕이라며. 김윤혜의 말을 다시금 떠올린 이도하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당신 몸이-”

“괜찮아.”

“……”

“난 괜찮아, 화이람.”

등을 감싼 손이 달래듯 느리게 쓸어내렸다. 이도하는 한동안 묵묵히 있다, 실랑이가 큰 의미가 없으리란 결론에 도달했다. 시오한의 말마따나 겨우 끈 하나였다. 하니 마니 하면서 쓰는 시간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게다가 시오한은 이미 아주 긴 실랑이에서 이도하를 이긴 전적이 있지 않던가.

이도하가 옅은 한숨을 내쉬는 순간, 아무도 손대지 않은 머리맡의 끈이 묵직하게 당겨졌다. 이 정도 가벼운 일에는 손짓 따위도 필요 없었다. 눈에 섬광도 돌지 않는다. 이도하는 고개를 들고 예민하게 시오한의 기색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새하얀 얼굴이 곧 죽을 환자처럼 창백해진다든가, 왈칵 피를 토하든가, 코피가 주르륵 쏟아지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빙그레 웃으며 이도하를 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어떻게? 이도하는 혼란스러워졌다. 열이 펄펄 끓으며 꼬꾸라져 쓰러진 게 고작 하루 전이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이도하를 소환했는데 시오한은 눈에 띄게 멀쩡했다. 설마 이전에 보여준 모습들은 연기였나. 사실 간 보는 거였나. 이도하가 눈을 가늘게 뜨는데, 거대한 문이 묵직하게 열렸다. 허리를 숙인 궁인이 종종걸음 치며 들어왔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화이람, 뭐가 먹고 싶어?”

대답 대신 시오한이 물었다. 미심쩍게 절 보는 이도하를 분명 눈치챘을 텐데도 전혀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러웠다. 아파서 좋을 것도 없으니 이도하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북엇국.”

“북엇국?”

시오한이 되물었고, 궁인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북엇국이 무엇이냐 하면, 말린 생선을 얇게 찢어 넣고 끓인 국이다. 거기에 뭐가 더 들어가느냐 하면, 당연히 이도하도 아는 게 없었다. 어머니의 손맛? 설명하는 게 귀찮아진 이도하는 질문으로 답했다.

“여기서는 숙취에 뭘 먹는데?”

“음.”

시오한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으쓱 어깨를 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강력한 힘을 갖춘 황후였고, 유일한 적장자인 시오한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제1계승자였다. 단 한 번도 그 지위가 흔들린 적이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 황태손이 되었고, 황태자가 되었다가, 황제가 된 것이다. 그러니 그는 숙취 해소가 필요할 만큼 술에 절어 본 적도 없었다. 취했다고 한들 그걸 음식으로 해소하지는 않았을 테였다.

시오한과 이도하가 동시에 고개 숙인 궁인을 바라보았다. 눈을 깔고서도 시선을 느꼈는지 궁인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뭘 먹지?”

“…산양유에 날계란과 버터를 넣어 마십니다.”

“욱.”

미친 거 아니냐. 듣기만 해도 올라올 것 같다. 이도하가 다시 고개를 숙였고, 감히 황제의 침전에서 누군가 게우는 소리를 들은 궁인이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정말 게우는 소리라면 그는 제 몸을 날려서라도 이 고귀한 방의 어느 한 점조차 더러운 것이 닿지 않게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턱이 툭 떨어졌다.

두꺼비인지 용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흉측한 무언가가 눈을 부라리는 새빨간 옷에, 머리에는 토끼 귀를 단 사내가 제 황제를 덮치고 있는 망측한 광경에 굉장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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