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유세오는 아무래도 제가 말을 잘못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 그렇게 허약한 사람이 아니다, 하는 뜻이었는데 하고 보니 위로가 아닌 느낌이다. 말을 좀 더 디테일하게 해야겠구나!
“…형. 봐 봐요. 지금 오르페노스 황제가 왜 그렇게 몸이 안 좋냐면, 진짜 단순하게 기력이 다 회복이 안 됐는데 형을 자꾸 다시 소환해서 그런 거예요. 예를 들어서 형을 소환하는데 기력이 30만큼 필요하다면, 물론 그만큼 필요하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예를 들어서 30만큼이 필요하다면, 오르페노스 황제는 35만큼 회복되자마자 형을 소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100까지 다 채우고 형을 소환하면 지금처럼 기절 엔딩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 말을 시오한한테 좀 해 주지 그랬냐.”
“어…… 본인 기력인데 본인이 제일 잘 알지 않겠어요?”
“그래.”
이도하가 살벌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문제지.”
알면서 자꾸 제 몸 깎아먹는 짓을 하니까. 이게 정말 다 개수작 아닌 개수작을 위해서인지 이도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미련한 짓을 할 인사는 아닌 것 같지만, 또 알다가도 모를 사람 아닌가. 게다가 유세오의 말마따나 왜 그놈의 기력이 더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는지, 사실 시오한은 이미 답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말로 보고 싶었어.’
문제는 그 답 또한 문제라는 데 있었다. 이도하는 무의식중에 거칠게 가슴을 문댔다. 좀 화가 나고… 답답했다. 그리고 제가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가 없어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대체 왜?
눈치를 보는 유세오는 마치 풀이 죽은 강아지 같았다. 그래도 제 계약주의 소식을 전해 주겠다고 통통 뛰어왔는데 괜한 성질을 부린 것 같아 미안해진 이도하는 몸통만 남은 설탕과자를 쥐여 주었다.
재깍 기운을 찾은 유세오는 다시 발랄해져 사탕을 빨며 한껏 축제를 즐겼다. 친절하게 사람들과 사진도 찍어주고, 한복도 빌려 입어보고, 긴 줄을 기다려 일명 한국대 남신과의 공중 산책까지 알차게 챙기면서. 술 한 방울 대지 않은 유세오는 술에 취한 것처럼 어울리다 길가에 술병 대신 사람들이 굴러다니기 시작할 때쯤에야 돌아갔다.
이도하가 그 꼴을 보는 일은 잘 없었다. 술도 맛있고 술자리도 재미있지만 길가에 사람들이 굴러다니기 시작하면 곧 여기저기에 피자도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건 별로 재미도 없고 볼거리도 못 되었다.
그러나 이날따라 유독 술이 달았다. 한 잔 두 잔 넘기던 이도하는 슬슬 눈앞이 어지러운 것을 느끼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붙잡았으나, 그도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으므로 떼어 놓는 것은 별로 일도 아니었다.
집에 가기엔 버스도 다 끊겼고, 택시를 잡기도 귀찮았다. 푸르르 한숨을 내쉬며 이도하는 과방으로 향했다. 담배 냄새가 쿱쿱하게 나는 소파에 풀썩 몸을 눕히고 나니 사방이 깜깜했다. 와중에 어디 걸리지도 않고 잘 왔네. 실없이 생각하며 이도하는 눈을 감았다.
‘화이람’
꿈인가. 하루 종일 시시때때로 떠오르던 목소리를 또 들었다.
‘화이람.’
응, 시오한.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그건 꿈이었는데.
지독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뜬 이도하는 얼이 빠졌다.
“…시오한?”
황금색 눈동자가 웃음기를 가득 머금고 그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응, 화이람.”
짹짹, 바깥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불쾌한 두통, 무거운 몸, 싹둑 잘린 기억, 예고 없는 아침. 술 마신 다음 날의 흔한 아침인데 뭔가 이상하다. 술 취한 적은 많지만 엉뚱한 곳으로 기어들어 가는 주사는 없었는데.
이도하의 주사는 한 번 엎어지면 그 자리에서 정말 죽은 듯이 자다 엎어진 자세 그대로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도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다시 물었다.
“시오한?”
“그래, 나야. 화이람.”
다정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아직도 술에 취해 꿈을 꾸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시오한 오르페노스. 이도하의 계약주였다. 시오한은 침대 위에 모로 누워 느긋하게 턱을 괴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풀어놓은 머리칼이 어깨며 목선을 타고 흐트러져 있다. 느지막한 정오의 햇살이 그의 등 뒤로 비춰 들어오며 그 위로 반짝거렸다. 어른거리는 빛은 물속에 풀어진 것처럼 나른하게 너울거리며 그를 덮고 있었다.
이도하가 멍하니 손을 뻗었다. 시오한은 대뜸 뻗어오는 손을 피하지도 않고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그 손이 마침내 제 이마에 얹히자 얼떨떨해졌다. 실타래 같은 머리칼들이 이도하의 손 위로 사르륵 흩어졌다. 반듯한 이마에 손을 꾹 얹고 있던 이도하가 풀썩 손을 떨어트렸다. 시오한은 석상이 된 것처럼 굳어 있었다.
“…열은 없네.”
반쯤 잠결로,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그는 아직도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몽롱했다. 속에서 술 냄새가 올라와 속도 울렁거렸다. 으… 신음하며 이도하는 제 이마를 짚었다. 열은 아무래도 저가 있는 것 같다며 혼자 구시렁거리다가, 언뜻 눈을 떴다.
시오한은 여전히 그 모양 그대로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좀 얼이 나간 것 같았다. 그런 얼굴은 또 처음이라 이도하가 피식 웃었다. 진짜 잘생기긴 존나 잘생겼다. 김윤혜, 뭐라 그랬냐. 술 취하면 남자한테 뽀뽀할 수 있냐고? 어, 가능. 핵가능. 열두 번도 더 할 수 있겠다더니 그 말이 맞네, 김윤혜야. 역시 똑똑한 김윤혜.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도하는 실실 웃음을 흘리기만 했다. 조금 후에야, 시오한이 말했다.
“…화이람. 술 냄새가 많이 나.”
“많이 마셨으니까 그렇지.”
뭘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타박을 주면서도 이도하는 종이 댕댕 울리는 것 같은 머리를 푹신하고 부드러운 침대에 처박았다. 그러다가 뒹굴 굴렀다. 시오한이 바로 옆에 누워 있었으니, 그렇게 구르면 바로 지척이었다.
이마가 시오한의 가슴팍에 닿았다. 시원한 향이 났다. 따뜻할 줄 알았는데. 어쨌든 닿으니까 기분은 좋다. 반쯤 엎드린 이도하가 꾸물꾸물 굼벵이처럼 움직이며 더 파고들었다. 시오한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곧 뒷목에 무언가 와 닿았다. 이도하는 숙취와 수면 중간 어디쯤인가를 헤매고 있었다. 단정한 손끝이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머리칼을 스쳤다. 간지러워. 중얼거리자 뚝 멎는다. 그리고는 다시 깃털처럼 부드럽게 뒷목을 감쌌다. 거기가 간지럽다는 소리가 아니었는데. 어쨌든 생각 외로 서늘한 손이 뜨뜻하게 열이 오른 것 같은 뒷목을 가만가만 어루만지자, 저절로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화이람.”
“응.”
“술을 잘 마셔?”
“한두 병 먹나….”
“한두 병?”
“보통이야.”
“좋아해?”
“왜….”
“그대는 별로 술을 즐길 것 같지 않았거든. 혹여… 좋지 않은 일로 마신 건가 하여.”
“그냥 좋으면 가끔, 싫으면 한번, 그러는 거지.”
“다음에는 나와 마셔.”
이도하가 웃음을 흘렸다. 오즈에서 술을 마시라니. 그런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는데 듣고 보니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이도하는 술을 챙겨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있다면 굳이 빼지도 않았다. 시오한과 마주 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 한 잔 하는 상상을 하니 파전 냄새가 구수하게 나는 것이 너무 한국적이라 웃겼다. 하지만 시간도 많이 없는데, 술을 마시는 건 좀 시간 낭비가 아닌가.
쓰러지지나 마라지. 그래, 환자를 앉혀 놓고 술이 웬 말이냐. 이도하는 근심스러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짚으려고 했다. 소매가 뭔가에 깔려 팔이 좀처럼 당겨지지 않았다. 옷자락 뭐가 이렇게 길어. 게다가 아까부터 이상하게 휘적휘적 불편하게 휘감겼다. 이게 왜 이래? 좀 편하게 누워보려 뒤척이는데 이번에는 또 머리 위에서 뭐가 푹 쏟아졌다.
이도하가 갓 태어난 아기처럼 꾸물거리는 걸 지척에서 보며 시오한은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바짝 곁에 닿은 가슴이 잘게 떨렸다.
뭘 웃냐, 웃길. 툴툴거리며 무심코 머리에서 쏟아져 내린걸 추스르려던 이도하가 우뚝 굳어버렸다. 손끝에 만져지는 건 넓이가 꽤 되는 머리띠였다. 보들보들한 그 머리띠에 뭐가 달려있는지, 지난밤의 기억들이 뺨이라도 때리듯 촤르륵 쏟아졌다.
이도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윽!”
“!!!”
이도하의 머리통이 시오한의 턱을 콱 들이받았다. 웃다가 불시에 얻어맞은 시오한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턱을 부여잡은 채 푹 꼬꾸라졌다. 살도 별로 없는 단단한 턱뼈와 충돌한 이도하의 머리통도 썩 무사하지는 못했다. 두 환자는 한동안 넓은 침대의 각기 곳에 웅크려 머리통과 턱을 잡고 끙끙댔다.
죽빵을 날리겠다 한동안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는데. 이도하는 콱 찍힌 머리통을 문지르다 손에 걸리는 머리띠를 신경질적으로 잡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걸 아직까지 쓰고 있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술 취해서 잠들면 죽었나 싶을 정도로 미동도 않는 그 술버릇이 문제였다.
그런데 얕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이도하가 홱 고개를 돌렸다. 시오한이 제 얼굴을 붙잡고 있었고, 그 밑에는 깜찍한 토끼 머리띠가 떨어져 있었다.
“화이람….”
시오한이 처량하게 그를 불렀다. 보지도 않고 대충 던져버린 게 시오한의 얼굴에 명중한 모양이었다. 이도하는 당황했다.
“아니 그게, 내가 일부러 던진 게 아니라. 그거 아프지도 않잖아.”
“눈….”
아. 이도하가 얼른 시오한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 어질어질한 머리에 머리통도 아프고, 당황스럽고, 아무튼 조급한 마음에 이도하는 엉금엉금 무릎걸음을 했다. 그런데 예의 휘적거리는 옷감이 무릎에 깔렸다. 전진하려는 상체와 멈춘 하체가 부조화를 일으켰다.